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57강(요20:1-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18. 02:41

요한복음 강해 제157(20:1-1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2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골고다 언덕에 있는 어느 동산의 굴 속에서 발생한 일은 무엇인가?(19:41- 20:10)

 

아리마대 요셉이 골고다 언덕의 어느 동산에 새 굴을 하나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바위를 파서 만든 인공 굴이므로 굉장히 비싼 묘실입니다(23:53). 그곳에 세마포에 싸인 예수님의 시신이 편안하게 안장이 되었습니다(19:41-42). 그 날이 바로 토요일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금요일 오후 늦은 시간입니다(23:54).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운구하여 바위 굴 속에 안치를 하고 나자 저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동산을 내려가야만 합니다. 안식일 저녁이 시작되면 아무 일도 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날 화장실 정도를 다녀오는 것은 허용이 되지만 바깥을 돌아 다니는 것은 율법의 위반입니다(5:9-10). 그래서 급히 큰 돌을 굴려서 무덤의 문을 막아 두고서 모두들 하산을 했습니다(15:46-47). 그 일행 중에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 그리고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토요일 안식일에는 집 바깥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특히 유월절이 시작이 되었기에 예루살렘에는 보는 눈들이 많아졌으므로 율법의 위반은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인 것입니다. 드디어 새 날이 되자마자 여자분들이 먼저 무덤으로 갑니다(16:1-3). 안식일이 끝나고 그 다음날 동이 터오고 있는 새벽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그냥 의미가 없이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닙니다. 인간과 함께 안식을 하신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무덤 굴 가까이 가장 먼저 도착을 한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함께 온 여인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등보다는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젊었기 때문일 것입니다(16:1-2). 그녀의 걱정은 너무 큰 바위가 굴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가 없는 큰 돌입니다(16:3). 그 바위는 혹시 큰 짐승이 굴에 들어와서 시신을 훼손할지 모르기 때문에 입구를 봉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막달라 마리아가 굴 언저리에 도착해서 보니까 이상합니다. 굴의 문을 막고 있던 바위가 한쪽으로 옮겨져 있는 것입니다(20:1). 누군가 안식일이 아직 계속되고 있는 밤시간에 굴 속으로 침입을 한 것만 같습니다. 혹시 예수님의 시신에 손을 댄 것이 아닐까요? 그녀는 재빨리 굴 속을 확인했습니다. 시신이 보이지를 않습니다(24:3). 큰일이 발생을 한 것입니다. 그녀는 급히 길을 되짚어 가서 남자 사도들 곧 베드로와 요한에게 급보를 알렸습니다(20:2). 위의 경과는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제4복음서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상당히 경과설명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28:2-10). 세리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장소가 갈릴리라고 적고 있습니다(28:16-20). 그 점은 마가의 기록과 동일합니다(16:7). 그렇지만 마가는 예수님이 사도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시기 전에 시골로 가고 있던 두 명의 남자 제자를 먼저 만났다고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6:12-13). 그 대목을 마태는 생략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의사 누가는 마가의 그 기록을 정밀하게 추적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마치 르뽀기자처럼 직접 발로 뛰면서 현장취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글로바이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흥미진진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24:13-35). 뿐만 아니라 의사 누가는 예수님이 사도들 가운데 시몬을 예루살렘에서 먼저 만났다는 사실까지 수록하고 있습니다(24:34). 반면에 누가복음에는 갈릴리에서 사도들을 만나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없습니다. 다만 일찍이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신 예언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4:6). 그 예언의 내용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다음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부활할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9:16-22).

