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8강(눅5:1-3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년 8월 24일(목)
1.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어떻게 복음사역을 하시는가?(눅5:1-3)
(1) 게네사렛 마을의 위치와 기능 그리고 게네사렛 호수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눅5:1-2);
1) 갈릴리 호수는 북쪽 호안에 가장 큰 도시인 가버나움이 있으며 기타 도시들이 서쪽 호안에 자리를 잡고 있음. 그리고 서쪽 산지에 많은 성읍들이 위치하고 있음. 그곳을 다스리고 있는 왕이 바로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임(눅3:1).
2) 반면에 호수 동쪽에는 북동 호안 지역에 벳새다가 있을 뿐 기타 동쪽 호안에는 이름난 성읍이 없고 주로 광야로 남아 있음. 그리고 갈릴리 호수와 요단 강 건너 동편에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거라사와 10개의 성읍인 데가볼리 지역이 펼쳐지고 있음. 이 지역과 북쪽의 헬몬 산 남쪽 기슭을 가이샤라 빌립보에 왕도를 두고서 다스리고 있는 분봉 왕이 헤롯 빌립임(눅3:1).
3) 갈릴리의 선주(船主, 배 주인)들과 부자들은 주로 가버나움에 살고 있지만 가난한 어부와 품꾼들은 동쪽 교외지역인 벳새다에 살고 있음. 그렇지만 어로작업을 하고서 잡은 생선을 대량으로 소비지역에 쉽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게네사렛 어시장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눅5:1).
4) 선주(船主)와 어부들이 밤새 잡은 생선을 이른 아침에 도매로 넘긴 후에는 게네사렛의 호숫가에서 주로 어구(漁具, 그물 등 어업용 기구)를 손질하고 배를 보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는 것임(눅5:2, 막1:19). 그러므로 의사 누가는 현지인들처럼 어시장과 접안시설 및 물양장(物揚場)이 있는 게네사렛의 이름으로 그곳의 호수를 부르고 있는 것임(눅5:1). 그 명칭은 어부들에게 매우 친숙한 표현으로 비치고 있음.
(2) 어째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요청하여 그의 배를 타고서 주민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고 계시는가?(눅5:3)
1) 갈릴리 지역에서는 생선을 싸게 살 수 있는 어시장이 게네사렛에 형성이 되어 있음. 그곳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으며 생선을 사고 파는 도매상과 소매상들이 시장을 이루고 있음.
2) 일반 소비자들도 많이 호수가에 운집하고 있으므로 평일에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하시기에 알맞은 곳임.
3) 그렇지만 평평한 호숫가에서 천국복음을 백성들에게 외치기에는 위치상 어려움이 있음. 따라서 평소 안면이 있는 어부인 시몬에게 요청하여 그 배를 타고서 호숫가에서 약간 떨어진 배위에서 호숫가에 운집한 백성들에게 큰 소리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임(눅5:3a, 마13:1-3).
4) 그리고 나서 그 배 안에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인 안드레와 기타 어부들에게 방금 선포하신 천국말씀의 의미를 더 상세하게 풀어서 가르쳐 주시고 있음(눅5:3b).
2. 밤새 갈릴리 호수에서 어로작업을 하였으나 큰 소득이 없었던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호수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눅5:4-7)
(1) 회당 랍비들의 설교와는 다른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위력(눅4:16-27, 5:3-4a);
1) 유대교의 특징은 선민구원사상과 현세축복사상임. 할례를 받고 율법에 따라 성전제사와 절기예배에 빠짐없이 참석을 하기만 하면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며 세상적인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선민 유대인들의 믿음의 특징임.
2) 따라서 안식일 회당예배에서 히브리정경 두루마리를 읽고서 랍비들이 말씀풀이를 하고 있는 내용도 그와 같은 선민사상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을 담고 있음. 그런데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선포는 그 내용이 다른 것임. 만민구원사상과 영생복음에 관한 내용인 것임. 그것이 선민 유대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는 기이한 말씀의 해석임.
3) 그 말씀을 천국복음으로 듣고 있는 무리들 뿐만 아니라 배 안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있는 어부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영적인 권위에 압도를 당하고 있음(눅4:15, 22, 32). 그에 따라 여호와의 영과 창조주의 위엄이 예수님에게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됨. 예컨대, 그것은 가나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도 나다나엘의 경험과 같은 것임(요1:49).
