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6강(눅9:37-6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7. 21. 21:26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6(9:37-6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 10 19()

 

1.    헤롯 빌립이 다스리고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와 그 주변지역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며 특히 여기서 의사 누가가 귀신들린 아이 이야기를 수집하여 상징적으로 수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9:37-40)

(1)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 일행이 헬몬 산 쪽으로 올라가신 이유;

1)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그동안 주로 갈릴리 서부지역 곧 갈릴리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행정구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 그렇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복음사역의 장소가 동쪽으로, 그 다음에는 북쪽으로 이동이 되고 있음;

2)    첫째, 갈릴리 동쪽으로 이동이 되고 있는 이유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위한 것임.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장소는 수만명의 백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갈릴리 호수 동편 들판임(9:10-17). 그곳은 헤롯 안디바의 이복동생인 헤롯 빌립이 다스리고 있는 구역임(3:1). 그리고 갈릴리의 더 동편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방 헬라인들의 마을이 거라사이며 예수님은 그곳을 방문하여 군대귀신을 쫓아내기도 하셨음(8:26-39).

3)    둘째, 갈릴리 북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는 이유는 조금 한적한 산지를 찾아 나선 것임. 그 목적은 제자들의 훈련을 위한 것으로 보임. 따라서 그곳에서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도 듣고 변화산상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 것임(9:18-36).

4)    셋째, 이제는 예수님께서 헬몬 산 남쪽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복음사역을 하고자 하심. 그곳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치유사역을 하고자 하시는 것임. 왜냐하면, 유대교지도자들은 유대인 중심의 선민사상을 고수하고 있기에 폐쇄적이고 전도에 있어서 국경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계시므로 그 복음사역에 있어서 선민과 이방인이라는 차별이 없으며 또한 국경이 없기 때문임.

(2)  그곳 빌립보 가이사랴 부근의 주민들이 예수님께 몰려들고 있는 이유;

1)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9:37); 예수님 일행이 빌립보 가이사랴 인근에 오셨다는 정보를 듣고서 그곳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모여들고 있음. 그 이유는 두가지임;

2)    첫째, 갈릴리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곳 주민들이 이미 듣고 있기 때문임.  나사렛 출신 선지자인 예수님의 말씀이 놀랍고 그 치유의 능력은 대단하다는 것임. 그러므로 예수님 일행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에 들르게 되면 모두들 가서 그 놀라운 선지자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임.

3)    둘째, 이방인들 역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임.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러모아 예수님의 복음사역 현장에 보내어 주시는 것임(6:37).

4)    특히 이방지역에는 귀신 들린 자들이 많으므로 축사(逐邪)의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절실한 것임. 따라서 모인 무리들 가운데 귀신들린 아들을 치유해 달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가장 큰 것임(9:38-39).

(3)  귀신들린 아이 이야기가 먼저 나타나고 있는 이유;

1)    이방인인 헬라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라사 지역에서 예수님께서는 군대귀신이 들린 자를 낫게 하고자 많은 귀신 떼를 한꺼번에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신 일이 있음(8:30-33).

2)    이제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일 먼저 하신 사역이 엄청나게 힘이 센 귀신을 쫓아낸 것임;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9:38-40),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9:42-43).

3)    그와 같이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특별히 많은 귀신을 만나고 강한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유는 그곳에 귀신들이 많고도 강하기 때문임. 한 마디로, 귀신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이방인들인 것임.

4)    그와 같은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의사 누가가 예수님의 축사의 능력이 이방인 지역에서 더 크게 발생하고 있다고 위와 같이 우선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하겠음.

 

2.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9:41)의 두가지 의미는 무엇인가?(9:40-43a)

(1)  믿음이 없는 제자들과 패역한 이방인들(9:40-41);

1)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9:40-41); 예수님께서 야단을 치신 말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9:41)에는 다음 두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임;

2)    첫째, 예수님께서는 강한 귀신의 힘에 눌려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잊어버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야단을 치시는 것임(9:41a). 세상의 권력과 악한 영들의 세상지배력이 아무리 막강하고 강하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법인데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불신앙이 심히 한심한 것임.

