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5강(눅3:1-3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년 8월 3일(목)
1. 세례 요한이 공생애를 시작한 해에 대한 의사 누가의 기록의 독특성은 무엇인가?(눅3:1-2)
(1) 정치적 지도자들의 통치연대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음(눅3:1);
1) 첫째, 디베료는 로마제국의 제2대 황제이며 주후 14년에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의 서거로 즉위를 하게 됨. 따라서 그의 통치 15년은 주후 28년이 됨(눅3:1a).
2) 둘째,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년에 유대의 총독이 되어 주후 36년까지 통치를 하게 됨(눅3:1b).
3) 셋째, 헤롯 대왕은 주전 4년에(마2:1) 그의 왕국을 3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로마의 황제가 그것을 승인함으로써 세 사람의 분봉 왕이 나타나게 됨. 헤롯 아켈라오는 예루살렘과 유대 땅, 그리고 사마리아와 이두매까지 다스리게 되는데(마2:22) 주후 6년에 폐위가 됨. 헤롯 안디바는 주후 39년까지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게 되고(눅3:19-20) 이복동생인 헤롯 빌립은 주후 34년까지 갈릴리 북쪽의 헬몬 산 주변의 이방지역을 다스리게 됨(눅3:1c).
4) 넷째, 특이하게도 의사 누가는 헬몬 산 너머 아빌레네 지역에는 북부 시리아에서 갈라져 나온 분봉 왕 루사니아가 다스리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음(눅3:1d). 그로 미루어 보아 의사 누가는 로마의 정세는 물론 시리아와 가나안 일대의 정세에 대하여 그 식견이 놀라운 인물임. 따라서 의사 누가는 시리아의 총독부에서 특별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서 예루살렘으로 밀파된 인물로 보이는 것임.
(2) 대제사장들이 누구인가를 적고 있음(눅3:2);
1)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 그리고 사마리아와 이두매 등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 아켈라오가 주후 6년에 폐위를 당하고 그 지역에는 로마의 총독이 다스리도록 결정이 되고 있음.
2) 일단 로마에서 유다의 총독이 부임할 때까지는 현지에서 로마의 군단을 지휘하고 있는 시리아총독부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위임을 하고 있음. 이에 따라 로마에서는 주후 6년 급히 시리아총독을 임지로 보내고 있는데 그가 바로 두번째로 시리아총독이 되고 있는 구레뇨임(눅2:2).
3) 시리아총독 구레뇨는 급한대로 주후 6년에 유대의 유력한 제사장 가문에서 정치력이 뛰어난 안나스를 골라서 대제사장으로 임명함. 안나스는 주후 15년에 현직에서 물러나지만 주후 18년에 대제사장이 된 사위 가야바를 통하여(요18:13) 여전히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눅3:2a). 그러한 관행을 일컬어서 학자들은 한 명의 대제사장이 있는 시대가 아니라 여러 명의 ‘수(首, 우두머리)제사장’이 유대교를 이끌어가고 있는 시대라고 말하기도 함.
4) 가야바는 주후 26년에 유다의 총독으로 부임한 본디오 빌라도와 사이가 좋아서 주후 36년 그가 해임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대제사장의 자리를 보전한 전설적인 인물임(눅3:2b). 그는 그만큼 정세판단에 뛰어나고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세상적인 능력이 탁월했던 자라고 하겠음.
5) 의사 누가는 주후 28년경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6개월 차이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유대교지도자들을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이끌고 있는 대제사장은 가야바이지만 그의 장인인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가 여전히 수제사장으로서 그 권한이 막강했음을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임(눅3:2c).
2.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요한의 물세례가 무엇을 대신하고 있는가?(눅3:3-6)
(1) 요한의 물세례의 첫번째 기능은 속죄의 제사를 대신하는 것임(눅3:3);
1) 율법에 따르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속죄의 제사임(레4:14, 35).
2) 그런데 의사 누가는 그와 같은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적인 관행을 뛰어넘어서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있다” (눅3:3)고 기록하고 있는 것임.
