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7강(눅10:1-4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년 10월 26일(목)
1.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에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70명의 제자를 훈련시켜서 35개조로 파송을 하고 계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눅10:1-2)
(1) 1년도 채 남지 아니한 기간에 사마리아와 유대 지역 그리고 예루살렘 전도를 마무리하여야 하는 예수님의 바쁜 공생애 일정(눅10:2);
1)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3년 6개월간이라고 말하고 있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음; ①첫째, 의사 누가의 복음서 기록에 따르게 되면, 주후 28년 하반기에(눅1:26, 3:1, 21-23) 요단 강가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돌아와 제자를 모집하시고 약간의 복음사역을 하심(눅4:14-15, 요1:28-2:12). ②둘째, 사도 요한의 복음서의 기록을 따르게 되면 이듬해 주후 29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전청결사건을 일으키심(요2:13-25). ③셋째, 그 다음해인 주후 30년 유월절에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요5:1-18). ④넷째, 그 다음해 곧 주후 31년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아니하시고(요7:1) 가을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은밀하게 들어가심(요7:2, 10, 14). ⑤다섯째, 그 다음해인 주후 32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을 당하신 것임(요12:1, 12-16, 눅22:7-15, 54, 23:25-16).
2) 이상의 복음서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대략 3년 6개월 정도의 공생애를 지내신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는 것임. 그렇다면 갈릴리에서의 사역이 길고 남하하여 사마리아와 유대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이 1년도 못되게 짧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음과 같이 두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가 있음;
3) 첫번째 이유는, 아무래도 예루살렘에서 성전청결사건을 일으키고 안식일에 병자와 장애자를 치유한 사건들 때문에 유대교지도자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급기야 살해 위협까지 받게 되자(요5:1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 공회의 권한이 직접 미치고 있는 유대 땅과 사마리아에 발걸음을 하지 아니하려고 했기 때문임(요7:1).
4) 둘째 이유는 갈릴리에서 복음사역을 하게 되면 그 인근에 살고 있는 이방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빨리 전파할 수가 있다는 잇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음.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방 헬라인들이 살고 있는 3개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사역을 하신 것임; ①첫째, 갈릴리 호수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거라사 지방(눅8:26) 및 요단 강 동편의 데가볼리 지역(막7:31) ②둘째, 갈릴리 북쪽과 헬몬 산 남쪽의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마16:13) ③셋째, 옛날 페니키아에 속하는 두로와 시돈 지역(마15:21, 막7:24, 31) 등임.
(2) 사마리아의 35개 마을에 먼저 제자들을 파송하여 전도를 하게 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그 마을들을 방문하여 빨리 복음사역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전략에 대하여(눅10:1);
1) 역사적으로 사마리아는 그 옛날 이스라엘 10지파가 독립하여 세운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왕도였음(왕상16:24, 왕하17:6). 주전 722년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한 후 그 땅에서 이스라엘 10지파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여호와신앙마저 우상문화로 전락을 하고 있음. 그 이유는 앗수르제국이 선민우월사상을 지니고 있는 북조 이스라엘을 싫어하여 다음과 같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기 때문임(왕하17:23-33); ①첫째, 쓸 만한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그리고 식자층(識者層, 글을 읽고 학문을 한 계층의 사람들)을 전부 앗수르 변방으로 끌고가 버렸음. ②둘째, 앗수르가 이스라엘 땅에 식민정책과 혼혈정책을 추진하여 이스라엘 10지파 자손들의 족보와 피의 순수성을 없애 버림. ③셋째, 앗수르의 온갖 잡신과 우상을 들여보내어 사마리아를 위시한 이스라엘 땅에서 여호와신앙을 우상문화로 전락시켜버린 것임.
2) 그러므로 나중에 주전 586년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망하게 되는 남조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은 피의 순수성과 여호와신앙의 순수성이 모두 사라져버린 북조 이스라엘의 유민들에 대하여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면서 멸시와 천대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 한 마디로, 같은 선민이며 동족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있는 것임.