3)    둘째, 이방인들의 특징은 귀신과 더불어 살면서 그 힘을 빌려서 부귀영화와 세상지배를 도모하고 있다는 것임.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패륜이며 반역인 것임.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 대하여 패역한 세대라고 질책하시는 것임(9:41b).

(2)  예수님 안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한 귀신들의 두려움(9:42-43);

1)    첫째,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음. 그 이유는 귀신의 영적인 지배력이 사람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임.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마을에서 사람들이 그 사람의 외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는 것임.

2)    그와 같은 기록이 다음과 같음;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9:39); 그것은 귀신이 자신의 힘으로 그 아이가 발작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벌벌 떨게 하고자 하는 것임. 잠시 떠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님. 만족한 성과를 얻고서 잠잠해지는 것에 불과함.

3)    둘째,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귀신이 꼼짝할 수가 없음. 최대한 발악을 하지만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임. 그 모습에 대한 묘사가 다음과 같음;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9:42-43);

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으므로 귀신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음(9:42). 그러나 예수님의 일갈에 그대로 도망을 치고 마는 것임(9:43).

 

3.    이방인들의 땅 헤롯 빌립의 영지에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제자들에게 두번째로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예언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9:43b-45)

(1)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계승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임;

1)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9:43b-45);

2)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언제까지나 제자들과 함께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재차 예고하시고 계심(9:22, 44). 그 이유는 제자들이 지금까지 스승이신 예수님을 의존하는 신앙자세에서 탈피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임.

3)    언제까지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대신하여 귀신을 쫓아내어줄 수가 없는 것임.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계승해야만 하는 것임. 그때를 생각하면서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를 말라고 권고하시는 것임.  

(2)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게 되면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영적인 능력을 줄 것임을 시사하고 있음;

1)    지금은 제자들이 강력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음. 믿음이 강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받아서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임.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면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실 계획이심(24:49, 14:16-17).

2)    하나님의 영이 제자들의 속사람 속에 임재하시게 되면 성령님의 강력한 내주 역사하심이 있게 될 것임. 그때에는 믿음을 견고하게 하여 귀신을 능히 쫓아낼 수가 있다는 것임. 그러한 사실을 미리 예언해주시는 은근한 말씀이라고 하겠음.

3)    참고로 여기서 제자들이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생각보다 그 귀신이 강력한 영적 지배력을 구사하기 있기 때문임. 벌써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부여해주신 적이 있는데(9:1) 그것이 충분한 능력이 아닌 것으로 보임.

4)    따라서 훗날 사마리아 지역에서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는 더 강력한 축사의 능력을 부여해주시고 계시는 것임(10:13, 17-18).

 

4.    하나님을 그 마음속에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자는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9:46-48)

(1)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발생한 이유가 무엇인가?(9:46, 10:35-45)

1)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9:46),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10:43);

2)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루살렘 행을 앞두고서 스승이며 아주 가까운 친척인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제국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재건하게 되면 높은 자리 둘을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청한 것임(10:35-37). 그와 같은 사실을 의사 누가는 본문과 같이 소위 누가 크냐? 하는 논쟁”(9:46)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고 하겠음.

3)    그러한 내용이 마가복음 제10장에서는 위와 같이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직접 요구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음(10:35-37). 그렇지만 마태복음 제20장을 참조하면, 그들의 어머니이며 세베대의 아내인 살로메가 자신의 친정 조카가 되는 예수님께 부탁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음(20:20-21, 27:56,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15:40, 살로메, 19:25, 이모). 그러한 부탁을 과감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들은 가까운 친척이기도 하지만 평소 세베대 부부가 예수님의 공생애와 복음사역에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것이라고 하겠음.

4)    하지만 그러한 노골적인 요청에 대하여 다른 사도들의 반발이 만만하지가 아니함(9:46, 10:41).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인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를 모두 물리치시고 그 옛날 영광스러운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시는 줄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임. 그러므로 높은 자리를 선점하고자 하는 열망에 모든 사도들이 사로잡혀 있다고 하겠음.

5)    아무리 예수님께서 자신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건설에 대한 예언을 반복하여 이야기를 해주어도(9:22, 44) 사도들의 착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임.

