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9강(눅11:27-5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년 11월 9일(목)
1. 성모 마리아보다 더 복이 있는 자는 누구인가?(눅11:27-28)
(1) 한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그 모친 마리아를 찬양한 이유가 무엇인가?(눅11:26-27)
1)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7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눅11:26-27);
2)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 아래로 사람들의 영혼을 끌고 가고자 그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오신 것임(눅11:20). 그러므로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을 보시고 그 귀신을 쫓아내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하고 있음(눅11:14). 그러자 악한 귀신은 다음과 같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음;
3) ①첫째, 선민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를 충동하여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 곧 사탄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는 척 연기를 하고 있다고 거짓말로 비방하고 폄하하는 것임(눅11:15). ②둘째, 귀신이 쫓겨난 사람은 그때부터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되는데 그러하지 못하도록 하여 결국 또다른 귀신 7을 더 데리고 들어가서 영적인 타락이 더욱 심해지게 만드는 것임(눅11:24-26).
4) ③셋째,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그의 모친을 찬양하고 이용함으로써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자 하는 것임(눅11:27). 즉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신앙에서 사람과 우상을 찬양하고 섬기는 우상문화로 타락하게 하는 것임. 이것이 가장 간교한 음모라고 하겠음.
(2)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이며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가?(눅11:28)
1) 예수님께서는 악한 영의 계교를 알고 계심.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2) 예수님을 오로지 사람의 아들로 보고서 그 모친 마리아를 찬양하고 그녀에게 잘 보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움직이려고 하는 책동을 일삼지 말라는 것임. 그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주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서 그대로 행하는 것이 영생의 복을 얻는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임.
3) 그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에 비추어 볼 때, 성모 마리아를 우상화하여 섬기며 마리아에게 부탁하여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겠다고 획책하는 것은(요2:1-5) 잘못된 신앙이며 그 열매를 얻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임.
2. 악한 세대가 어떤 표적을 구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선민들에게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가?(눅11:29-30)
(1) 악한 세대가 예수님께 구하고 있는 표적은 무엇인가?(눅11:29a)
1)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눅11:29a);
2) 예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모르고서 자신들의 욕심에 이끌려서 잘못된 표적을 그리스도에게서 구하고 있다고 지적하심.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베풀고자 하시는 표적은 무엇이며 선민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서 얻고자 하는 표적은 무엇일까요?
3) ①첫째,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임.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자를 모두 구원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것임. ②둘째, 예수님께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시고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고자 하심.
4) 그런데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선민 유대인들은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욕심에 사로잡혀서 다음과 같은 표적을 예수님에게 요구하고 있음; “당신이 메시아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는 표적을 당장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임”(눅11:29절의 의미임).
(2)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눅11:29b-30)
1)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29b-30);
2)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시내 광야에서 선민으로 삼고 있음(출19:4-5). 그 목적은 한 마디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나누어 주고자 여호와의 선지자로 그리고 중보기도자로 평생 살아간 아브라함의 언약을 그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계승하게 하고자 하는 것임(출19:6).
3)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인생을 살아가지를 아니하고 있음. 그들은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미워하며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은 선민들만이 얻을 수가 있으며 주변의 이방인들을 정복하고 복속시켜서 다윗시대처럼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여호와의 역사섭리의 방향성이라고 믿고 있는 것임.
4)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일체 전파하지 아니하고 있음. 그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변방 갈릴리의 선지자인 요나를(왕하14:25) 동쪽 800km에 위치하고 있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파견하심(욘1:1-2). 그 목적은 40일내에 회개하지 아니하면 니느웨 성이 멸망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것임(욘3:1-4).
5) 요나의 전도로 말미암아 니느웨의 왕과 신하들 그리고 12만여명의 백성들이 모두 회개를 하고서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발생한 것임(욘4:3:5-10). 그와 같은 구원의 역사를 이 세상에 전면적으로 발생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는 예수님의 설명이라고 하겠음(눅11:29b-30).