3)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마리아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음. 사마리아 땅을 지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우물물도 나누어 주지 아니하고(요4:9) 숙박조차 거절하고 있는 것임(눅9:53).
4) 그렇게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하여 엄청 반감이 강화되고 있는 이유가 역사적으로 더 존재하고 있음; ①첫째, 그럴 만도 한 것이 주전 530년경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황제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고자 할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성전을 짓자고 하는 제의를 단칼에 거절하였으며(스4:1-4) ②둘째, 주전 130년경에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1세가 군대를 끌고 세겜의 그리심 산에 건설이 되어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붕괴시켜 버리기도 했기 때문임(요4:19-23).
5) 그러한 사마리아인들의 적개심과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잘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그 지역에 대한 복음사역을 빨리 마치기를 원하시고 있음. 따라서 70인의 제자들을 2인1조로 편성하여 동시에 35개 마을을 방문하고 빠른 속도로 복음사역을 하도록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에게 부여하고 있음(눅10:1-2, 17-18).
6) 요컨대, 평소 갈릴리와 그 인근의 이방지역에 대해서는 12사도들을 팀장으로 하여 12개조의 전도여행과 복음사역을 시행한 것과 비교하면(눅9:1-6, 40) 사마리아 지역에서는 3배쯤 빠른 속도로 전도여행과 복음사역을 실시하고 있는 것임.
2.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기 때문에 어린양들은 어떠한 훈련을 받아야 하며 목자는 어떠한 보호장치를 마련하고 있는가?(눅10:3-6)
(1) 어째서 어린양과 같은 성도를 이리와 같은 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 가운데로 보내야만 하는가?
1) 어린양에 대한 관념은 두가지임; ①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하다는 것임. ②또 하나는 속죄의 제물로 사용이 된다는 것임. 그러므로 연약한 어린양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어린양이 이리를 만나고 있는 것과 같은 고난의 행군인 것임(눅10:3).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양과 같은 성도들이 험난한 세상에 천국복음을 전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임.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가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영원한 제물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임(요1:29).
3)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이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공생애를 통하여 복음사역을 하심. 구체적으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과 장차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으며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는 천국복음을 모든 백성들에게 전하고 계시는 것임.
4) 이제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도와 제자들이 그러한 천국복음을 전하는 복음사역을 실시하고 있음. 특히 사마리아 지방에서는 빨리 복음사역을 마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대대적으로 35개조를 편성하여 파송하고 있는 것임(눅10:1-2).
(2) 성도들이 전도여행과 복음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능력이 필요하며 또한 어떠한 보호장치가 필요한가?
1) 첫째,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영적인 존재인 귀신을 상대할 수가 없음.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고 각종 병과 장애를 고치기 위해서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함(눅24:49, 행1:8).
2)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도와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한시적으로 부여해주신 것임(눅9:1-2, 10:9). 따라서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신이 나서 자신들의 축사(逐邪)의 기적에 대하여 보고를 하고 있는 것임(눅10:17).
3) 훗날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다음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나자 사도와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간구하고 있음(눅24:49, 행1:8, 14, 2:1). 그 이유는 이제는 한시적이 아니라 영구적인 성령님의 강림과 임재 그리고 내주 동행하심이 있어야 온세상에 천국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기 때문임.
4) 특히 이리떼와 같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어린양과 같은 성도들을 노리고 있는 그 세상으로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야만 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 역사하심은 필수적인 것임(눅24:49, 행1:8, 2:1-4).
5) 둘째, 전도여행과 복음전파를 위해서는 성도들의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해줄 수 있는 안배가 필요함. 그와 같은 조치를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완벽하게 마련해두고자 하시는 것임.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심;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10:4-6).