6)    그와 약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근거도 있음. 그 이유는 누가복음 제9장에 기록되어 있는 동일한 내용을 마태복음 제18장과 마가복음 제9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임; “마태복음 제18장에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질문이고 마가복음; 9장에서는 제자들이 가버나움에서 누가 더 크냐고 쟁론하고 있다는 것임”(18:1, 9:33).

7)    그렇지만 논쟁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의 해석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하겠음. 왜냐하면, 그러한 논쟁은 결국 예수님의 12사도 가운데 당장 누가 으뜸이냐? 는 것과 장차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하게 되면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지에 대하여 사도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기 때문임.  

(2)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 곁에 세우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가지의 내용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9:47-48)

1)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임(9:47-48a); 그 의미는 한 마디로, 성도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회적인 약자를 돌보고 그 생명을 살려야만 한다는 것임(25:40).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는 미성년자이므로 부모나 후견인이 반드시 필요함. 자신의 능력으로는 자립적인 삶이 불가능한 것임.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생계수단이 없는 레위인과 이방 나그네 등을 돌보라고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음(10:18-19, 12:12, 19).

2)    예수님의 사마리아인의 비유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강도를 맞고 부상을 입어서 여리고 길가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사람도 이에 해당하는 것임(10:30-37). 그러한 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돌보고 그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 좋은 이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인 것임. 더구나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영생구원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도 이에 해당이 되고 있다고 하겠음.

3)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것임(9:48b);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음. 그 이유는 유대교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선민사상이 예수님의 복음사상과 반대가 되고 있기 때문임.

4)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선민사상과 메시아사상은 선민만의 구원과 현세적인 이스라엘 제국의 건설 및 그 영광을 의미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선민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영생을 누리는 것이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며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에 온 것이라는 선언에 도저히 동의를 할 수가 없는 것임.   

5)    셋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영접하라는 것임(9:48c); 창세기 제15장에서의 아브라함처럼 여호와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서 예언의 성취를 바라보라는 것임;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5-6).

6)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람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결코 갈 수가 없다는 것임(17:3a). 어떠한 예언과 언약의 성취도 바랄 수가 없음.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생의 말씀 안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심을 묵상해보라는 것임(17:3b).

7)    결론적으로, 위의 세가지를 깨닫고 실천하는 자는 피조세계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하더라도 영생하는 하나님나라에서는 가장 큰 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임(9:48d, 7:28).

 

5.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지 아니하고 있는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사의 기적을 선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어째서 가능하며 예수님께서 구태여 그 일을 금지하지 아니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9:49-50)

(1)  육신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아니하고 있으나 영적으로 동행하고 있는 경우에 대하여;

1)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9:49);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의 능력과 축사의 능력을 행하는 자가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 예수님과 더불어 복음사역을 하지 아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임. 그러한 자가 누구이며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3)    ①첫째, 예수님의 숨어 있는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그 시신을 향품으로 처리하여 부자의 굴에 안장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있음(23:50-54, 19:38-42). ②둘째, 거라사 지방에서는 예수님의 축사의 능력으로 자신의 몸에서 군대귀신이 쫓겨난 경험을 가진 청년이 있음. 그는 거라사와 데가볼리 지역 전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음(8:39, 5:20).

4)    그러므로 직접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함께 복음사역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있는 영적인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그러한 여지가 있다고 하겠음.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작용은 구약시대처럼 선지자들을 통하여 신약시대에도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다고 하겠음. 그 좋은 예가 훗날 아볼로와 같은 경우라고 하겠음(18:24-26).

(2)  영적인 동행의 여지를 인정하시는 예수님;

1)    육신을 입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가지 기적을 베풀 수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충분히 인정을 하고 계시는 것임.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심;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9:50).

2)    인간의 육신적인 좁은 생각과 안목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영적인 생명살림의 역사를 함부로 제한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으로 받아 들일 수가 있음.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아니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하고 있다고 하여 그들을 핍박할 필요가 없는 것임. 왜냐하면, 그러한 예외는 인간의 육신적인 생각과 상상력을 초월하여 역사하고 계시는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임.

3)    훗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도 이제는 영적으로 주님이 되셔서 시공간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성하도록 역사하고 계시는 것임.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들만이 예수님을 정확하게 그리스도로 모시고 복음사역을 하고 있다고 하는 이른바 “배타적인 또 다른 선민사상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는 것임.