(2)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에 자신의 경험을 내려놓고 순종하고 있는 시몬(눅5:4b-6a);
1) 그와 같은 상황과 분위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느닷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임;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2) 예수님께서는 친구인 시몬의 배를 빌려서 그 위에 서서 호숫가에 운집한 무리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였으며 또한 배 안의 어부들에게 말씀을 풀어서 자세하게 가르쳐 주신 것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한 천국복음을 듣고 있는 그들이 기특한 것임.
3) 그런데 그들의 배를 보니 별로 간밤에 어획고가 형편이 없음. 그러므로 그들의 생계를 위하여 생선이 많이 잡힐 수 있는 지역을 알려 주시고자 한 것임. 하지만 문제는 어로작업에 이골이 난 그들 어부들이 과연 문외한인 자신의 말을 신용할 것인가? 하는 점임.
4) 시몬이 바라보니 예수님이 가리키시는 그 지점은 밤새 자신들이 어로작업을 하던 현장에 가까운 지점임. 그러므로 물고기가 여전히 별로 없을 것으로 짐작이 됨. 그렇지만 한번 눈을 질끈 감고서 믿어 보기로 하고 있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눅5:5-6a).
5)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순종임. 자신의 전문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신적인 말씀의 권위에 한번 의지를 해보겠다고 하는 결단이기 때문임.
(3) 순종의 결과 발생하는 풍어의 기적(눅5:6-7);
1)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6-7).
2) 한 배에만 가득 차게 되는 어획량에 그치고 있지를 않음. 동무의 배까지 오라고 하여 함께 나누어 실어도 두 배에 가득 차고 있는 것임.
3) 만약 혼자서만 풍어의 기쁨을 누리겠다고 이기적으로 행동했으면 시몬의 배는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 않게 되는 불행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임. 그러나 시몬은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고 있음. 풍어의 기쁨 그것도 예수님이 베풀어 주시는 하늘의 기적을 동무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고 있음. 그것이 두 배의 어획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임.
4) 그와 같이 하나님의 축복은 혼자서 누리는 것이 아님. 반드시 함께 고생하고 있는 이웃과 나누어야 하며 그때에 마치 엘리야 시대에 그를 대접한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기적이 다시 발생하게 되는 것임(왕상17:13-16).
3.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있음을 깨닫게 된 시몬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가?(눅5:8-10)
(1) 하나님의 능력을 선보이고 있는 예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음(눅5:8-9);
1)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눅5:8-9);
2) 하나님은 세상의 임금과 다름; 세상임금은 사람의 목숨을 거두고 육신을 죽일 수가 있지만 그 영혼까지 영원히 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 그러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목숨과 육신은 물론 그 영혼까지 영원히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심(마10:28).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시는 두려우신 예수님 앞에 부디 자신을 떠나시고 살려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임.
3) 그와 같은 시몬 베드로의 고백은 그가 창조주 여호와를 진심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하나님 경외자’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임(창22:12).
(2) 죄인을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불러서 제자로 삼으시는 예수님(눅5:10);
1)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시몬 베드로를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동을 하심. 그와 함께 공생애를 지내시겠다고 그를 제자로 부르시는 것임(눅5:10).
2)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복음으로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고마우신 하나님으로 알고서 섬기라는 것임.
3) 그러한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일에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라고 하시는 것임. 그것이 소위 ‘제자로 부르심’(calling out)인 것임.
4.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눅5:10-11)
(1)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인 안드레(눅5:10a, 6:14, 요1:40-42);
1) 의사 누가는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선 사람이 시몬 베드로라고 기록하고 있음(눅5:10-11). 그러나 사도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시몬과 그의 동생인 안드레가 동시에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고 적고 있음(마4:18-20). 사도 마태의 기록은 마가의 복음서의 내용과 동일한 것임(막1:16-18).
2) 그와 같은 공관복음의 내용과는 달리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달리 기록을 하고 있음; “예수님의 제1호 제자가 된 사람이 안드레라는 것임. 그가 요단 강가에서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함께 갈릴리로 가서 형인 시몬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게 했다는 것임”(요1:40-42의역).