3) 그것은 유대교의 제례의식에 대한 일대 개혁이며 도전인 것임. 그 일을 광야에서 온 엣세네 파에 속하는 선지자로 보이는 세례 요한이 행하고 있는 것임.
4) 세례 요한이 율법의 규정을 뛰어 넘는 회개를 위한 세례의 근거로서 히브리정경 대선지서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사40:3-5, 눅3:4-6).
(2) 요한의 물세례의 두번째 기능은 만민구원의 시대를 준비하는 것임(눅3:4-6);
1) 선지자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을 가지고 세례 요한이 물세례를 백성들에게 베풀고 있는 것임(눅3:3-4).
2) 그 내용은 ①첫째,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이 세상에 구원주로 오시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것임(눅3:4). ②둘째, 율법에 따른 종교적인 관행이나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만민구원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바로 잡아야만 한다는 것임(눅3:5). ③셋째, 그렇게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임(눅3:6).
3) 그와 같은 준비과정의 하나로서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성전에서 드리는 속죄의 제사를 대신하여 요단 강가에서 물세례를 백성들에게 실시하고 있다는 것임.
4) 그것은 분명히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에 따른 제례의식을 벗어나고 있으며 유대교리에 대한 도전이지만 문제는 유대교지도자들이 손쓸 틈도 없이 많은 선민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 앞으로 나아와서 물세례를 받고 있다는 것임(눅3:7-15). 한 마디로, 민심과 시대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임.
3. 예루살렘성전의 속죄의 제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인들이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러 요단 강가로 나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눅3:7-8)
(1) 제사장의 제사보다는 선지자의 말씀을 더 사모하기 때문임(눅3:7-8);
1) 의사 누가는 아셀 지파 출신의 늙은 여인 안나에 대하여 여선지자라고 말하고 있지만(눅2:36) 사실은 그러한 표현은 당시 유대교내에서 공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님. 왜냐하면, 히브리정경에 따르면 마지막 선지자는 주전 400년 이전에 활동했던 말라기이기 때문임(말1:1-8,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예루살렘 총독인 느헤미야 사이의 갈등이 언급이 되고 있음, 느13:6-14, 28-31).
2)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에 따르면 종말로 하나님이 언약의 사자로 예루살렘에 임하시는 시대가 오게 되는데 그 직전에 하나님의 사자로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난다는 것임(말3:1-6, 4:5-6).
3) 그러므로 선지자 말라기의 다음 시대에는 그 옛날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암흑시대에 선지자 엘리야가 나타난 것 같이 새로운 강력한 선지자가 나타나고 그 뒤를 이어 곧바로 하나님께서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가진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나타나신다는 것임.
4) 따라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선지자 말라기의 뒤를 이어서 이 세상에 오는 엘리야와 같은 강력한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또한 그가 백성들에게 소개를 하여 줄 메시아를 앙망하고 있었던 것임. 그와 같은 열망이 있었기에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 나타났을 때에 그가 물세례를 가지고 율법에 따른 성전에서의 속죄의 제사를 파괴하고 있다는 비판보다는 그의 메시지를 경청하고자 했던 것임(눅3:7).
(2) 유대교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듣고자 하는 것임(눅3:8);
1) 선민의 의무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출19:4-6, 마12:39-42) 역사적으로 그러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아니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자인 세례 요한의 질책은 강도 높게 나타나고 있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7-8).
2)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방도시인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을 막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참으로 중보의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음(창18:23-32). 그리고 그가 가는 이방지역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반듯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제단을 쌓고 하나님 경외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음(창20:7, 17-18, 21:22, 32-33, 22:12, 23:6). 그러한 모습을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는 안타까운 지적인 것임(눅3:8).
3) 그와 같이 날카로운 선지자 요한의 질타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반발을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신앙생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음(눅3:10). 따라서 많은 백성들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겸손하게 물세례를 받고 있는 것임(눅3:12).
4. 세례 요한은 물세례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부르짖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눅3:7-8)
(1)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눅3:8a);
1)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눅3:7-8a);
2) 선지자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은 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는 것임.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는 것임.