4)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함.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반대했던 골수 유대교의 랍비였음(8:1, 9:1-2).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영적으로 만난 이후에는 그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음(9:3-22). 영적으로 만난 주님이 그의 인생을 이방인 사도로 인도하신 것임(22:21). 그러므로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 육신적으로 동행했다고 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독점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에서의 사도 요한처럼 인간의 좁은 소견에 불과하다고 하겠음(9:49-50).    

 

6.    예수님께서 굳게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하를 하시는 그때가 언제인가?(9:51, 7:2, 10)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행을 굳게 결심해야만 하는 이유;

1)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벌써 두 차례 예루살렘을 다녀오신 바가 있음; ①한번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갈릴리 지역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청결사건을 일으키심(2:13-17). 그 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유대교의 지도자들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히게 되심(2:18-20).

2)    ②그 다음해 유월절에는 예수님께서 조심스럽게 예루살렘을 방문하심. 그때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복음사역을 하고자 하셨는데(5:1-9) 유대인들의 박해가 심하여 목숨의 위협을 느끼시고 도로 갈릴리로 되돌아 오신 것임(5:18).

3)    그렇게 두번의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것 외에는 줄곧 홈 그라운드인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가나안 북쪽에서만 복음사역을 하신 것임. 그런데 이제는 공생애 3 6개월 가운데 마지막 1년 미만이 남아 있는 시점이므로 남하를 하여 사마리아, 유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임.

4)    그 일은 자신이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고난의 길임. 그러나 만민구원을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유월절 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과 육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그 길을 가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임.  

(2)  그때가 언제인가?

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며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9:51-52); 의사 누가는 단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므로 더 이상 갈릴리에 머물 수가 없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하할 결심을 굳게 하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음. 그러므로 그것이 예수님 공생애 마지막 해인 것 같으나 정확한 시점이 확인이 안되고 있음.

2)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의 기록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음; “그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7:1-3),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7:8-10).

3)    은밀하게 올라가신 그때가 언제일까요? 그해 초막절 중간시점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사도 요한의 기록이 다음과 같음;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7:14); 의사 누가의 복음서 제3장 제1절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은 주후 28년 하반기임. 그후 두차례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으므로 그 때는 주후 29 4월과 주후 304월임. 이제 주후 31년 가을 초막절을 맞이하여 은밀하게 그 기간 중에 예루살렘으로 잠행을 하신 것임.

4)    그런데 의사 누가의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중에 사마리아와 유대 땅에서 복음사역을 대규모로 시행하시기 때문임(9:52, 10:1, 33, 38, 11:37, 12:1). 따라서 사도 요한의 기록보다 좀더 일찍 주후 31년 여름에 남행을 하신 것으로 보임. 그리고 예루살렘에 당도한 것은 그해 겨울로 추정이 됨. 참고로 요한복음 제10장의 기록이 다음과 같기 때문임;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10:22-23).

 

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가시기 위하여 사마리아를 거쳐가는 것을 알게 된 주민들이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까지 금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역사적인 앙금을 반영하고 있는 내용인가?(9:52-53, 4:9, 20-21)

(1)  선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에 대하여;

1)    솔로몬대왕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그 다음해 주전930년에 북쪽의 이스라엘 10지파가 다윗왕조를 버리고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세움. 그 초대왕이 에브라임 지파 출신인 여로보암1세임(왕상12:20).

2)    여로보암1세는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이 명절이 되면 남하를 하여 예루살렘성전으로 순례를 떠나는 것을 안보적인 이유로 막게 됨. 그 대신에 북쪽의 단과 남쪽의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여호와로 알고서 섬기라고 대안을 제시한 것임(왕상12:25-33).

3)    그 정책은 에브라임 지파에서 잇사갈 지파로 왕가가 바뀌어도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 변함이 없음. 따라서 주전 722년에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고 유민이 발생하게 됨(왕하17:6-23).

4)    앗수르는 식민정책과 혼혈정책 그리고 우상의 하나로 여호와를 섬기도록 하는 범신론적인 종교정책으로 철저하게 선민 이스라엘 10지파의 흔적을 없애 버린 것임(왕하17:24-34).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도인 사마리아는 혼혈과 배교의 이스라엘 10지파를 상징하는 수도가 되고 만 것임. 따라서 예루살렘성전을 가지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고서 멸시를 하고 있는 것임.