3) 어느 견해가 더 정확한 것인지는 몰라도 갈릴리에서 제자로 따라 나선 동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도 요한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임. 어쨌든 시몬의 형제 가운데 누가 먼저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선 것만은 사실이라고 하겠음.
(2) 야고보와 그의 동생인 요한(눅5:10b-11);
1) 의사 누가는 그날 게네사렛 호수에서 시몬이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기적적인 어획을 올릴 때에 다른 배를 타고 있는 동무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인 요한을 불러서 도움을 청했다고 적고 있음(눅5:7). 그에 따라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시몬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선 것으로 기록하고 있음(눅5:10-11).
2)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달리 기술을 하고 있음; “예수님께서 시몬과 그 형제인 안드레를 먼저 제자로 부르시고 진행을 하시다가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시고 그들도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임”(마4:21-22, 막1:16-20 의역).
3) 당사자인 사도 요한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음.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누구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보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요한의 견해는 약간 시간적 차이가 있든지 아니면 동시에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간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임.
4) 그 이유는 두가지로 보임; ①하나는 시몬과 야고보 및 요한 3사람은 항상 예수님을 수행하는 비서 겸 경호원의 역할을 수행했으므로 가장 측근이라고 볼 수 있음(눅9:28, 막14:33). 그러므로 누가 먼저 제자가 되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는 것임. ②또 하나는 세상적으로 먼저 된 자가 주님 안에서는 나중이 되고 또한 세상적으로 나중에 제자가 된 자가 주님 안에서 더 큰 사역을 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세상적인 눈으로 시간과 양적인 것을 계량하기보다는 영적인 눈으로 그 깨달음과 삶의 질을 보라고 하는 것임(창25:23, 마20:16).
(3)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는 말씀은 누구에게 해당이 되는가?
1) 첫째,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시고 있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눅5:10). 그런데 그 말씀을 옆에서 들은 어부들이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 나서고 있는 것임. 그 가운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있음(눅5:10-11).
2) 둘째, 예수님께서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를 보시고 말씀하심;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4:19-20, 막1:17-18).
3)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진리는 하나임; “예수님께서 제자로 따라 나서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자신에게도 주시는 말씀으로 알아 듣고서 함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임”.
5. 고대사회에서 나병은 어떠한 병이며 그 병을 안수하여 낫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은 어떠한 것인가?(눅5:12-14)
(1) 불치의 병인 나병을 낫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능력임(출4:6-7);
1) 일명 ‘문둥병’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나병은 그 옛날에는 불치의 병임. 치료약이 없으므로 그 병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써만 완치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2) 따라서 출애굽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여주실 때에 모세의 손에 나병을 발생시키고 그 다음에는 치유시키고 있는 것임(출4:6-7).
3) 엘리사의 시대에는 그 넓은 시리아의 아람왕국에서 국방장관인 나아만의 나병을 낫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 그래서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와서 고침을 받고 있음(왕하5:14)
(2) 나병환자를 안수하고 말씀으로 낫게 하시는 예수님(눅5:12-13);
1) 히브리정경인 모세오경과 역사서에 기록이 되어 있는 나병을 낫게 하는 여호와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하여 갈릴리의 어느 동네에서 나타나고 있음(눅5:12-13).
2) 나병 들린 사람을 낫게 해주는 절차가 다음과 같이 기술이 되고 있음; ①첫째,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엎드려서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을 먼저하고 있음;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눅5:12). ②둘째, 예수님께서 안수하시고 말씀을 선포하심;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눅5:13a). ③셋째, 나병이 곧 떠나고 있음(눅5:13b).
(3) 여호와의 능력으로 나병의 치유를 받게 된 병자가 취해야 하는 조치(레13-14장, 눅5:14);
1) 나병이 기적적으로 치유가 되는 경우에는 제사장을 찾아가서 예물을 드리고 나병이 치유되었음을 검사를 받고서 공중에게 선포하도록 되어 있음. 그러한 절차를 거처야 공식적으로 다시 동네에 들어가서 살 수가 있는 것임.
2) 그것은 나병이 발생한 경우와 정반대임; 나병이 발병하면 제사장을 찾아가서 검사를 받고 부정한 자로 선포가 되면 격리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임. 그것은 전염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인 것임.