3. 선민 유대인들이 시바여왕이나 니느웨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눅11:31-32)
(1) 시방여왕과 니느웨 백성들의 장점이 무엇인가?(눅11:31b, 32b)
1) “이는 그(시바여왕)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눅11:31b); 시바여왕은 멀리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에서 북행하여 그 먼 이스라엘제국의 수도인 예루살렘까지 솔로몬대왕을 만나려고 왔다는 것임. 그 이유가 세상에서 뛰어난 솔로몬대왕의 지혜의 말씀을 듣고자 한 것임. 결국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갸륵한 것임.
2) “이는 그들(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눅11:32b); 요나 선지자가 전해주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니느웨 성의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왔다는 것임.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들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
(2) 어째서 선민 유대인들은 시방여왕이나 니느웨 백성들보다 못한가?(눅11:31a&c, 32a&c)
1) “심판 때에 남방 (시바)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눅11:31a&c); 솔로몬대왕으로부터 세상적인 지혜를 듣기를 원하여 그 먼 길을 시바여왕이 찾아 왔는데 선민 유대인들은 그 귀한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임.
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눅11:32a&c); 그 옛날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은 한갓 선지자가 전해주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서도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왔는데 선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주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꿈쩍하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망할 장본이라는 것임.
4. 육신의 눈으로 빛을 보듯이 영혼의 눈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으라고 말씀하시는가?(눅11:33-36)
(1) 네 몸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확인하라(눅11:35);
1)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네 믿음이 순전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2) ‘네 눈이 성하면’이라는 말의 뜻은 헬라어의 원뜻이 ‘(네 믿음이) 순전하면’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음(눅11:34). 그 이유는 믿음이 순전하면 온몸이 주님 안에서 평강하고 그것이 주위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임.
3) 여기서 ‘믿음이 순전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순수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어야 한다는 것임(눅11:36).
4)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11:35)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임.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자체 점검하라는 것임.
(2)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는 이유가 무엇인가?(눅11:33)
1)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11:33);
2)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주위를 환하게 밝히도록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말씀의 등불을 켜서 온세상에 비추려고 하시는 것임.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인 것임.
3)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을 막아서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역행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여기서 선민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하겠음.
5. 한 바리새인이 초청한 점심식사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아니하고 식사를 하시면서 진정한 결례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눅11:37-41)
(1) 유대지방에서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식사에 초청한 이유(눅11:27-38);
1) 제10장 말미에 벌써 예루살렘 동쪽 근교마을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적혀 있음(눅10:38-42). 그에 따라 제11장 초입에 등장하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 처소는 감람산으로 보임(눅11:1).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한 바리새인의 집은 베다니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음(눅11:37).
2)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3년6개월 가운데 대부분을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여 복음사역을 하시고 이제 1년도 남지 아니한 시점에 유대지방에서 짧게 복음사역을 하고 계심.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고향이 있는 갈릴리 지방은 분봉 왕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고 있으므로 로마총독이 직접 통치하고 있는 예루살렘 및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과는 달리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크게 배척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임.
3) 예를 들면, 갈릴리 지역에 살고 있는 바리새인이나 회당장이 자기 집에 예수님을 식사초대를 하는 것과 유대지방에 살고 있는 바리새인이 식사초대를 하는 것은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음. 갈릴리 지역에서는 그래도 순수한 호의가 상당하지만 유대지역에서는 호의라기 보다는 어떤 율법적인 잘못을 더 잘 발견하기 위한 일종의 밀착조사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것임.
4) 유대지방에서 한 바리새인이 점심식사에 예수님을 초청하고서 그 식사 예법을 주시하고 있음(눅11:37). 아니나 다를까 중동지역에서는 손으로 음식물을 집기 위하여 사전에 손을 깨끗하게 씻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일체 볼 수가 없는 것임. 그것은 유대교인의 결례의 율법을 아예 무시하고서 이방인들의 더러운 식사습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부정하고도 몰상식한 행위임(눅11:38).