(2)  앙금이 가시지 아니하고 있는 이유와 그들의 태도;

1)    첫째, 주전 530년경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고자 할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성전을 짓자고 제안을 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함(4:1-4).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여호와를 경배하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하는 것임.

2)    그에 따라 사마리아인들은 소위 축복의 산인 그리심에 자신들의 성전을 건축하게 됨(8:33, 4:20). 그러나 주전 130년대에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가 침략하여 그리심 성전을 붕괴시켜 버림. 그것이 유대인에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원한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음.

3)    그 결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에게 우물물을 좀 달라고 했을 때에 다음과 같은 가시가 돋친 답변을 듣고 있음;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4:9).

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남하하시는 길에 잠시 사마리아의 동네에 들리신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서 그 마을의 주민들이 괘씸하게 생각하여 아예 자신들의 동네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있는 것임(9:52-53). 예수님의 치유사역이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너무 싫어하여 그와 같은 극단적인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것임.

 

8.    성격이 급하고 과격한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건의를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지 아니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9:54-56)

(1)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성급한 판단과 과격한 발언;

1)    야고보와 요한은 비록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사도들임.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군께서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시는 줄 믿고 있는 것임.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 제국에서 높은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께 미리 요청한 적도 있음(9:46, 9:33-34, 10:35-37).

2)    그러므로 감히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며 메시아이신(1:49, 12:13) 예수님의 마을 입장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있는 방자한 사마리아 그 동네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징치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임;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9:54).

3)    그러나 그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단순 무식한 사고방식임. 선민 이방인 상관없이 모두 그 생명을 돌보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임. 감히 그 뜻을 성취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심판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고 언급하고 있으니 전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무식한 발언인 것임.

4)    따라서 예수님의 답변이 다음과 같은 것임;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9:55-56).

(2)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이의 지역감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1)    역사적인 불심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정신과 그 희생만으로 지역감정도 해소가 가능한 것임.

2)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복음의 기본정신이 다음과 같기 때문임;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5:43-45).

3)    성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며 스스로 대속의 삶을 살아갈 때에 비로서 서로 원수진 것들이 풀려나가게 되고 만민구원과 영혼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임(28:18-20). 그와 같은 성도의 삶이 없으면 결코 앙숙지간(怏宿之間, 서로 잡아 먹겠다고 노리는 원수 사이)이 서로 용서가 안되는 것임.

4)    그러한 복음전파와 대속의 삶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 역사하심을 기다려서 비로서 원수를 용서하고 생명을 살리는 복음사역을 실천해야만 하는 것임(24:49, 1:8).

 

9.    자진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9:57-58)

(1)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기특한 사람에 대한 의사 누가의 기록;

1)    길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9:57);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며 끝까지 복음사역의 길을 함께 가겠다고 하는 참으로 좋은 결단을 보여주고 있음.

2)    그러나 문제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선민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다윗의 후계자인 정치적 메시아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만민의 죄를 속죄하는 그리스도로 보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임.

(2)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계시는 예수님의 답변에 대하여;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9:58);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자신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보고서 제자로 따라 나서고자 하는 것임을 밝히 보시고 계심.

2)    지난 3년간 자신과 함께 공생애를 살면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여러 사도들도 예수님 자신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알고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논쟁을 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그 사람의 경우도 대동상이한 것으로 보고 계시는 것임.

3)    만약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스승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광경을 보게 되면 기대가 컸던 만큼 그 실망과 배신감이 대단할 것임.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위와 같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외롭고 도움을 받을 곳이 전혀 없는 비참한 신세를 말함)의 처지라고 하는 뜻을 깊이 생각하여 동행하든지 말든지 하라고 언급하시는 것임.

 

10.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고 있는데 그 사람은 어째서 그 제안을 거절하고 있는가?(9:59-60)

(1)  어째서 또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친히 부르고 계시는가?

1)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9:59a); 앞에서는 자진하여 큰 야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제자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젊은이의 경우를 의사 누가가 소개를 하고 있음. 이제 여기서는 반대로 예수님께서 친히 한 사람에게 자신의 제자로 따라 나서라고 소위 calling out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음.

