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56강(요19:38-4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16. 23:33

요한복음 강해 제156(19:38-4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20()

 

숨은 제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등장과 예수님의 장례(19:31-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19:38a). 그러했던 요셉이 갑자기 두려움을 극복하고서 로마총독을 찾아가서 엄청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19:38bc). 숨어서 지내고 있던 제자가 갑자기 역사의 한 복판에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가 생긴 이유를 사도 요한은 이 일 후에”(19:38)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다음과 같이 간추려볼 수 있는 긴 내용입니다; 첫째, 대제사장 출신인 안나스가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개인적으로 로마의 군대를 동원하고 자신의 하인들을 보내어서 한밤중에 나사렛 예수를 연행하여 왔습니다. 둘째, 천부장과 로마의 병정들이 무력으로 예수를 체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한 마디에 모두가 쓰러져버리는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스로 체포를 당하고 불법연행에 응하신 것입니다. 셋째, 안나스의 불법구금과 심문이 자행이 되었습니다. 넷째, 그날 새벽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긴급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으며 날치기로 예수에 대한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다섯째, 로마총독에게 급히 끌고 와서 사형을 집행해주기를 청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죄목이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모독죄에서 로마황제에 대한 신성모독죄로 바뀌고 있습니다.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로마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유대 땅에서 반란세력을 규합하고 다녔다는 주장입니다. 여섯째, 나사렛 예수의 무죄를 거듭 밝히고 있는 로마총독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만약 반란선동자인 예수를 무죄로 석방한다면 빌라도 역시 로마황제에 대하여 역심을 품고 있는 자라고 정치적으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일곱째, 마침내 빌라도가 유대교지도자들과 그들이 동원한 유대인들의 끈질긴 요구에 굴복을 하게 되고 나사렛 예수를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19:15-16).

여덟째, 보통 사람은 사나흘이 걸리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단 하루로 끝나게 됩니다. 예수님 좌우의 사형수들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빠른 죽음이 가능하도록 엄청난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 다리의 통뼈를 부수어버립니다. 체중을 이기지 못하게 되자 사형수들은 가슴과 온몸이 내려앉고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어 즉사를 하게 됩니다. 그래도 혹시 살아 있을지를 몰라서 아예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피와 물을 모두 빼내어버립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이미 사망을 하였으므로 다리뼈를 분지르지 아니하고 창으로 확인사살만 하게 됩니다. 시체가 온전하게 보전이 되고 있습니다.

 아홉 번째로, 예수님이 숨을 거두자 지진이 발생하고 무덤들이 열립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서 걸어 다닙니다(27:50-53). 로마의 백부장과 병사들이 나사렛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됩니다(27:54). 열 번째로,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대 출신 요셉은 히브리 정경의 예언에 비추어 무슨 일이 발생을 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예언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이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1:29). 안식일 전날에 저주의 나무에서 처형을 당하고 당일에 나무에서 내림을 받게 됩니다(21:23). 유월절 어린양이므로 그 대속의 제물을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34:20). 그 다리뼈를 부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 보전해주십니다(12:46, 9:12).  끝으로, 창에 찔림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그 찌른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53:5, 2:34-36). 회개를 하는 자는 살아날 것입니다(2:37-41)”.

그러한 모든 일들이 예루살렘과 골고다 언덕에서 하루 밤 이틀 동안에 숨가쁘게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사실들은 한 가지 진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며 이제 그의 죽음으로 그를 찌른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땅의 임금들이 쫓겨나는 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12:31). 유대교의 교권을 지키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자들은 강력하게 회개를 하지 아니하는 이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하지 못할 입장이 되고만 것입니다”(7:51-60). 구약에 밝은 아리마대 요셉은 그 모든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와 자신의 친구인 니고데모가 모두 산헤드린 공회원이므로 지난 밤부터 함께 행동을 했으며 이제 십자가 아래에서 발생하고 있는 그 모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성취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습니다(19:38-39).

