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60강(요20:24-3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20. 19:42

요한복음 강해 제160(20:24-3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24()

 

도마의 의심과 그가 과학적으로 확신을 얻는 방법(20:24-25)

 

여든 살의 노인 사도 요한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도마를 여전히 디두모라고 별명 비슷하게 도마의 헬라식 이름을 함께 부르고 있습니다(20:24). 유대식 이름 도마의 뜻이 쌍둥이인데 그것을 놀리느라고 구태여 헬라어로 번역하여 쌍둥이임을 거듭 강조하면서 놀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만이 그의 복음서에서 도마를 짓궂게 놀리고 있는 것을 보면 도마는 요한의 동무로 보입니다. 사도 요한은 갈릴리 고향사람을 손꼽을 때, 베드로 다음으로 도마를 열거하고 있습니다(21:2). 그 만큼 요한은 도마와 친한 벗입니다. 일찍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나이가 들면 도로 어린아이가 된다고 합니다. 이국 땅 소아시아 서쪽 해안도시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요한은 개인적으로 한 없이 외로웠을 것입니다. 자신을 기억하는 동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거나 멀리 흩어져버렸습니다. 이방 땅에서 맞이하는 디아스포라의 늘그막은 그렇게 쓸쓸한 법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이 없으면 인생길 마지막을 어떻게 지낼 수 있을지 모를 지경입니다. 도마가 자기보다 약간 연상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그저 어릴 때와 젊은 시절의 정다운 동무일 뿐입니다. 그러한 인간적인 정겨움과 그리움이 그 별명 가운데 진하게 스며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요한은 도마의 진기록 하나를 여기에서 또 소개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숨어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뜨이게 되면 스승님처럼 체포를 당하고 처형을 당할까 그것이 두려워서 문을 모조리 잠그고 꼭꼭 숨어서 지내고 있는 제자들을 귀신처럼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치 연기와 같이 벽을 통과하여 방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20:19).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도마가 의심을 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0:25).

사도 요한의 기억 가운데 도마는 영리한 친구로 남아 있습니다. 굉장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4)고 말씀을 하셨을 때에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5)라고 당차게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이 모르면서도 아는 척 처신을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마는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정확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정직한 친구입니다. 그리고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머리로 따져보고 감각으로 확인을 하는 절차를 거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도마의 의심을 마치 알고나 있는 듯이 예수님이 두 번째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20:26). 그리고 도마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20:27). 보는 것만 믿고 있는 도마에게 과학보다 더 정확한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활로써 보이는 세상에 생명력을 공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세계와 그 능력을 증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을 뛰어넘는 영적인 확신을 얻는 방법(20:26-29)

 

영적인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시공간에 갇혀 있으면 그것은 물질입니다. 사람은 겉으로 보면, 시공간에 갇혀있는 물질적인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것과 혼적인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 , 의가 모두 혼적인 요소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특히 지성에 크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성은 지식을 과학적으로 얻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필요한 판단과 추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성과 비교할 때, 영적인 영성은 전혀 다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초월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영성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실체와 교감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에 에너지와 생명력을 공급하고 있는 분이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4:24).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무덤에서 부활시켰습니다. 이제 주님은 도마에게 그 세계에 대하여 눈으로 보여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쉽게 과학을 뛰어넘는 영적인 확신을 도마에게 줄 수가 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영적인 것은 시공간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서 예수님이 이미 자신이 나타나기 전에 도마가 의심하면서 어떤 말을 했는지를 모두 읽고 있습니다(20:25, 27). 도마는 예수님이 시공간을 뛰어 넘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음을 두려움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과학적인 이치를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창조주의 능력을 개방하고 있기에 감히 못 자국을 만지고 확인할 엄두조차 나지가 않습니다. 그 앞에 서면, 단지 죽느냐, 사느냐고 하는 생사의 갈림길 만이 보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을 하고 맙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생전의 스승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과학을 뛰어넘는 믿음, 곧 영적인 확신을 가지게 해주는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내심까지 읽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통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지름길이 되고 있습니다. 도마와의 대화가 그 점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과 사도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심으로 일단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의 기록을 마무리하고 있는데(20:29-31) 그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람의 생각과 그 과거 및 미래까지 모두 통찰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그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가나에서 나다나엘을 만나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친구 빌립이 자신을 찾아오자 나다나엘이 그를 만나고자 동네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동네 바깥에 계시는 예수님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치 자신의 눈으로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직접 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1:48).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둘째, 안드레의 형 시몬을 만났을 때 그가 장차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라는 뜻으로 게바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있습니다(1:42). 그 예언 그대로 베드로는 훗날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16).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자 유대인들 앞에서 엄청난 하나님의 큰일을 설교합니다(2:14-42). 그 때부터 초대교회가 시작이 됩니다. 이름자의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적인 통찰력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도마의 고백을 듣고서 예수님은 믿음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어차피 생명의 원천이시며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를 피조물의 미약한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분 앞에 서게 되면 한갓 미물이며 죄인인 자신의 존재를 절감할 따름입니다(18:27, 5:8).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시는 창조주께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살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고맙고 기쁠 따름입니다. 그 부활의 생명력을 믿고 자신의 남은 삶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순수한 믿음입니다. 그 앞에서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인간이 이 땅의 물질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것저것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저술의 목적을 제20장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31).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할 말을 거의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친히 제자들의 남은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도로 파송하고 동시에 목자로 발령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세상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인사발령이 제4복음서 마지막 장인 제21장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