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제162강(요21:15-1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8월 26일(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시는가? 그리고 베드로의 답변의 내용은 시종(始終,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인가?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의 저택의 뜰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은 스승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했습니다(막14:30, 요13:38, 18:15-18, 25-27). 새벽 닭이 울기 직전에 행한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은 아주 강력한 것입니다(요18:27); 자기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그 절박한 체포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감히 스승이신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그를 모른다고 강력하게 혐의를 부인합니다(막14:71). 그런데 그만 그 슬픈 장면을 예수님이 고개를 돌려서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눅22:61). 그래서 베드로는 그 자리를 떠나서 통곡을 하게 됩니다(막14:72, 눅22:62). 그리고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라고 서투른 맹세를 했던 자신의 미숙함이 마음 속 응어리인 한(恨)이 되어 뼈에 사무치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까지 자신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일을 반성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짓궂게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 질문이 영 이상합니다. 그냥 한국말로 번역이 되어 있으니까 그 정확한 질문의 핵심이 명백하게 드러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 질문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지막 세 번째의 질문에 있어서는 ‘아가페’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는 ‘필로’가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가페의 사랑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네 목숨이나 그 어떤 세상의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엄격하게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또는 다른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그 질문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결코 긍정적인 답변을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자신인데 어떻게 뻔뻔하게 그렇다고 답변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 답변은 “벌써 제가 그러한 위인이 되지를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스승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라는 솔직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내 목숨 다음으로 사랑하는 ‘필로’로)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두 차례 베드로의 답변 속에 담겨 있습니다(요21:15-16). 구체적으로, ‘아가파스 메’(αγαπαs με) 라고 묻고 있는데 베드로는 ‘필로 세’(Φιλω σε)라고 답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목양을 하라고 두 차례나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요21:15-16).
그렇게 솔직하게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을 헤아려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종의 사면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 ‘필로’를 가지고서라도 계속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라는 뜻으로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이스 메, Φιλειs με)”(요21:17)라고 그 질문의 강도를 낮추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편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씩씩하게 자신 있게 답변을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를 목자로 쌍방합의에 의하여 발령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가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실천할 수 있는 자만이 목자로 발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참으로 예수님을 좋아하고 있는 자들이 목자로 사역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목양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필로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격상이 되는 변화가 도래할 것임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언해주고 있습니다(요21:18-19). 그 예언의 말씀은 처음으로 목자의 발령을 받게 되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그 뒤를 따르고 있는 모든 사도와 제자들에게도 적용이 될 것입니다. 미숙한 목자가 신앙이 성숙되고 마침내 예수님처럼 양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선한 목자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요10:10-11). 그 이유는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듯이 목자들의 발령자가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21:17, 엡5:23).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신앙의 성숙과 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목양의 현장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그 일을 돕기 위하여 주님의 요청으로 성령님께서 임재하여 역사를 하시고 있습니다.
목자로 발령을 내시면서 예수님은 그 사랑의 수준의 차이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목자로 베드로를 세우시면서 예수님이 주시고 있는 예언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그 말씀의 뜻을 사도 요한이 성도들을 위하여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9).
사도 요한은 AD 90년경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동료인 사도 베드로가 이미 20여년 전에 목양을 하다가 순교를 한 사실을 그가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에 비추어보고서 요한은 당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확연하게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늙은 사도 요한의 눈에는 지금 베드로가 평소 원했던 길과 그가 원하지 아니했던 길이 함께 보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자를 그가 원하지 아니하고 있는 순교의 현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방법은 베드로의 목양을 받고 있던 사람들과 기타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동원한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베드로는 목양을 하면서도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원숙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요21:18)라는 표현 속에 숨어 있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계속 목양을 하게 되자 예수님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의 고난과 유한한 것들, 특히 자신의 짧은 목숨보다는 주님 안에서 자신을 위하여 이미 예비가 되고 있는 엄청난 상급과 영광, 더구나 영원한 생명을 보게 되는 영적인 눈이 열리고 있습니다. 믿음의 성숙이 그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필로’의 사랑을 내려놓고 온 세상을 향하여 자신의 팔을 벌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용납하고 포용합니다. 필요하다면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바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에 이르도록 진리의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역사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실천할 수 있도록 그의 인생길을 계속 인도했습니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면, 성도들과 세상사람들의 요구 때문에 그렇게 베드로가 자신의 인생길을 살아간 것만 같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의 인생길도 그렇게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와 같이 헛맹세를 했던 다른 사도들도 똑 같은 인생길을 걸어갔습니다. 회고를 해보면, 당시의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그 예언을 듣고 있는 자리에서 다른 사도들도 분명히 이구동성으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함께 맹세를 했습니다(막14:31). 그렇지만 그들도 스승을 끝까지 따르지 아니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요21:2, 막14:50, 마26:56). 자신뿐만 아니라 사도들 모두의 의지가 그 한계를 보인 것입니다. 명줄을 보전하고자 하는 본능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한계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주님의 도우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숙한 신앙인이지만 그 모습 그대로 목자로 발령을 받았으므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요21:19). 그 명령은 모든 사도와 제자들에게 주고 있는 명령입니다. 성도들에게 똑같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명령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자 진심으로 결단을 한다면, 마침내 신앙의 성숙을 얻고 선한 목자로 평생을 살 수 있도록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갔던 다른 사도들의 모습이 모두 늙은 사도 요한의 눈 앞에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복음서를 마무리하고 있는 마지막 장에서 사도 요한의 눈은 한 없는 그리움으로 믿음의 동료들의 모습과 자신에게 팔을 벌리고 있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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