3) 히브리서 저자의 지적에 따르게 되면, 예루살렘성전에서 율법에 따라 가축의 피로써 드리는 대 속죄일의 대제사장에 의한 속죄의 제사는 그 효과가 미미한 것임. 왜냐하면 백성들의 마음과 양심에 그 피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신의 죄를 일년 동안 용서해주는 표피적인 효과만을 가지고 오기 때문임(히9:9-10, 10:4).
4) 그러므로 선지자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은 백성들은 이제 곧 오시는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신앙 양심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실천을 해야만 한다는 것임. 그것이 속죄의 제사보다 더 중요한 진정한 회개와 삶의 변화인 것임.
(2) 선민구원사상이 아니라 만민구원사상을 가지고 실천하라(눅3:8b);
1)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선민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이제부터라도 당장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임.
2) 그 선례를 의사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세례 요한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찾고 있는 것임;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b).
3) 그와 같은 세례 요한의 시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동일한 것임;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8:11-12),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13:28).
5. 제사와 세례보다 더 중요한 의식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는 무엇인가?(눅3:8-14)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라(눅3:8);
1)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스스로 먼저 생각하고 그 깨달음을 마음속에 새기라는 것임.
2) 그냥 형식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일종의 종교행사에 불과한 속죄의 제사로써는 아무런 생각이나 인식의 변화가 그 머리와 마음속에 발생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임.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데 그것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가라는 것임(눅3:8). 그것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자신의 삶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임(창21:22, 23:6).
4) 또한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선민들의 의무사항인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의미와 통하고 있음(출19:4-6); ①첫째, 거룩한 백성답게 이방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중보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욥42:10). ②둘째,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것임(욥42:8).
(2) 삶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를 추구하라(눅3:9-14);
1)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므로 이제는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가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찍혀 나가 땔감으로 불태워져 버린다는 것임(눅3:9). 그러므로 각 개인이 처한 형편과 그들의 삶터에서 다음과 같은 행동양식의 변화가 당장 요구되고 있다는 것임(눅3:10);
2) 첫째, 모든 백성들은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자들을 사회적으로 보살펴야만 한다는 것임. 예를 들면, 당장 필요한 의식주를 공급해주는 것임;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1).
3) 둘째, 세리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사익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임(눅3:12). 즉, 세법에서 정하고 있는 세율을 지켜 세금을 정확하게 부과하고 징수하라는 것임(눅3:13).
4) 셋째, 만약 누구라도 권력을 남용하여 사익을 추구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에 대한 말씀이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의 회심의 결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임;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8-10).
5) 넷째, 군인의 경우에는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에서 백성들로부터 강탈, 거짓 고발 및 처벌 등을 자행하지 말라는 것임(눅3:14a). 국가에서 주는 급료로 만족할 줄 아는 군인들이 하나님의 병정이 될 수 있다는 것임(눅3:14b, 롬6:12-13).
6) 다섯째,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군인의 올바른 자세에 대한 세례 요한의 지적은 사도 바울의 권면과 상당히 닮아 있는 것임;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6.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눅3:9)
(1) 도끼는 무엇이며 나무뿌리는 무엇인가?(눅3:9a)
1) 첫째, 도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음(눅3:9a).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다음과 같이 구원주이시며 동시에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인자인 예수님)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5:27).
2) 둘째, 나무뿌리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과 그들의 유대교를 말하고 있는 것임. 그들은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말씀을 빨아 들이지만 그것을 왜곡하여 이기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임. 한 마디로, 유대교의 주장은 여호와는 선민만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임. 그러므로 주변의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신위적인 능력으로 진노하시고 재앙을 내리신다는 것임. 그에 따라 선민들의 유대교는 이방인들을 사랑하거나 구원하는 종교가 아니며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지 아니하며 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지 아니하고 있는 것임.
3) 따라서 만민구원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도끼를 가지고 그렇게 잘못된 선민들과 그들의 유대교라고 하는 나무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아예 뿌리까지 찍어 버리시는 것임.
(2) 어떤 나무가 도끼에 찍혀서 땔감이 되고 있는가?(눅3:9b)
1)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3:9b);
2) 첫째, 하나씩 ‘나무마다’ 심판을 받고 있음. 그러므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 성격이 집단적 심판이 아니라 개인별 심판인 것임.