3) 이제 나병이 떠나갔으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이 낫게 된 사람에게 조용히 예물을 가지고 제사장을 찾아가서 소정의 절차를 밟으라고 말씀하심(눅5:14b). 동시에 아무에게도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고 경고하심(눅5:14a).
(4) 예수님께서 나병이 치유된 환자에게 입을 다물라고 경고하신 이유(눅5:14);
1) 그와 같이 입을 다물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육신의 질병과 장애를 고쳐 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의원이 아니시기 때문임. 예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죄와 사망의 질곡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해주기 위하여 오신 구속자 그리스도이신 것임.
2) 그리스도의 사명은 다음과 같음; ①첫째, 죄인을 회개시켜 죄 사함의 은혜를 주고자 하심. ②둘째,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죽고 마는 육신과 목숨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켜서 하나님나라로 데리고 가고자 하시는 것임. ③셋째, 영생의 부활을 얻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한 성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임.
6. 나병을 갈릴리에서 낫게 한 일로 어떠한 일들이 예수님에게 발생하고 있는가?(눅5:15-16)
(1)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게 됨(눅5:15a);
1) 소문을 내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것이 도리어 은밀하게 더 빨리 소문이 퍼지게 되는 요인이 되고 있음(눅5:15a).
2) 불치병에 시달리는 나병환자가 낫게 되었으니 선지자 예수는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선전이 되고 만 것임.
(2) 병고침을 받기 위하여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게 됨(눅5:15b)
1) 수 많은 무리가 각종 질병과 장애를 고침 받고자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서 전국에서 몰려 들게 됨(눅5:15b).
2) 지금까지는 갈릴리 여러 마을에서 자신에게 나아오는 각종 병자와 장애자들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일일이 안수를 하시고 치유하여 주시던 예수님이심(마4:23, 눅4:40). 그러나 전국적으로 수많은 환자와 장애자들이 예수님께 몰려들게 되자(눅5:15b) 이제는 그것이 아님.
3) 예수님께서는 피신을 하시고 계심(눅5:16). 그 이유는 사람들이 100년 안팎을 살게 되는 육신적인 삶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임.
4) 예를 들면, 불치의 질병과 장애를 고침 받은 백성들 가운데 진정으로 그 삶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는가가 문제가 되고 있음. 덤으로 얻게 된 남은 인생을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단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별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임.
7.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 갈릴리 지역의 바리새인은 물론 멀리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도 랍비들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눅5:17, 20-21)
(1) 갈릴리, 유대, 예루살렘 등지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와 서기관의 정체(눅5:17, 21);
1) 주전 2세기 후반에 레위인 제사장 가문인 마카비가 중심이 되어 시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하여 무장투쟁을 한 결과 유대 땅에 하스모니안 왕조가 성립이 됨.
2) 그때 레위인들은 3갈래로 자신들의 진로를 선택하게 됨; ①첫째, 하스모니안 왕조와 협력하여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사두개인들. ②둘째, 히브리정경과 히브리사상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키고 영적인 권위를 얻고자 하는 바리새인들. ③셋째, 속세를 떠나 광야와 오지에서 경건주의와 금욕주의 생활에 힘쓴 엣세네 사람들임.
3) 바리새인들은 뛰어난 율법선생이나 학자들로부터 십년 이상 히브리정경과 사상을 공부하고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가 되고 있음. 그 가운데 크게 이름을 떨친 소수의 랍비들이 산헤드린 대 공회에 들어가서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을 하게 됨. 그들이 교법사들이며 서기관들임.
4) 바리새인들과 랍비들은 국내외에 회당을 짓고 안식일에 회중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음. 그들 회당장들이 지역별로 지방공회를 구성하고 있음. 그러므로 갈릴리 지방공회원들과 예루살렘의 대공회원들 가운데 일부가 갈릴리의 예수님 복음사역의 현장을 조사차 방문하고 있는 것임(눅5:17).
(2) 그들의 관심사항 3가지(눅5:17, 20-21);
1) 첫째 관심은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내용임; 유대교는 선민구원사상과 현세 축복사상에 기초하고 있는데 나사렛 예수는 이방인까지 구원하고 영생구원론을 피력하고 있으므로(눅4:23-27)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것임.