3.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그 집에서 먹고 마시면서 그 동네에서 어떻게 복음사역을 해야만 하는가?(눅10:5-9)
(1) 주님께서 마련한 집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1)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의 평안을 복 빌어 주라는 것임(눅10:5). 그리하면 그 가운데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할 터이니 묵으면서 마을에 복음사역을 해 달라고 요청하는 집이 생긴다는 것임.
2) 그리하면 그 청을 물리치지 말고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집인 줄 알고서 그 집에서 숙식을 받으면서 안심하고 복음사역에 전념하라는 것임. 그 이유는 ①첫째, 전도여행과 복음사역을 위하여 제반 지원을 도중에 확실히 해줄 것이므로 아주 단출하게 여행장비를 꾸리라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지시하신 바가 있기 때문임(눅10:4). ②둘째, 복음의 일꾼은 공생애를 살아가는 동안에 그 의식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는데 그것이 일꾼에 대한 정당한 삯이라는 것임(눅10:7a).
3) 그 점과 관련하여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레위인들에 대해서 여호와께서는 십일조를 그들에게 생계비로 주고 있으며(민18:21)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 “성전에서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3-14).
4) 그렇다면 전도자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안의 복을 빌어주고 있는데 숙식을 제공하지 못하는 집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감동이 없어서 그리고 숙식을 제공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전도자를 유숙하게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평안의 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지만 의도적으로 성도들의 출입을 배척하는 경우에는 그 평안의 복이 그 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임(눅10:6).
(2) 그 마을에 대한 복음사역을 그 집에서 마무리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
1) 첫째, 복음의 일꾼들이 그 집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 마을에서 치유사역을 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게 됨(눅10:8-9). 그러므로 그 집사람들이 시종 그 마을에 대한 복음사역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되므로 엄청난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가 있게 됨. 구체적으로, 천국복음을 많이 듣게 되고 치유의 사역에 대한 혜택에 그 집에 먼저 돌아가게 되는 것임.
2) 둘째, 전도자들이 그 집에 대한 평안의 복을 기쁜 마음으로 빌어주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복음전파의 중심으로 굳게 서게 되는 것임. 실제로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그렇게 전도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다가 그 집에 교회가 개척이 된 사례가 많은 것임. 그러한 유익이 있기 때문에 그 집에서 주는 대로 먹으며 그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인 줄 알고서 다른 집으로 숙식을 옮기지 말라고 강조하시는 것임(눅10:7b).
3) 참고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하실 때에 성내에서 숙식을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동쪽 교외 5리길에 위치하고 있는 베다니 마을로 와서 나사로의 집에서 숙식을 하신 것으로 보임(요11:18). 그 이유는 예루살렘성에서는 숙식비가 비싸기 때문임. 따라서 민박집이 많이 있는 베다니 마을에서 실비로 숙식을 해결하신 것임. 특히 나사로의 집과는 친분이 있어 시종일관 그렇게 지내신 것으로 보임(요11:5, 11, 눅10:38-42).
4) 따라서 그 집의 주인인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나기도 하고 그 막내 여동생인 마리아가 향유부음사건의 주인공이 되고도 있는 것임(요11:38-44, 12:3).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 위하여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고 있음(요12:9). 그렇다면 나사로의 집이 그 지역에서는 마치 교회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임.
4. 만민구원을 원하시는 주님께서 때로는 어떠한 구원의 대상자를 제자들에게 보내어 주시는가?(눅10:10-12)
(1) 당장 영접하지 아니하는 동네에도 복음의 일꾼을 보내시고 있음(눅10:10-11);
1)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눅10:10-11);
2) 복음의 일꾼을 당장 영접하지 아니하는 동네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들여보내고 계심. 그 이유는 그들도 모두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임.
3) 복음의 일꾼이 들어 왔으나 자신들이 배척하였기 때문에 발에 묻은 먼지까지 떨고서 떠나갔다는 사실을 그 동네주민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함. 왜냐하면, 훗날 또 다른 하나님의 역사가 그 동네에 임할 수가 있기 때문임.