3) 둘째,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면 회심을 하고서 좋은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임. 좋은 열매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옛날부터 한결같이 원하고 계시는 그 열매임.
4) 구체적으로 ①창세기에 따르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이방 땅에서 살아가면서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그 영광을 드러내는 선지자의 삶인 것임(창12:3, 20:7). ②출애굽기에 따르면, 시내 산에서 출범하는 선민의 나라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가 되며 그들에게 구원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임(출19:4-6). ③레위기에 따르게 되면 다음과 같음;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
7.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과의 차이에 대하여(눅3:15-17);
(1) 물세례는 요한이, 성령과 불세례는 그리스도가 베푸신다는 것임(눅3:15-16);
1)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3:15-16);
2) 첫째, 세례 요한은 선지자에 불과하므로 물로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데 그치고 있다는 것임. 그러나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분별의 말씀임.
3) 둘째, 성령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며 불세례는 심판을 말하고 있음. 그것은 모두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에 속하고 있는 것임. 따라서 그리스도는 창조주의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세례 요한이 여기서 말해주고 있는 것임.
4) 셋째, 고대사회에서는 왕의 신발끈을 수행하는 시종이 끌러주고 있음. 선지자 요한은 자신의 신분이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에 비하면 왕의 시종보다도 못한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임.
(2) 그리스도는 심판주이시지만 요한은 그 종에 불과하다는 것임(눅3:15-17);
1) “(그리스도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3:17);
2) 소위 “알곡과 쭉정이의 비유”가 세례 요한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음. 여기서 ‘알곡’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임. 반면에 ‘쭉정이’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이기적으로 현세적인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임.
3) 여기서 “꺼지지 않는 불”은 영벌을 말하고 있음.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구원하며 동시에 거역하는 자를 영벌의 심판에 처하는 심판주이심을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것임.
4) 세례 요한 자신은 그와 같은 구원주이시며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의 종이며 이 세상에 그를 증거하는 선지자에 불과하다는 것임.
8. 세례 요한의 행적과 갈릴리의 감옥에 갇힌 사연은 무엇인가?(눅3:18-20)
(1) 세례 요한의 행적에 대하여(눅3:18);
1) “또 그 밖에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눅3:18); 참으로 간략하게 의사 누가가 한 구절로 세례 요한의 기타 사역에 대하여 압축을 하고 있음.
2) 그러나 요한복음을 참조하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역이 나타나고 있음; ①첫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임(요1:29, 36). ②둘째, 예수님께 물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시작을 백성들에게 알린 것임(요1:31-34). ③셋째, 자신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허락해줌(요1:35-40). ④넷째, 자신은 쇠하여야하지만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함을 분명히 한 것(요3:29-30) 등임
(2) 갈릴리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잘못을 질책하는 세례 요한(눅3:19-20);
1)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눅3:19-20);
2) 선민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메시아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기 위하여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자임. 역시 그와 같은 메시아 사상을 세례 요한이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임.
3) 역사적으로, 헤롯 왕가는 가나안 남부 국경 근처의 이두매 출신의 왕가임. 이두매 인들은 본래 에돔 족속인데 주전 2세기 하스모니안 왕조의 침입으로 전멸의 위기에 봉착하자 유대교로 개종함으로써 그 일부가 살아남은 것임.
4)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외세인 헤롯 왕가를 축출하기 편하도록 그 앞길을 열기 위하여 앞장서서 갈릴리의 분봉 왕인 안디바의 잘못에 대하여 질책하고 나선 것임. 그러나 그것은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임.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 따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실천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지 선민의 현세적인 이익과 영광을 도모해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시기 때문임(눅7:18-22).