2) 둘째 관심은 예수님이 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임; 나사렛 예수가 백성들의 각종 질병과 장애를 모두 고치고 귀신까지 쫓아내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자 그것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능력을 빌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조사하고자 하는 것임(눅11:14-15).
3) 셋째 관심은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인가 하는 것임; 불치의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그 옛날 선지자 엘리야나 엘리사의 능력을 넘어서고 있음. 그러므로 메시아일 가능성이 큼.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인 로마총독부와 헤롯 왕가를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인 것임(눅20:22).
8.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이미 아시는 예수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중풍병자에게 먼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눅5:18-26)
(1) 사람들이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고 믿음으로 영생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복음사역임;
1) 예수님은 각종 병자와 장애자를 전부 고쳐 주기 위하여 의원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님.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신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시는 것임.
2) 그러므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가 지붕을 통하여 방안으로 들어오자 그에게 갑자기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을 하시고 있음.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희망이 없는 중풍병자를 마지막 수단으로 예수님께 한번 보이겠다고 하는 그들 친지들의 간절한 소망과 믿음을 보았기 때문임(눅5:19-20).
3) 이 세상에서 나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내세에서는 영원히 아프지 아니하는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하는 중풍병자와 그 친지들의 열망을 예수님께서 외면하지 아니하신 것임.
4)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심; ①첫째, 그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하심(눅5:20). ②둘째,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고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임(눅5:24-25).
(2) 죄와 사망의 지배를 벗어나게 하고자 천국복음을 전하고 죄 사함의 선언을 하심;
1)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질병이나 장애가 아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인 것임.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얻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이 됨.
2) 죄 사함의 은혜를 얻은 성도들은 남은 인생 동안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실천함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됨.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사역과 대속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정확하게 보여주시고 있음.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이 영생의 구원을 얻는 방법이 되는 것임.
3) 구체적으로 죄 사함의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성도의 거듭난 삶의 내용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3차례의 예언을 통하여 미리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계심(막8:31, 9:31, 10:33).
4) 어쨌든 그토록 중요한 것이 죄 사함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오해할 줄 아시면서도 그들의 면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가 임했다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임(눅5:20).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지성소에서 선언하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선지자 예수가 함부로 선언하였으므로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정죄를 하고 있음(눅5:21).
5)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에게는 죄 사함의 선언을 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심;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눅5:24). 그 점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서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음;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9.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자 바리새파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어떠한 시비를 걸고 있으며 예수님의 답변은 그 의미가 무엇인가?(눅5:27-32)
(1) 예수님께서 세관원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이유(눅5:27-28);
1) 예수님과 무려 3년 6개월간 공생애를 함께 지내게 되는 남자제자들이 바로 12사도임. 많은 제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과 유대교지도자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첨예화되자 예수님을 떠나고 있음(요6:65-66). 특히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을 수가 없다고 주장을 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떠나기를 시작한 것임(요6:53-63).
2) 그렇지만 끝까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서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한 의리파 남자 제자가 12명임(요6:67-70). 훗날 그들이 ‘개근파’(皆勤派, 전부 출석한 사람들) 12사도로 불리고 있는데(행1:21-22) 그들 가운데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는 두 사람에 불과함. 사도 마태와 사도 요한임.
3) 그런데 마태와 요한은 차이가 있음; 마태는 주후 28년경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 벌써 헬라어를 배웠으며 학문이 있는 사람임. 그러므로 주후 60년대에 복음서를 헬라어로 작성할 수가 있었음. 반면에 요한은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유대 땅이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되자 소아시아 에베소로 피신하여 여생을 지내면서 그곳에서 60대의 늙은이가 80대가 될 때까지 헬라어와 학문을 공부하여 제4복음서와 기타 서신서를 작성하게 된 것임.
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세관원으로 일하고 있는 레위를 불러서 사도 마태로 삼으신 이유가 바로 헬라어를 구사하며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임(눅5:27-28). 당시 세관에서는 관세를 거두어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업무를 관장하고 있으므로 헬라어 시험을 보아서 세관원을 선발했던 것임. 그러므로 세관원들은 상당한 식자층(識字層, 지식과 학문을 가지고 있는 유식한 계층)이었던 것임.