(2) 결례에 대한 바리새인의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눅11:38)
1) “잡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눅11:38); 바리새인들이 중시하고 있는 것은 율법에서 강조하고 있는 결례를 지키는 것임. 그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고 하는 규칙을 만들어서 그것을 일종의 율법상의 세칙으로 백성들에게 준수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임.
2) 그런데 깨끗한 손으로 식사를 한다고 하는 것은 건강상 참으로 좋은 식사 예법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하나님말씀에 대한 지나친 의미의 확대라고 볼 수밖에 없음. 왜냐하면 그 규정의 원천이 다음과 같은 다른 의미의 율법조항이기 때문임;
3) 첫째,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고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입고 있는 것임(출19:14).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부정하게 보이지 아니하게 한다는 것임(출19:14).
4) 둘째,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성소의 뜰에 물두멍을 두고서 부지런히 손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30:19-21).
(3) 결례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무엇인가?(눅11:39-41)
1)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겉에 있는 것을)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11:39-41);
2) 첫째, 바리새인들이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깨끗하게 씻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마치 그것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도 경건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하는 표시로 보게 하는 소위 외식의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고 계시는 것임.
3) 둘째,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영과 육이 하나가 되어 인생을 살아가게 하신(창2:7)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이 세상을 아름답게 경영하라고 하는 것임(창1:26-31).
4) 셋째, 하나님의 종이며 청지기인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영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실천하여야 하는 것임. 그리하면 그 영혼이 구원을 얻으며 예수님의 경우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놀라운 역사가 임하게 되는 것임.
5) 그와 같은 의미에서 썩어질 몸을 영원한 몸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그 영혼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령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음. 그러한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겉에 있는 것을)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11:41)고 여기서 가르쳐 주시는 것임.
6. 율법에 따른 십일조보다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눅11:42)
(1) 십일조 생활에 모범을 보이고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눅11:42b);
1) 오늘날 황금만능주의와 물질주의가 성행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바리새인들의 율법생활은 칭찬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하지가 아니함. 왜냐하면, 곡식과 가축에 대하여 십일조를 바치는데 머무르지 아니하고(레27:30, 32) 각종 허브와 채소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십일조를 바치고 있기 때문임(눅11:42b).
2) 신명기에서 매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비롯하여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까지 말하고 있는데(신12:17, 14:22-23) 그것을 빠짐없이 잘 지키고 있으므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선민 유대인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의인이라고 여기고 있음.
3) 그와 같은 사실을 날카롭게 비유로써 지적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2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꾸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눅11:42a&c)
1)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 그토록 십일조 생활을 잘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라고 비판의 말씀을 시작하심(눅11:42a).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2) 첫째, (곡식과 과일 그리고 가축의 십일조는 물론) 박하와 운향 그리고 모든 채소의 십일조까지 철저하게 바치는데 머물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생활은(눅11:42b)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온전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임.
3) 둘째, 공의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임(눅11:42c).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은 창조주의 눈으로 피조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임. 따라서 모든 피조물을 골고루 돌보고 그 생명을 모두 살리고자 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인 것임.
4) 셋째, 공의에 입각한 창조주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여야 하는 것임. 그것이 선한 청지기의 의무이며 선민 유대인들의 책무인 것임. 하지만 선민들이 그 의무를 일체 행하지 아니하고 있음.
5) 그 이유는 ①첫째,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비롯한 외형적인 율법생활만 잘 하면 의인이 되는 것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기 때문임. ②둘째, 바리새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쳐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선민의 책무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고 있기 때문임(출19:4-6). 그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d)라고 말씀하시는 것임.