9. 세례 요한이 공생애를 시작한지 6개월 후에 나타나서 그에게 물세례를 받으시는 30세의 예수님에 대하여(눅3:21-23);
(1) 율법에 따른 이 땅의 대제사장과(출28:1, 29:1, 29) 하나님의 명령으로 천상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차이에 대하여(히7:15-17);
1) 율법에 따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대제사장과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고 있음(출28:1, 29:1). 여기서의 율법이란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명령인데 그것은 신정국가의 주권자이신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것이므로 그 백성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무조건 준행해야만 하는 것임. 따라서 그것은 마치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의 법률과 같은 것임.
2) 또한 율법에 따라 아론의 대제사장의 직분은 그가 죽게 되면 한 사람의 아들에게 세습이 되고(출29:29, 민20:26) 기타 아들들의 제사장 직분도 그 자손들에게 혈통적으로 세습이 되고 있음. 따라서 사도 요한과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러한 혈통적이고 세습적인 제사장의 신분이 율법에 따라 승계가 되고 있으므로(요1:12-13, 히7:18-19) 그것은 개인적으로 수명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의 것이라고 밝히고 있음(히7:11-12, 23, 28).
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혈통에 따른 대제사장의 직분을 이 세상에서 세습하시지를 아니하심. 그 대신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는 부활 승천하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하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큰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도록 발령을 받고 있다고 설명을 하고 있음(히4:14, 5:8-10, 7:21).
4) 그리고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이 가축을 제물로 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속죄의 제물로 대속의 십자가에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치고 있다는 것임. 그러므로 가축의 피로 드린 속죄의 제사는 그 효력이 일년에 불과하지만 주님이 자신을 스스로 희생한 제물의 제사는 단번에 드린 영원한 효력을 지니고 있는 제사라는 것임(히7:27, 9:12-14). 그 이유는 영원한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는 인자(人子)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제물로 삼아 드린 대속의 제사이기 때문임.
(2) 위와 같은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땅의 대제사장 또는 제사장과 닮은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1) 그것이 바로 율법규정에 따라 아론의 후손들은 30세가 되면 제사장의 직분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임(민4:3, 23, 30,).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도 30에 시작이 되고 있음(눅3:23).
2) 그것은 세례 요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보임. 왜냐하면 ①첫째, 공생애를 먼저 시작하여 요단 강가에서 백성들에게 회개의 물세례를 베풀고 있는 세례 요한을 나사렛 예수께서 방문하여 그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고 공식적으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때문임(눅3:21-22).
3) ②둘째,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시간적으로 6개월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공생애가 6개월 빠른 것으로 보임(눅1:24-26, 36).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에 벌써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계셨다고 이른바 ‘창조주의 선재론(pre-existence)’을 주장하고 있음(요1:15).
(3)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눅3:21-22);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3:15);
2) 여기서의 ‘모든 의’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와 사람들의 ‘정의’(justice)를 모두 말하고 있는 것임.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어떻게 집단 이기적인 인간사회의 정의와 함께 구현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요?
3) 그 어려운 해법의 하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아들인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고 있는 기이한 장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임.
4) 그것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의 전통과 이기적인 생명력인 정의의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야만 한다는 것임. 그러한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이라고 하겠음.
(4)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으시자 나타난 현상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눅3:21-23)
1) 첫째,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심(마3:16, 눅3:22a); 세례 요한으로부터 회개의 물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시자 하나님의 영이 성령으로 그에게 임재하시는 역사가 발생하고 있음. 그것은 앞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주시고 성령님을 임재시켜 주시겠다고 하는 의미라고 하겠음.
2) 둘째,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눅3:22b)고 하는 소리가 나타나고 있음; 먼저 이 세상에 온 선지자 요한이 예수님께 회개의 물세례를 주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이제부터 만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공생애로 시작하겠다고 기도를 드리고 있음. 그 순간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생이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임.
3)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회중 앞에서 회개의 물세례를 받고 이제부터 예수님의 제자로 만민을 구원하는 복음전파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단하고 기도할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듭난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임.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시작인 것임(요1:12-13).