(2)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거절하게 되면 어찌 되는가?(눅10:12)
1) 구약의 역사에 있어서 선민 이스라엘 사회에 여러 번 선지자들을 보내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심. 그러므로 한차례 복음의 일꾼들이 방문하고 마는 것이 아님. 나중에 다시 복음의 일꾼을 보내어 주실 것임.
2) 그러나 끝내 배척하고 거절하게 되면 그때에는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임.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적용이 될 것이기 때문임;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12:10).
3) 인생 가운데 여러 번의 기회가 있음. 주님의 말씀을 그 제자들을 통하여 전해 듣고서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임. 그러나 끝내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회개의 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까지 배척하게 되면 그때에는 멸망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임(요3:16-20, 눅10:12).
5. 선민 유대인들의 마을과 이방인들의 마을을 비교할 때 어느 곳에서 더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환영하고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그 이유가 무엇인가?(눅10:13-15)
(1) 선민 유대인들의 마을과 이방인들의 마을에서 복음사역을 하신 예수님의 총평에 대하여(눅10:13-15);
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눅10:13-15);
2) 갈릴리 지역에서 분봉 왕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마을은 가버나움을 포함하여 그 이서(以西)지역임. 그러므로 가버나움의 교외 마을 가운데 북쪽의 고라신, 서남쪽의 게네사렛 등은 당연히 선민 유대인의 마을임. 그런데 그의 이복동생인 헤롯 빌립이 다스리고 있는 갈릴리 호수 및 요단 강 이동(以東)지역과 북쪽 헬몬 산 남쪽 기슭 가운데 유일하게 선민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이 하나 있음. 그것이 바로 갈릴리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가버나움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가난한 어부들의 마을인 벳새다임.
3) 갈릴리 주변의 이방인 마을은 벳새다를 제외한다면 헤롯 빌립이 다스리고 있는 거라사와 데가볼리 그리고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의 마을들이 될 것임. 그런데 그러한 지역은 옛날 북조 이스라엘 10지파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 헬라인들이 옮겨와서 살고 있는 것임.
4) 그와 달리 역사적으로 완벽하게 이방인인 페니키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이 두로와 시돈임(마15:21, 막7:24, 31).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방도시로서 여기서 두로와 시돈을 손꼽고 있는 것임(눅10:14).
5) 이제 남하하여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왔으므로 그동안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실시한 복음사역에 대하여 총평을 하심. 그 내용이 한 마디로, 선민 유대인들의 마을에서보다는 이방인들의 마을에서 실시한 전도가 더 열매가 풍성했다는 것임(눅10:13-15).
(2)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1) 첫째, 유대인들의 선민사상 때문임. 유대교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선민 유대인들만이 창조주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음.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선민의 징표로 주신 할례와 율법을 지니고 있으며 율법에 따른 절기를 지키며 특히 예루살렘성전에서 매년 대 속죄일의 제사를 통하여 유대인들이 죄 사함을 받고 있으므로 유일하게 구원의 대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임.
2) 그러한 선민사상과 선민만의 구원사상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지를 아니하고 있음. 단지 질병과 장애를 치유하여 주고 귀신을 쫓아내어 주는 예수님의 그 큰 선지자로서의 치유사역만을 필요로하고 있는 것임.
3) 둘째, 이방인들이 헬라의 개방사상과 로마의 만민평등사상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임. 로마가 헬라세계를 전부 정복하였지만 그들은 실용주의 정책과 개방적인 정책을 지니고 있는 제국이므로 헬라의 철학과 학문 그리고 예술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 따라서 많은 민족과 속국들을 지배함에 있어서 정치와 군대 그리고 법률 등은 로마의 것을 적용하고 사상과 종교 그리고 예술과 학문에 있어서는 헬라세계에서의 것을 그대로 따르도록 하고 있음.