7. 바리새인들처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게 되면 어찌되는가?(눅11:43-44)
(1)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에 대하여(눅11:43);
1) 바리새인의 발생은 주전 2세기 하스모니안 왕조의 성립 시기로 봄. 주전 167년경 제사장 맛다디아와 그의 용맹한 5아들이 시리아의 대왕 안티오코스4세의 예루살렘성전 모독 사건에 의분을 느껴서 반(反)시리아 독립전쟁을 시작함.
2) 주전 142년경 혼자 살아남은 둘째 아들 시몬이 대제사장과 왕을 겸하면서 고향이름 하스몬을 본떠 하스모니안 왕가를 시작함.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1세는 전쟁에 능하여 왕조를 튼튼히 하고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하기도 하였음.
3) 그러나 사독의 후손이 아닌 하스모니안 왕가의 왕들이 대제사장을 겸하고 있음에 대하여 반대하는 레위인들이 많이 있었음. 그들 가운데 일부는 히브리정경과 전승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키는데 전념하였음. 그들이 바리새인들임.
4) 바리새인들은 평생을 바쳐서 세가지를 연구하고 사제지간에 대를 물리고 있음. 그것이 읽을 수 있는 히브리정경인 미크라, 귀로만 들을 수 있는 또다른 경전인 미쉬나, 그리고 미크라와 미쉬나를 연구하여 그들이 만든 주석인 미드라쉬임.
5) 보통 십대의 청소년이 유명한 랍비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 생도가 되어 율법교육을 받으면 30세가 되어 선민 유대인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킬 수 있는 또다른 랍비가 됨. 그들 가운데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유명해진 자가 나중에 산헤드린 대 공회에 율법학자로 영입이 되어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을 하고 있음. 예를 들면, 교법사 가말리엘의 경우가 그러함(행5:34). 비록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망한 지 오래 되었지만 산헤드린 대 공회원인 율법학자는 서기관으로 불리고 있음.
6) 바리새인 랍비나 서기관들은 평생을 바쳐서 율법을 연구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치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데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 백성들과 생도들의 한없는 존경심임. 따라서 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크게 기뻐하며 그것을 일생일대의 명예로 여기고 있음. 그런데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계시는 것임(눅11:43);
(2) 평토장한 무덤에 대한 비유(눅11:44);
1)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답변을 아주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음;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9-10).
2)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이 한 일은 성도라고 하면 누구나 해야만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역할이라는 것임. 종은 주인의 뜻을 잘 파악을 해야 올바른 실천을 할 수가 있으므로 선민과 성도들은 하나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전심전력으로 수고를 해야만 한다는 것임.
3) 그러므로 자신이 성경을 공부하고 깨달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백성들에게 그리고 후진들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종의 행동이라고 하는 것임.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큰 종으로서의 위세를 떨치고 있으면 그 나중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치 평토장(平土葬, 시신을 안장할 굴을 미처 마련하지 못한 경우에 임시로 편편한 땅을 30-40cm파고 시신을 보관하는 것으로 갑자기 비가 내리면 흙이 실려가 시신이 일부 노출이 되거나 잘못 순례객들이 밟을 수도 있다고 함. 따라서 구분하기 위하여 땅 위에 회칠을 하기도 함)한 무덤과 같아서 나중에 그곳에 누가 묻혀 있는지 사람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그냥 무관심하게 그 무덤을 밟고 지나갈 따름이라고 말씀하여 주시는 것임(눅11:44). 즉, 역사적으로 퇴락하고 황폐화 되어 버린다고 하는 경고의 말씀인 것임.
8. 한 율법교사의 항의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랍비가 범하기 쉬운 잘못이 무엇이라고 지적하시는가?(눅11:45-46)
(1) 한 율법교사의 항변에 대하여(눅11:45);
1)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눅11:45);
2) 유대지방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점심식사를 함께 하시는데 그 자리에는 다른 랍비들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음. 그 자리에서 설전(舌戰)이 벌어지고 있는 것임(눅11:37-44).
3) 특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 랍비들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종의 직분을 겸손하게 수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백성들로부터 스승의 위치에서 존경과 높은 대접을 받고자 애를 쓰고 있으니 그것은 허무한 명예욕의 발로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심(눅11:43-44).