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식자층이 로마를 위해서 일하며 동족들이 살고 있는 유대 땅으로 들어오는 품목에 대하여 관세를 많이 부과함으로써 예루살렘의 물가를 부채질하고 있었으므로 선민 유대인들이 그들을 매국노이며 죄인들이라고 불렀던 것임(눅5:29-30).
(2) ‘레위’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마태’라고 바꾼 이유(눅5:27, 마9:9, 막2:14);
1) 마가복음 제2장과 누가복음 제5장에서는 가버나움의 세관원인 ‘레위’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시고 계심;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막2:14), “그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눅5:27).
2) 그러나 마태복음 제9장에서는 사도 마태가 스스로를 레위가 아니라 마태라고 적고 있음;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9:9).
3) 사도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를 작성하면서 레위인 자신의 이름을 구태여 ‘마태’라고 개명을 하고 있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레위는 동족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세관원 생활을 청산하고 할 수만 있으면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열망을 평소에 지니고 있었던 사람으로 보이는 것임. 그 계기가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자로 불러 주신 것임. 따라서 그는 미련이 없이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바로 따라 나섰던 것임.
4) 그리고 그 출가를 자축(自祝, 스스로 축하함)하기 위하여 동료들과 친척들을 예수님 일행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모두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서 마치 그 옛날 엘리사처럼 기쁘게 스승을 따라 나선 것임(왕상19:21, 눅5:29). 따라서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 주셔서 구원의 길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여겼으며 그 뜻을 담고 있는 이름자 ‘마태’를 자랑스럽게 자신의 새로운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임(마9:9, 눅6:15).
5) 사실 ‘레위’라고 하는 이름도 좋은 것임. 그것은 마태가 본래 레위 지파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가 레위 지파의 유력한 인물인 알패오이기 때문임.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 지파 출신인 자신이 그 이름자를 사용하면서 로마황제를 위하여 관세를 거두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영 마땅하지가 아니했던 것임. 따라서 그는 그 좋은 이름 ‘레위’조차 버리고 새로운 이름 ‘마태’로 새 출발을 한 것임.
(3) 레위 집에서의 식사와 바리새인들의 지적사항(눅5:29-30);
1)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5:29-30).
2) 당시 국내세를 거두고 있는 세무서의 세리는 크게 지탄을 받지 아니하고 있음. 그 이유는 국내세는 전부 현지의 백성들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세수(稅收)이기 때문임. 반면에 관세는 전부 로마황제에게 보내어지는 것이므로 세관원들이 선민 유대인들이 보기에 죄인들이며 매국노인 것임.
3) 그런데 레위가 잔치를 집에서 벌이고 있는데 그곳에 그의 동료인 세관원들이 많이 초청이 되어 있음. 그것을 보고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감시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이때다 하고서 비난을 시작한 것임. 세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예수님 일행이 매국노이며 죄인이라는 악평인 것임.
(4) 예수님의 답변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징(눅5:31-32);
1) 예수님의 답변이 복음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1-32).
2) 예수님의 영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세관원들을 죄인이라고 지탄하며 또한 예수님 일행을 싸잡아서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지도자들도 모두 죄인들인 것임(롬3:9-10). 다만 그들은 스스로 율법생활을 잘하고 있는 의인들이라고 하는 자랑과 자만심에 빠져 있는 것임(눅18:9-14, 롬10:1-3).
3) 따라서 당장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표면적인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구원하고 또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지도 모르고 있는 불쌍한 자칭 의인들과 선민들까지 모두 구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이라고 하겠음.
10.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있어서 금식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금식기도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눅5:33-35)
(1) 복음사역에 있어서 금식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눅5:33-34)
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눅5:34);
2) 금식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말씀임; “금식이란 궁극적으로 구세주 그리스도를 만나서 영생의 천국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임”.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천국잔치와 같은 기쁨을 인생 가운데 맛보고 있는데 어째서 금식 운운하고 있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임.
3) 이 세상에서 금식의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실천하기 위한 것임;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6-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것이 수단이 되고 있는 금식의 기도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겠음.
(2) 금식기도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눅5:34-35, 18:11-12)
1) 첫째,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게 되면 그때에는 부활의 그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서 금식을 해야만 하는 것임(눅5:35)
2) 둘째, 하나님의 일과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지상명령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을 때에는 금식기도를 하고 성령님의 능력을 얻어야만 하는 것임(눅24:49, 행1:8, 2:1-4).