4) 그와 같은 로마의 관용과 세계제국다운 모습은 은연중에 이방인들에게 개방사상과 만민평등사상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임. 그러한 시대이므로 예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은 이방인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사상이라고 하겠음.
5) 단지 장차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면 그것은 다음 두가지임; ①첫째, 로마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우상의 문제 ②둘째, 초대교회가 영생구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영향력을 세속적으로도 크게 미칠 수가 있다고 하는 우려가 로마제국에서 발생하는 경우인 것임.
6. 복음사역에 전념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장해주시고 있는 보호장치와 그 놀라운 상급은 무엇인가?(눅10:16-20)
(1) 천국복음을 영접하는 자와 달리 저버리는 자에 대해서는 강력한 조치를 하심;
1)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10:16);
2) 사도와 제자들이 전하고 있는 천국복음을 백성들이 영접하게 되면 그 효과는 즉각적임. 왜냐하면,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판단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기 때문임.
3) 반면에 사도와 제자들이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백성들이 저버리게 되면 그 보응은 대단한 것임. 왜냐하면,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서 강력하게 조치를 하실 것이기 때문임.
(2)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도록 조치하심;
1) “70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10:17-19);
2) 제자들이 귀신을 숙주(宿主)인 사람에게서 쫓아낼 수 있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임. 그것은 창세기 제3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임; “여자의 후손은 네(마귀의 화신인 뱀, 창3:1, 여기서는 귀신들, 눅10:17)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3:15). 순수한 여자의 후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예언이시기에 반드시 실현이 되고 있는 것임.
3) 그 예언이 정확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취가 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창조주를 대적하던 사탄이 벌써 땅으로 추락을 한 바가 있기 때문임(눅10:18).
4) 그러므로 제자들이 자신들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 그것은 능력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임.
(3)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제자들에게는 축사의 능력보다 더 중요한 영생구원의 은혜를 주심;
1)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2) 70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으므로 매우 흥분하면서 기뻐하고 있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복음사역을 하게 되면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올라가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그 사실임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심.
3)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복음사역도 중요하지만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영생의 구원을 얻어서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살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임.
4) 그와 같은 궁극적인 상급이 이미 확정이 되어 있으므로 성도들은 세상의 환난과 세상임금의 핍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순교의 자세로 대속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임.
7. 어째서 세상의 지혜와 방법론에 빠져 있는 어른들이 하나님세계를 잘 보지 못하고 세상적인 지혜와 방법론이 모두 부족한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세계를 더 잘 볼 수 있게 되는가?(눅10:21-24)
(1) 70인의 제자들이 전도여행과 복음사역을 통하여 경험하고 있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눅10:17-20);
1)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임(눅10:17).
2) 둘째, 하나님에 의하여 사탄이 벌써 추락했다는 것임(눅10:18).
3) 셋째, 이 피조세상에서 악한 영들과 원수들이 결코 성도들을 해칠 수가 없다는 것임(눅10:19).
4) 넷째, 전도여행을 하고 복음사역에 나서는 제자들의 이름이 벌써 영생구원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임(눅10:20).
(2) 70인 제자들의 체험과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특징에 대하여;
1) 위와 같은 제자들의 체험과 예수님의 확언은 참으로 신기하고도 놀라운 것임. 그것은 율법생활을 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지혜와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임.
2) 첫째, 지난 백 년 이상 바리새인들은 글로 기록이 되어 읽을 수가 있는 히브리정경인 ‘미크라’와 구전이 되고 있어 귀로 들을 수가 있는 경전인 ‘미쉬나’를 비교연구하여 그들의 독특한 주석적인 설교집 ‘미드라쉬’를 완성하였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완전한 히브리인들의 지혜서로 대대로 전수하고 있으며 스스로 율법선생인 랍비가 되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음.