막달라 마리아의 급보를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은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려고 하자 하늘이 어두워지는 이적이 발생을 했습니다(23:44).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가운데 예수님이 완전히 숨을 거둡니다(23:45-46). 그러자 더 이상한 현상이 발생을 합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완전히 둘로 갈라졌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지진이 발생을 하고 무덤이 열리며 사람들이 부활을 하여 길거리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27:50-53). 특히 골고다 지역에서 발생한 그와 같은 기적을 보고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긴장을 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이 없다고 로마병정들이 수군거리고 있습니다(27:54). 십자가 처형을 바라본 유대인들이 그 소식을 예루살렘 성내에 전하고 있습니다. 민심이 동요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감추고서 스승이 무덤에서 부활을 했다고 헛소문이라도 퍼뜨리는 날에는 겉잡을 수 없는 소요가 발생을 할 것만 같습니다. 더구나 산헤드린 공회 내에서도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극약처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비록 소수파이기는 하지만 바리새인 가운데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처음부터 나사렛 예수의 사형판결에 반대를 한 것입니다(23:50-51). 그들은 감히 로마총독을 찾아가서 겁도 없이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하여 정성스럽게 장례를 지낸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의 다수파들은 긴장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방차원에서 빌라도에게 강력하게 요청을 했습니다; “굴 입구에 로마병정을 배치하여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도둑질하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27:62-64). 그러나 빌라도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에서 경비병을 보내어 무덤을 지키도록 하십시오”(27:65). 그러므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의 무덤 굴의 경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27:66).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그들이 고의로 시신을 처리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생각에는 그들이 아예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굴 속에서 꺼내어서 깡그리 재로 만들어버렸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걱정에 휩싸인 채 그들이 장례를 치른 굴로 급히 뛰어가고 있습니다(20:3-4).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어서 그런지 굴 입구에 먼저 도착을 했습니다(20:4). 그렇지만 그는 베드로보다 겁이 많습니다. 그래서 굴 속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베드로입니다(20:6). 그들이 무덤 굴 속에서 확인한 것은 시신을 싸매었던 세마포가 벗겨진 채 놓여있고 머리에 씌웠던 두건이 딴 곳에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20:6-7).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일찍이 세 차례나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8:31, 9:31, 10:34). 그렇지만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20:9). 다만 누군가 시신을 수의를 벗겨놓고 훔쳐갔다는 생각만이 들 뿐입니다. 어디에 가서 사라져버린 스승의 시신을 찾는다는 말입니까? 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두 제자는 마음이 답답한 채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20:10).

 

부활하신 예수님을 막달라 마리아가 왜 못 알아보고 있는가?(20:11-14)

 

두 사도는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굴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20:11).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준(8:2)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없는데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서 마음 편히 쉴 수가 있겠습니까? 그녀는 텅 빈 굴 속을 자꾸만 들여다 보았습니다. 바로 그 때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해 놓았던 곳 머리와 발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20:12). 어리둥절하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들이 질문을 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20:13a). 마리아는 곧이곧대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20:13b). 걱정하고 염려하며 불안해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뒤쪽에 조용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서계십니다(20:14a).

그러나 마리아는 그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20:14b). 세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전의 예수님과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용모가 달라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전의 몸은 영적인 삶이 아니라 육적인 삶에 더 익숙해져 있는 유한한 육체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영적인 삶에 충실하도록 새로이 창조된 영생의 몸입니다. 유한한 것과 영원한 것이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썩어질 생전의 육신과 영생하는 부활의 육신이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상식적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아무리 생전의 예수님과 친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언을 듣고서 사전에 자신의 향유를 부어서 장례까지 미리 지내준 바가 있지만(14:3-9) 부활에 대해서는 여전히 믿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선지자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랍비에게서 전혀 들어본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여 자신의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보고서도 믿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20:14). 셋째, 불안과 걱정 근심, 더구나 죽음의 기운 가운데 지배를 당하고 있는 마리아의 눈에 부활의 주님이 보이고 평안을 회복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당장 슬픔이 기쁨으로, 죽음이 부활로, 절망이 산 소망으로 바뀌어질 수는 없습니다. 예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확실하게 인식하고 영접하는데 시간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성품과 음성은 그대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