10.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 족보의 특징에 대하여(눅3:23-38);
(1) 마태복음 제1장에 수록된 예수님의 족보와의 비교(마1:1-17, 눅3:23-38);
1) 마태복음에 수록이 되고 있는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이 조상이며 그로부터 아래로 시간적으로 후대로 내려오고 있는 족보임(마1:1-17). 그와 달리 누가복음에 수록이 되고 있는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과 그의 법적인 부친이 되고 있는 목수 요셉으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을 거슬러서 조상으로 올라가서 결국에는 생물학적인 조상인 아담에 이르고 그 다음에는 영적인 조상인 여호와 하나님께 도달하고 있는 기이한 족보임(눅3:23-38).
2) 그와 같은 특징은 두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음; ①첫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임신한 정혼녀 마리아를 정식 아내로 맞아들이고(마1:18-25) 그녀가 낳은 아들을 자신의 장남으로 호적에 입적을 시킨 목수 요셉의 생명을 구하는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눅2:1-7, 21-24) 다윗의 가계가 의인의 족보로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임. 즉,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족보가 되고 있다는 것임.
3) ②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눅3:23 요14:13-14, 16:23-24), 인간의 족보가 창조주 하나님께 이르고 있다는 것임. 그것은 원죄를 범한 아담부부의 죄가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디어 에덴동산에서 다시 하나님과 동거하며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신원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진실로 복된 소식인 것임(창3:15, 눅22:28-30, 계21:7).
(2) 복음의 근원에 대한 의사 누가의 위대한 발견은 무엇인가?(눅3:38)
1) 의사 누가는 복음의 근원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추적하고 있음(눅1:3, 3:23, 38). 그와 같은 의사 누가의 노력이 예수님의 족보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 자료를 수집하여 여기에 등재하고 있는 것임. 그러한 입장에서 그 족보는 또 다른 다음 두가지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것임;
2)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통하여 역사 가운데 구체화가 되고 있으므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을 올릴 수가 있다고 하는 의미가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들어 있는 또 다른 의미라고 하겠음.
3) 둘째, 의사 누가가 수집하여 기술하고 있는 예수님의 족보 특히 목수 요셉의 조상은 그 이름자 가운데 왕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인물이 거의 없음. 예를 들면, 스룹바벨의 조부가 여호야긴 왕인데(왕하24:12) 그가 신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37년 후에 석방이 되고(왕하25:27-30) 본래의 이름 ‘여고냐’를 사용하여 그의 왕가를 후손들에게 넘겨주고 있음(대상3:16-19). 그러므로 스룹바벨(눅3:27)의 조부인 여고냐 그 이상의 조상들은 다윗에 이르기까지 다윗 왕가의 왕들로 채워져 있어야만 하는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 누가가 발견하여 수록하고 있는 목수 요셉의 족보에는 다윗 대왕을 제외하면 한사람도 왕의 이름자가 없는 것임. 심지어 다윗의 아들도 솔로몬이 아니라 ‘나단’(눅3:31)으로 기록이 되고 있음.
4) 참고로, 사도 마태가 수록하고 있는 예수님과 목수 요셉의 족보를 살펴보면 다윗대왕의 아들이 솔로몬이고 다윗 왕조가 끝날 때까지 왕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적혀 있음(마1:6-12). 특히, 스룹바벨의 조부인 여호야긴 왕이 포로가 되어 그의 본명인 ‘여고냐’로 불리고 있는 것까지 정확하게 등재가 되고 있음(마1:11-12).
5) 사도 마태의 기록이 정상적인 족보인데 어째서 의사 누가는 전혀 이해가 어려운 기이한 족보를 구성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고 추정이 됨; “다윗왕조 유대 왕국이 주전 586년에 망한 다음 비록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주전 539년에 끌려간 포로들이 해방이 되고 여호야긴 왕의 손자인 스룹바벨을 대장으로 삼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발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역사 가운데 다시는 재건이 된 적이 없음. 한때 레위인 제사장들이 하스모니안 왕가를 이루기는 했지만 그들이 다윗의 집안에 대하여 호의적인 것이 아님. 그것은 권력의 속성상 당연한 것임. 따라서 다윗의 족보를 잇고 있는 왕손들과 그 후손들은 멀리 떠나 신분을 숨기고 족보를 변형시켜서 겨우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것임”. 그와 같은 현실을 의사 누가의 족보 이야기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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