3) 둘째, 유대교지도자들은 다윗의 후계자인 메시아가 오시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 이스라엘의 제국을 재건하실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음. 그런데 메시아로 알려지고 있는 예수님은 전혀 그 생각이 다르심.
4) 그러한 선민들의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제국의 영광은 다시는 이 세상에 실현이 되지 아니한다는 것임. 그리스도는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임.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라고 전파하고 있는 것임.
(3) 피조물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지혜와 능력의 한계에 대하여(눅10:21-24);
1)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의 전성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하나님 능력을 행하시며 제자들에게도 색다른 체험의 기회를 주신 것임; 한 마디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며 치유의 능력을 행하도록 조치하신 것임.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신세계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음(눅10:21).
2) 하나님의 말씀을 수백 년간 지성적으로 연구하여 ‘탈무드’까지 만들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열심 및 세상적인 지혜와 비교할 때 예수님의 구원의 방법은 심히 간단하고 마치 어린아이의 것과 같은 것임(눅10:21). 왜냐하면,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창조주의 권능을 믿고 천국복음을 선포하며 치유의 사역에 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임.
3) 그렇지만 예수님의 구원의 방법론이 큰 장점을 하나 가지고 있음;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지혜와 세상적인 경험으로써는 결코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임. 따라서 영생구원이란 창조주 하나님 앞에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겸손하게 간구할 때에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것임”.
4) 그런데 선민들의 역사 가운데 그렇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서서 정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고백한 자가 드물다는 것임(눅10:22-24).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 제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선을 보이고 있는 놀라운 기적을 보지도 못했으며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의 의미를 깨닫지도 못했다는 것임.
(4)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복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눅10:22-24)
1)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선택이 되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게 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임(눅10:23).
2) 둘째,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게 됨에 따라 직접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고 하는 천국복음으로 듣게 되는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임(눅10:22).
3) 셋째, 구약상의 많은 선지자 및 다윗과 같은 신실한 임금이 자신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를 고대하였으나 그때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임(눅10:24).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그때를 보고 있으니 참으로 복이 있다는 것임(눅10:23).
4) 넷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와 같은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서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지혜자이며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임.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영생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의 현세적인 구원과 선민들의 영광에 불과한 것임.
5) 그에 따라 바리새인 랍비들로부터 율법교육을 받은 선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배척하고서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이스라엘 제국의 영광만을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알고서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는 것임.
8. 어떤 바리새인이며 율법교사인 랍비가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는 내용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율법의 의로움’을 따르게 되면 어떤 것이며 그것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가능한 것인가?(눅10:25-32)
(1) 율법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는 십계명의 내용이 무엇인가?
1) 율법교사인 랍비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있음(눅10:25). 그 의도를 이미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는지 아느냐고 되묻고 계심(눅10:26).
2) 그 바리새인 랍비는 선지자인 예수님과 여러 선민들 앞에서 자신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자랑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므로 신이 나서 답변하고 있는 것임; “신명기 제6장 쉐마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레위기 제19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동족인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눅10:27 의역).
3) 예수님의 답변은 그렇게 계명과 율법에 기록된 방법대로 실천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 되면 영생을 얻을 수가 있으니 그렇게 율법의 의를 이루라고 하신 것임(눅10:28).
4) 그런데 그 랍비는 자신은 그렇게 율법의 의를 이루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도무지 영생의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마음속 확신이 없으므로 그것이 문제인 것임. 따라서 혹시 예수님은 그 해답을 알고 계시는지 그 점이 궁금하여 시험삼아 질문을 해본 것임.
(2) 바리새인인 그 랍비의 오만과 자랑에 대하여;
1)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자신들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는 이치와 별로 다름이 없는 것임(눅10:27-28). 그렇다면 여전히 마음속으로 완전한 영생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것이 진실로 궁금한 것임.
2) 그렇지만 그 랍비는 예수님이 아시는 것도 자신이 알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성급히 판단하고 있음. 따라서 율법선생인 자신이 동족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하나님말씀을 심도 있게 가르쳐주고자 평생을 바치고 있다는 점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함(눅10:29a).