4) 그 말씀에 대하여 한 똑똑한 랍비가 반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임; “그렇게 명예욕에 사로잡힌 랍비만 있는 것도 아닌데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리들의 면전에 대고서 랍비들을 모조리 싸잡아서 하나같이 허망한 명예만 추구하고 있는 저질이라고 모욕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임”(눅11:45 의역).
(2) 예수님의 답변에 대하여(눅11:46);
1)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눅11:46);
2) 첫째,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이 랍비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죄인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임. 그것은 도저히 다 지킬 수가 없는 율법의 세칙과 생활규칙을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서 모두 준행하도록 강요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임.
3) 둘째, 그러므로 율법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즐거움과 기쁨이 아니라 이제는 고역이며 고생덩어리가 되고 있다는 것임.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더 친근하게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로서의 삶이 개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고 있다는 것임.
4) 셋째, 더 큰 문제는 랍비들이 그렇게 세세한 규정을 가르쳐서 백성들이 오금을 펴지 못하도록 해놓고 정작 자신들도 그 세부규정을 전부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눅11:46).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같은 사람인 랍비들 앞에서 죄인으로 만드는 그러한 무수한 율법의 세칙을 강요하지 말고 오히려 창조주 여호와 앞에 서게 되면 어째서 사람들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고 스스로 회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옳다는 것임.
5) 그리하자면 랍비들부터 먼저 자신도 인간의 육신적인 탐욕과 죄성을 지니고 있는 한갓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하는 신앙고백과 회개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임. 요컨대, 예수님의 말씀은 선민 유대인이거나 랍비이거나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것을 회개하여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임. 따라서 기본적으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그 두려움과 정직함으로 누구나 신앙생활을 영위해야만 한다는 것임.
9.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선지자들을 배척한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하자면 어찌해야만 하는가?(눅11:47-51)
(1) 선지자의 무덤을 꾸미고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있는 바리새인들(눅11:47-48);
1)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이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 도다”(눅11:47-48);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음;
2) 첫째,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민 이스라엘에게 전한 그 옛날 선지자들에게 대하여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 기리고 있으므로 의인들이라는 것임.
3) 둘째, 자신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그 말씀을 외면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지난 백 년 이상 선지자들의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그것으로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키고 있으므로 의인들이라는 것임.
(2) 진심으로 선지자와 사도들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 아니하면 어찌되는가?(눅11:49-51)
1)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눅11:49-51);
2) 첫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로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일과 미래의 일까지 모두 함께 말씀을 하고 계심. 과거에서 현재까지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보내어준 선지자들을 박해하거나 죽였다는 것임. 그리고 미래의 일은 예수님께서 파송하시는 사도들을 선민 유대인들이 또한 배척하거나 죽일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임.
3) 실제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전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달가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배척하거나 그들을 죽인 경우도 있음. 가까운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예레미야 선지자와 말라기 선지자들의 말이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으며 선지자 세례 요한의 경우는 비록 유대인이 아니라 이두매 출신의 왕가라고 하더라도 헤롯 안디바에 의하여 참수를 당하고 있는 것임(마14:10-12). 그리고 사도들의 경우에는 모두가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으며 특히 사도 야고보는 죽임을 당하고 있음(행12:1-2).
4) 둘째,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와 사도들을 탄압하고 죽이게 되면 그 무죄한 피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당시의 세대가 지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후 세대도 결코 그 책임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다고 말씀하심. 그렇다면 그 무죄한 피값의 전가에서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유일한 방법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 뿐인 것임(요1:29, 3:13-16).
5) 셋째, 역사적으로 최초의 무죄한 피에 대해서는 창세기 제4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아벨이 흘린 피를 말하고 있음(창4:8-11). 그런데 성전의 뜰에서 살해가 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사가랴에 대해서는 요아스 왕 시대의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 선지자로 보고 있음.