3) 셋째, 바리새인들처럼 공식적인 석상에서 자기자랑을 겸하여 금식기도를 큰 소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눅18:11-12) 예수님처럼 한적한 곳에서 조용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하는 것임(눅22:39-43).
11.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 비유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가?(눅5:36-39)
(1) 새 언약과 첫 언약에 대한 다양한 비유(눅5:36-38, 히8:6-13);
1) 첫째, ‘새 옷과 낡은 옷의 비유’로 나타나고 있음;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눅5:36). 완전한 새 옷으로 갈아 입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임. 구체적으로, 새 옷을 찢어서 그 조각으로 낡은 옷을 수선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 입으라는 것임. 여기서 낡은 옷은 유대인들의 이기적인 선민구원사상만을 담고 있는 유대교리를 말하고 있으며 새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인데 그것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임.
2) 둘째,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비유’로 나타나고 있음;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눅5:37),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5:39). 의미는 위의 ‘새 옷과 낡은 옷의 비유’와 같지만 한가지 차이가 있음. 그것은 사람들이 낡은 옷보다는 새 옷을 좋아하지만 포도주의 경우에는 오래된 묵은 포도주를 더 좋아한다는 것임. 그 말은 전통을 너무 좋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시작을 할 수가 없다는 지적인 것임.
3) 셋째, ‘새 부대와 헌 부대의 비유’로 나타나고 있음; 그러므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하여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되라는 것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헌 부대로 그냥 있게 되면 새 포도주를 넣었을 때에는 터져버리게 된다는 것임(눅5:37). 따라서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눅5:38)는 것임.
(2) 선민 유대인들은 어째서 첫 언약에 집착하고 있는가?(출19:4-6, 눅5:39)
1) 히브리서의 저자는 첫 언약이란 시내 산 언약이라고 말하고 있음(히8:9). 그 내용은 두가지로 되어 있음; ①첫째, 세상에 수많은 족속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것임(출19:4-5). 그 이유는 그 조상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임(출2:24). ②둘째, 하나님 앞에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것임(출19:6).
2) 두번째의 말은 선민 모두가 이방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마치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는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것임(창18:23-32). 그 사명은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곧 세상 모든 족속들에게 여호와의 큰 복이 흘러 나가게 하는 것을 재삼 말하고 있는 것임.
3) 그런데 선민이 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첫째의 내용만을 기억하고 선민들의 사명과 의무조항이 되고 있는 둘째의 말씀을 잊어버린 것임. 그러한 상태로 히브리정경의 모든 하나님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유대교를 운영해오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선민 유대인들의 이기주의와 현세적인 축복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음.
4) 따라서 선민들은 첫 언약을 마치 묵은 포도주처럼 좋아하고 그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임: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5:39).
(3) 첫 언약의 본래의 취지를 깨닫게 되면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가?(눅24:44-49, 행1:8)
1) 시내 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그들에게 특혜를 주는 대신에 제사장나라가 되는 특별한 의무를 자신들의 사명으로 알고서 실천하라고 하는 것임.
2) 그런데 그 의무사항을 버려버리고 선민의 특권만을 주장하고 있으니 그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주신 것임. 그러나 그들은 마이동풍(馬耳東風)임.
3) 따라서 마지막으로 구속자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을 주시는 것임.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로 오실 때에 그 말씀도 듣지를 아니하고 배척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포도밭을 다른 농부들에게 넘겨 버리실 것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임(마21:40-43).
4)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를 올바르게 깨닫게 되면 선민 유대인들이 더 이상 선민만의 구원사상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이방인까지 구원하는 만민구원에 나서게 되는 것임(눅24:44-49, 마28:18-20).
5) 그와 같은 변화가 선민 유대인들에게만 요구되고 있는 것이 아님. 오늘날 자신들도 모르게 민족우월사상을 지니고 있는 모든 민족들에게 해당이 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음. 요컨대, 민족지상주의를 벗어나서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평등하게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구원의 시대에 동참해야만 하는 것임.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는 하나님 자녀의 거듭나 삶인 것임.
(게네사렛 등 갈릴리 호숫가 성읍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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