3) 그러한 맥락에서 바리새인인 그 랍비는 다음과 같이 이미 답을 정해 놓고서 예수님께 뻔한 질문을 하고 있음;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10:29b).
(3) 바리새인들의 이웃사랑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1) 레위기 제19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음;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 그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음;
2) ①첫째, 이웃사랑이란 동포를 원망하지 아니하며 동시에 원수와 같은 이방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아니하는 것임. ②둘째, 그렇게 풀이를 할 수 있는 근거는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임. ③셋째, 여호와께서는 선민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창조하시고 그들을 모두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임.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임.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제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음;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3-45).
4)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해석하여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그 내용의 문제점을 이미 알고 계심. 그들 유대교지도자들은 선민사상을 강조하고 선민만의 구원사상을 지니고 있음. 따라서 동족인 유대인만을 사랑하고 이웃의 주변국 이방인들을 원수같이 여기고 적대시하고 있다는 것임(마5:43).
5) 그것은 창조주 여호와께서 원하시고 있는 진정한 이웃사랑의 정신이 아닌 것임(마5:44-45). 그와 같은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 예수님의 예화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하겠음(눅10:30-37).
(4) 바리새인들의 율법생활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1) 율법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의 법률체계를 마련하고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법률조문과 비슷하게 다듬어서 백성들에게 자율적으로 지키라고 명령한 것임.
2) 그에 따라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종교생활을 마치 율법이라고 하는 국가의 법을 지키는 것처럼 하고 있음. 법률위반만 하지 아니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율법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임.
3) 그것이 외식적인 신앙생활이며(마23장)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진정한 신앙생활이 전혀 아닌 것임.
4)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있는 그들의 율법적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을 수가 없으며 영생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도 없는 것임.
(5) 사람들이 계명과 율법을 모두 지킬 수가 없는 또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1) 심령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지키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싶어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렇게 실천할 수가 없음. 그 이유는 죄성을 지니고 있는 육신의 영향 때문임(롬7:21-24).
2) 탐욕과 정욕 그리고 이기적인 생각에 젖어 있는 육신은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시험에 참으로 연약한 것임. 따라서 아담부부의 타락 이후 육신을 이기는 영적인 삶은 참으로 귀한 것임.
3) 어떻게 하면 육신을 이기고 영적인 삶이 가능한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음;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4)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부활의 은혜가 아니고써는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율법의 의를 이룰 수가 없으며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임.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육신을 이기고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신 것임(요14:16-20, 행1:8, 롬8:1-4).
9. 선민 유대인에 속하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냥 지나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들의 율법행위의 기준이 무엇인가?(눅10:30-32)
(1)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 신앙생활이 아닌 것임;
1) 율법생활이란 사람들의 눈만 의식하면 되는 것임. 그러므로 한적한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눅10:30) 주변에 지켜보고 있는 눈이 없으므로 그냥 지나치고 있는 것임.
2)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므로 그냥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난할 증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임.
(2)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인의 직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임;
1) 제사장은 성전에서 율법에 따라 제사의 직분만 행하면 되는 것임. 그러므로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다른 백성들이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임. 빨리 성전에 가서 자신의 본분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이라고 제사장이 스스로 변명하고 있다고 하겠음(눅10:31).
2) 레위인은 성전에서 성막을 돌보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자신들의 직무라고 생각하고 있음. 따라서 세속적인 일에는 상관하지를 아니하고 있음. 그에 따라 길가에 쓰러져 있는 백성의 일에 대해서는 관여하거나 개입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임(눅10:32).
10.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생사를 헤매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서 율법의 의로움을 이루고 있는 행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행위인가? 그리고 그것은 선민구원사상인가 아니면 만민구원사상인가?(눅10:33-37)
(1)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실천하고 있는 선행에 대하여;
1)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리고로 가는 도중에 어떤 예루살렘 사람이 강도를 만나 재물과 옷을 모두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있음(눅10:33-35).