6) 왜냐하면, 그 이름이 비슷하며 특히 역대하 제24장의 기록이 다음과 같이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대하24:20-22).
10. 하나님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자면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배척하지 말고 어찌해야만 하는가?(눅11:52-54, 롬10:1-4)
(1) 베드로가 얻은 천국 열쇠와 랍비들이 얻고 있는 지식의 열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마16:19, 눅11:52)
1) 시몬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하나님의 은혜로 정확하게 신앙고백을 하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얻을 수가 있음(마16:19a). 그런데 그 열쇠로 천국에서 자신의 처소인 영생의 방문을 열기 위해서는(요14:1-3) 성도들이 다음과 같은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임; “그것은 원수를 용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은혜로 그 원수도 회개를 하고서 함께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어야 한다는 것임(마5:44-48). 그리하면 하늘에서도 그 비밀번호가 풀려서 키가 작동을 하게 되는 것임”(마16:19b 의역).
2) 그에 비해서 랍비들이 얻고 있는 지식의 열쇠는 다른 것임(눅11:52). 그것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고 주석적인 내용을 집대성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임. 그것으로는 영생의 천국의 방문을 열 수가 없는 것임. 왜냐하면, 대속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영적으로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임.
3) 사실 랍비들이 얻고 있는 지식의 열쇠는 실로 인간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것임. 백 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여 스승과 제자로 대를 물려가면서 히브리정경과 구전이 되고 있는 기타 경전들을 함께 비교연구하고 고대어를 해석하여 주석까지 완성하고 있기 때문임. 그것은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 이루어 낸 대단한 업적임에는 틀림이 없음.
4) 그런데 문제는 근본적으로 두가지의 큰 잘못을 지니고 있다는 것임; ①하나는 피조물인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도우심이 없이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지식을 알 수 있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임.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하겠음.
5) ②또 하나는 선민만의 구원과 현세적인 선민의 영광을 추구하는데 여호와의 말씀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임. 그러므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하겠음. 그로 말미암아 만민구원과 천국복음을 부르짖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정죄하여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임.
(2) 하나님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열쇠를 가진 자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지적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을 해야만 하는가?(눅11:52-54)
1)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눅11:52-54);
2) 백 년 이상 자신들이 성취한 성과에 대하여 실로 자부심이 대단한 바리새인들임. 대충 정리를 해보아도 다음과 같음; ①첫째, 히브리정경에 대한 주석적인 연구가 엄청나며 그동안 구전이 되고 있던 기타 경전들을 집대성하고 보완하여 탈무드까지 만들어낸 것임. ②둘째,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일찍이 그 정도의 업적을 성취한 적이 없음.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경전연구의 성과를 가지고 이제는 충분히 대를 이어가면서 율법선생과 율법학자로 백성들 위에 군림할 수가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임. ③셋째, 모든 인간적인 지성과 이성을 사용하고 자신들의 경험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또한 집대성하였으므로 이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의인들이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음.
3) 그런데 변방 갈릴리 출신의 선지자 예수가 자신들을 얕잡아 보고서 막말을 하고 있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임. 따라서 거세게 달려들어서 따지고 있음. 그들의 결론은 기회가 되면 나사렛 예수의 사상의 이단성을 입증하여 반드시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정죄를 하고 말겠다고 하는 것임(눅11:54).
4) 특히 모든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서기관들까지 합세를 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의를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비극적인 모습임(눅11:53).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의 대 스승이며 어른인 그들 서기관들은 그 정도로 깊이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대 학자가 되었으면 이제는 사람의 지성과 이성 그리고 경험과 지혜로써는 도저히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경륜에 이를 수가 없다고 하는 그들 학문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없는 것임. 도리어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말씀의 영적인 능력을 선보이고 있는 예수님을 몰아 부치고 또한 처단하려고 앞장을 서고 있으니 그것이 결정적인 비극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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