2)    예수님께서 손수 그 사람에게 제자로 따라 나서라고 제안을 하시는 이유는 그 사람이 장차 복음사역에 필요한 역할을 할 수가 있다고 보시고 계시기 때문임.

3)    주님께서 그 자질을 보고서 제자의 길을 제안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따라 나설 것인가는 당사자에게 달려있는 문제임. 그 점을 다음 구절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임.

(2)  그 사람은 왜 예수님의 제안을 거절하고 있는가?

1)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9:59b-60); 육신의 아버지의 장사를 먼저 치르고나서 예수님의 제자로 합세를 하겠다는 답변임.

2)    매우 인간적인 답변이며 세상사람들의 인륜에 맞는 이야기임(9:59b). 그러나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전혀 동의를 하시지 아니하심. 그 이유는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처리하도록 하고 너는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당장 행하도록 하라는 말씀이시기 때문임(9:60).

(3)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창세기 제11장과 제12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족장 데라와 그의 아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음;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서쪽 가나안 땅으로 선교여행을 떠난 족장 데라가 그만 도중에 북부 시리아에서 좋은 땅을 발견하고서 그곳에 머물고 있음(11:31-32). 그 땅을 개발하면 막대한 부를 얻을 수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임.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데라의 장남인 아브람에게 제안을 하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세상의 부를 추구하고 있는 이른바 그 영혼이 죽어버린 아버지 데라를”(7:4)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그곳 원주민들에게 하나님 선지자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장차 구원의 복을 얻도록 하라는 것임(12:1-3, 20:7). 그에 따라 아브람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남하를 하고 있는 것임(12:4)”.

2)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를 하란 땅에 두고서 떠난 때 그의 나이가 75세이므로 부친 데라의 나이는 145세임(11:26, 12:4). 데라의 향년이 205세이므로(11:32) 아브람이 떠난 지 60년 후에 죽게 되는 것임. 그러므로 아직 향년이 60년이나 남아 있는 데라에 대하여 집사 스데반은 영적인 안목으로 증거하기를 그가 벌써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임(7:4).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토를 달면서 당장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영이 죽은 자와 같다는 의미라고 하겠음.

3)    결국,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은 100년 안팎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일에 매어 달려서 귀한 시간을 허비하지를 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영생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당장 나서라는 것임(9:60).

4)    요컨대,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믿고 온세상에 전하며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면 그것이 100년 정도의 육신적인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영생의 천국을 얻는 성도들의 삶의 비결이 된다고 하는 귀한 가르침인 것임.  

 

11.  먼저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한 다음에 주를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9:61-62)

(1)  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제자로 따라 나서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1)    추수할 일꾼이 참으로 많이 필요한 예수님이심. 따라서 또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서 복음사역에 대하여 배우라고 제안을 하심.

2)    그러나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그 사람이 그럴 마음이 없음. 따라서 말도 되지 아니하는 이유로 거절의 의사를 전하고 있는 것임;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습니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9:61).  

(2)  예수님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는 그 사람의 변명에 대하여;

1)    일견하여 겉으로 보게 되면 그 사람의 거절의 사유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임. 왜냐하면 가장(家長)이 된 자가 처자식의 동의가 없이 그것도 생계의 대책도 마련해두지 아니한 상태에서 선뜻 예수님의 제자로 공생애에 따라 나설 수가 없기 때문임.

2)    그러므로 그 사람은 그러한 타당한 이유를 들어서 완곡하게 당장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설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임. 그렇지만 그러한 차일피일(此日彼日,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무 때나 하면 된다는 식으로 자꾸만 미루는 습성)이 얼마나 위험한 사고방식인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9:62),

3)    비근한 사례가 예수님의 소위 한 부자의 비유(12:16-21). 부자가 큰 풍년을 만나 곡식저장 창고를 증축하여 양식을 엄청나게 많이 저축하여 두고서 이제는 배를 두드려가면서 한번 누려보자고 작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 목숨을 거두어 버리신다면 그 많은 재물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임(12:20).

4)    그러므로 결론은 차일피일 미루지 말고 당장에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서 복음사역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임. 그것이 인생 가운데 시간을 허비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며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함께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