2) 구체적으로, 불쌍히 여겨 자신의 기름과 포도주로 응급처치를 하고 인근의 주막으로 데려가서 돌보아주고 떠날 때에는 주인장에게 이틀 치 임금을 주고서 자기 대신에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음. 나중에 돌아와서 비용이 더 들게 되면 자신이 부담해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
3) 한 마디로, 자신의 시간과 재물을 희생하더라도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을 구원해주고자 하는 것임.
(2)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에 대한 평가와 그 랍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1) 첫째, 그 사마리아인의 선행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 율법생활이 아님.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그 생명을 구해주고자 하는 것임. 그 마음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 사랑 곧 공의의 정신을 닮아 있는 것임.
2) 둘째, 역사적으로 선민 유대인과 이방인처럼 되어 버린 사마리아인과는 원수지간이 되고 있음(눅9:53, 요4: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마리아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돌보는데 있어서 그러한 원한관계나 적대관계를 적용하지 아니하고 있음. 그것은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상과 같은 것임.
3) 셋째, 그와 같은 깊고도 넓은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는 예수님의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그 랍비는 모두 깨닫지를 못하고 있음. 그렇지만 자비를 베푼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고 있는 것임(눅10:36).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의 실천이라도 이웃사랑으로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임(눅10:37).
11.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서 섬기는 일을 하는 자와 섬기는 일이 너무 바빠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조차 없는 자의 신앙상의 차이를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례로써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의사 누가가 적고 있는가?(눅10:38-42)
(1) 그 제사장과 레위인의 경우와 그 사마리아인의 경우에 대하여(눅10:30-37);
1) 그 제사장과 레위인은 빨리 예루살렘성전에 가서 율법에 따른 제사를 드리고 성전을 돌보는 일이 바쁘다고 하는 구실로 그 곤란한 자리를 묘하게 회피하고 있다고 하겠음(눅10:30-32).
2) 그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의 선민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한갓 불쌍한 사람이라고 보고서 그 강도 당한 예루살렘사람을 철저하게 구해주고 돌보아 주고 있는 것임(눅10:33-35).
3) 그 두가지 경우를 비교하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랍비의 견해를 묻고 있음. 누가 이웃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냐는 것임. 그 랍비의 대답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눅10:37)라는 것임.
4) 예수님께서는 이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깨달을 수가 있게 되었으니 그대로 돌아가서 실천을 하라고 하심(눅10:37). 그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방법이기 때문임(눅10:25).
(2) 마르다는 누구와 같으며 마리아는 누구와 같은가?(눅10:38-42)
1) 그러므로 예수님께 먼저 물어보고서 그 비유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속뜻을 깨닫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모두가 함께 영생을 얻는 방법이 되는 것임(눅10:25-37).
2) 그와 같은 말씀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의사 누가는 의도적으로 그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하여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이어서 수록하고 있다고 하겠음.
3) 그와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베다니의 마르다는 예수님께 천국복음의 깊은 의미에 대하여 자세히 여쭈어보지 아니하고 그저 예수님 일행을 잘 섬기기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기에 바쁜 것임(눅10:40a). 그러한 경우에는 시행착오가 많이 발생할 것으로 보임.
4) 반면에 그녀의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천국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깊고도 넓은 의미를 파악하기에 바쁜 것임(눅10:39).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말씀사역에 동참하여 귀를 기울여서 그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인 것임. 그 다음에 가서 실천함으로써 그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것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는 올바른 수순이며 영생을 얻는 방법이 되고 있다는 것임.
5)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동생 마리아를 주방으로 보내어 언니를 돕도록 조치해 달라고 하는 마르다에 대하여(눅10:40b) 다음과 같이 답변하시는 것임;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1-42).
(고라신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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