먼저 깨달음을 얻은 요셉이 니고데모에게 그의 감격을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산헤드린 공회에 숨어 있던 예수님의 두 제자 가운데 요셉이 니고데모보다 먼저 행동을 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19:38). 비록 그 기록은 간단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하는 자는 예수의 제자임이 들통이 나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바리새인이며 장로의 한 사람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사실은 나사렛 예수의 숨은 제자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유대교지도자와 유대인들로부터 어떠한 위해가 자신에게 가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그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유대교인들을 두려워하여 눈치를 보거나 숨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머뭇거릴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임이 확실하게 드러난 이상 이제부터 마지막 종말의 때가 카운팅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덤이 열리는 그 순간부터 종말의 시간이 이미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27:51-53). 이제는 예수님의 편에 서서 구원과 영생을 얻느냐? 아니면 그를 처형한 자의 편에 서서 세상의 권력에 굴복하면서 그 눈치를 보다가 함께 멸망을 당하느냐의 선택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와 같은 갈림길에 서있는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는 자가 바로 아리마대 출신인 산헤드린 공회원 요셉입니다(19:38).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첫 번째의 제자가 요셉입니다. 그 이름을 공관복음에서 이미 기록하고 있습니다(27:57-60, 15:43-46, 23:50-54). 그렇게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의 다음과 같은 예언 때문입니다; “그의 무덤에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53:9). 십자가 처형장이 있는 장소가 골고다 언덕입니다. 해골골짜기로 불리는 그곳에는 공동묘지가 있으며 사형수들의 시신이 묻혀 있습니다. 바로 그 곳 동산에 신기하게도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굴이 있습니다. 그 굴에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이 되고 있습니다(19:41). 한 치 오차도 없이 메시아의 최후 안장장소에 대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700년 세월이 먼지와 같이 흩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취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언상의 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숨은 제자인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부자도 하나님의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례가 등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건의 중대성을 사도 요한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60년 세월 동안 아리마대 요셉의 이름을 기억했다가 여기 그의 복음서에 재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아리마대 요셉은 생명의 책 복음서에 그 이름이 모두 기록이 되는 소위 사관왕’(四冠王, 면류관을 네 번이나 쓰는 왕 또는 금메달을 네 개나 차지하는 영웅)의 영예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친구 니고데모도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확신은 친구 니고데모에게도 동일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9:39). 니고데모도 엄청나게 담대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 사람의 깨달음과 합심으로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9:40-42). 미구에 예수님의 무덤 속 부활과 성령의 강림이 있게 되면 새 시대 초대교회의 역사가 그들과 함께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을 시작으로 하여 장차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무리까지 초대교회에 합세를 하게 될 것입니다(6:7). 그 가능성을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타나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하기 위하여 긴급히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 가지고 왔습니다(19:39). 사도 요한이 그 무게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3리트라가 약 1kg이므로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방부제 약품의 양이 엄청나다는 점을 말해주고자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인 자신의 굴을 내놓았지만 니고데모도 그것에 못지 아니하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장례는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제자와 성도들이 죄 사함과 나음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예수님의 장례에 참여함으로써 죽음을 통과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자신이 죽고 사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기에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바쳐서 예수님의 장례를 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베다니의 마리아와 막달라의 마리아가 자신들의 값비싼 향유를 부어서 사전에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하듯이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지내야만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바로 죄인인 자신이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살아나는 거듭난 자의 몸이 될 것입니다. 중생(重生, 거듭 남, born again)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바쳐서 이 땅에서 얻어야만 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영적인 삶입니다. 그것을 얻는데 부자의 무덤과 비싼 장례용품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모두 바쳐서라도 얻어야만 합니다. 중생이 있어야 장차 부활과 영생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고난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침내 차지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며 인생의 목적입니다.

본문에서 니고데모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유대인들의 장례법대로 향품으로 처리를 한 후에 세마포로 감싸고 있습니다(19:40). 그리고 다시 베로 동이고 두건을 씌웁니다(11:44, 20:6-7). 마지막으로 시신을 동산에 있는 굴 속에 안장을 합니다. 그 날이 바로 유월절 안식일 전날입니다. 그 모습을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과 사도 요한이 지켜보고 있습니다(23:55-56, 20:1-3). 장례식,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인생의 종착역이고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장례를 지내고 있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그렇게 생각이 들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깨달음이 각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초점을 그렇게 맞추고 보면, 사도 요한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체포되고 그 밤이 밝아오기 전에 새벽 일찍 산헤드린 공회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에서 긴급하게 소집이 되었습니다(27:1-2, 18:28). 공회원이라고 해보아야 70명 남짓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내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직 대제사장이 공회를 긴급하게 소집하더라도 몇 시간 내에 모두 모일 수가 있습니다. 그 전날 밤 늦게 가야바는 장인인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의 전갈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안나스가 나사렛 예수를 긴급 체포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급파했다는 것입니다. 장단을 맞추기 위하여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직권으로 긴급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으며 그 모임의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입니다. 한편,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는 사위에게 약속한 그대로 나사렛 예수의 체포작전에 철저를 기합니다. 자기 집의 힘깨나 쓰는 하인들을 출동시키면서 그것으로는 안심이 되지를 아니합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감안하여 로마의 군대를 동원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평소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로마군정의 천부장에게 청탁을 하여 로마병정까지 동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18:3, 12). 물론 그 길잡이는 나사렛 예수의 가신이며 제자인 가룟 유다가 자청하여 맡고 있습니다(18:5). 나사렛 예수의 일행 가운데 내부고발자가 생겼기에 안나스는 큰 힘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22:1-6). 이제 예수만 잡아서 죽여버리면 내부분열이 확산될 것이고 예수의 가르침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으로 그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렇지만 그날 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하여 동원된 무리들의 경험은 안나스의 기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예수의 처형현장에 참여했던 일부 산헤드린 공회원의 경험도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체포조는 그들의 힘으로 예수를 제압하거나 체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내가 그니라!고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그 간단한 한 마디에 체포조 모두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18:6). 그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들 체포조는 예수의 정체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가 자신을 도우려고 칼을 뽑아 들고 있는 자신의 수행제자를 오히려 제지하고 있습니다(18:11).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체포에 응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해온 것입니다. 그 때부터 천부장과 로마병정들 그리고 안나스 집의 하인들은 입을 다물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 이상한 것입니다.

셋째, 로마군대 천부장의 수하인 백부장과 그의 병사가 총독의 명령을 받아서 당일 십자가 처형을 실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 백부장이 처형이 끝나자 이상한 현상의 발생을 목격하게 됩니다(27:50-54). 그는 그 기적의 의미를 즉시 다음과 같이 깨닫고 있습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27:54). 로마군대의 백부장과 병정들이 깨닫고 있는 사실을 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깨닫지를 못했겠습니까? 그들은 히브리 정경에 밝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이 있고 나자 베드로의 즉석 설교를 듣고서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교인들 삼천 명이 그 자리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2:1-42).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발생은 한 마디로, 아리마대 요셉의 변화로 이미 시작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