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55강(요19:28-3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16. 03:39

요한복음 강해 제155(19:28-3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19()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19:28, 36-37)

 

예수님은 30살에 공생애를 나서고 있습니다(3:23). 그 전에는 공생애를 준비했습니다. 누가복음 제2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언제 확립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2:41-50); 열두 살 때 소년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 기간 동안 그곳의 랍비들과 히브리 정경의 예언에 대하여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2:49). 그 때부터 18년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한 지혜로 히브리 정경인 두루마리를 회당에서 빌려서 공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2:40, 52).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에 대하여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깨달은 바를 훗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4-49).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깨달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24:44, 49). 둘째, 자신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한다(24:44-47). 셋째, 죽음에서 부활을 한 후에는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어 줌으로써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는 것이다(24:47-49).

나사렛의 소년 예수는 참으로 궁금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있는데 자신만이 유일하게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아버지라고 하니 그 말이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을 찾기 위해서 발버둥을 친 것입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구약의 예언들을 살펴보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구약 스크롤을 공부한 세월이 자그마치 18년입니다. 그 사이에 의붓 아버지 목수 요셉이 별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집의 장자인 나사렛 예수는 모친 마리아와 남동생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및 여동생 여러 명의 생계를 위하여 그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가업인 목수 일을 계속한 것으로 보입니다(6:3). 그 일을 수행하느라고 장가도 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이 30에 장가를 가는 대신에 출가를 하게 됩니다(3:23). 가업은 당연하게 바로 밑의 남동생인 야고보와 여러 동생들이 떠맡게 됩니다. 그들은 졸지에 형으로부터 생계의 책임을 떠맡게 되자 그 때부터 형에게 대한 감정이 좋지 않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는 형 예수의 등을 떠다밀고 있습니다(7:3-5); “동생들은 형이 수도인 대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큰 꿈을 펴고 메시아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제 내용은 다릅니다. 그곳에서 체포를 당해서 죽든지 말든지 자신들은 상관하지 아니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동생들이 형을 야속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믿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형제로서의 애정조차 전혀 없는 그들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깨닫고 공생애에 나선 예수님입니다. 형제들의 냉정한 모습을 보고서 그는 사람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서 공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도 오로지 자신이 해야만 하는 사명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최후로 남긴 마지막 말 두 마디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내가 목이 마르다!”(19:28). 둘째, “다 이루었다!”(19:30). 첫 마디는 다윗의 시편의 다음 말씀이 현실로 나타남을 보여주고 있다고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69:21-22). 예언 그대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의 입에 묻혀 줍니다. 그 초와 같이 신 포도주를 맛보게 되자 마침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언이 모두 이루어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말씀을 남기고 만족스럽게 눈을 감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원수들이 자승자박이 되고 하나님의 덫에 치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가장 큰 무기인 죄와 죽음의 권세가 모두 깨어져버릴 것입니다(8:2). 자신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죄의 권세가 깨어져버릴 것입니다(8:1). 무덤 속에서 삼일만에 부활하게 되면 음부의 죽음의 세력이 깨어져버리는 것입니다(7:24-25). 요컨대, 사탄의 머리가 박살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3:15). 자신의 제자와 장차 모든 성도들에게 죄에서의 해방 그리고 죽음에서의 부활이 찾아올 것입니다(고전15:20-24, 3:10-14). 이제 만족스럽게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맡기고 자신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19:30).

예수님이 눈을 감은 순간부터 아버지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이 빠른 속도로 성취가 되고 있습니다; 로마병사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끌어 내리기 전에 사망여부를 확인합니다.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게 되자 다리를 분지르지 아니합니다(19:33). 도망갈 우려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확인사살은 합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물과 피를 모두 빼내어버리는 것입니다(19:34). 미이라가 살아서 도망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요식행위가 모두 이미 구약의 정경에 담겨 있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12:46),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9:12),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34:2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12:10).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여호와 이레의 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입니다(1:29, 22:13-14). 그 뼈를 꺾지 아니하는 것이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그 시신을 유월절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치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응하고 있습니다.

그 뼈를 완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마른 뼈가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처럼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37:1-11). 하나님의 군대가 될 것입니다. 그 통뼈는 아담에게서 하와를 만들어 내는 강력한 재료가 될 것입니다(3:20-25). 이제 성도들의 남은 인생의 반려자는 그 통뼈에서 다시 부활의 몸으로 창조되는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6:5, 11, 13, 고전6:19-20, 21:2). 그리고 다윗의 뒤를 잇는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창으로 찔림을 당하게 되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장자가 대속의 제물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시편의 예언이 응하고 있습니다(12:10, 13:15). 유다의 백성들은 메시아를 버렸기 때문에 애통하고 통곡을 하겠지만 이방인들은 그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2:36-39).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그리스도의 찔림이 바로 대속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결론적으로, 예수님과 사람들이 십자가 처형장에서 자기도 모르게 행한 일들이 모두 구약의 예언에 해당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19:28-30). 그리고 로마병정들이 행하고 있는 확인사살을 보고서 사람들은 시편의 예언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야 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1:29, 19:32-37). 그것이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증거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의 아주 이기적인 또 다른 행위는 무엇인가(18:28, 19:31)

 

유대교지도자들은 아주 이기적인 방법으로 율법을 준수하고 규례를 지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14:53, 18:28),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 하니”(19:31). 첫째로, 유월절 잔치를 부정을 타지 아니하고 경건하게 먹기 위하여 이방인인 로마인들의 관청에 발을 들여 놓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사렛 예수를 사형시켜달라고 요구합니다. 만민구원의 교리를 주장하였다고 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주장하였다고 하여 신성모독으로 종교재판을 행하고 이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로마총독의 손을 빌려서 사형을 시키고자 도모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유대교지도자들입니다. 심지어 나사렛 예수에게 누명을 씌워서 로마총독의 손으로 처형을 시키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18:30, 19:6-7). 나사렛 예수가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하기 위하여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참칭하면서 백성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19:12). 한 마디로, 자신들의 기득권인 유대교의 교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나사렛 예수를 억울하게 희생시키고자 하는 그들입니다.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가 선민이라고 유월절 음식을 거룩하게 먹고 싶어하고 동시에 이방인이라고 하여 로마인들의 집까지 출입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양새는 경건하고 거룩한 것 같은데 그 속은 시커멓고 음흉하기가 이를 데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평소 지적 그대로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23:27).

둘째로, 안식일에는 시체를 매달아 두지 아니한다는 율법을 지키고자 산 사람의 다리를 분지르고 창으로 확실히 죽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19:31, 21:23).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산 생명을 죽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3:4). 그것도 이방인인 로마총독에게 부탁을 하고 로마병사의 손으로 죽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율법준수의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손에만 피를 묻히지 아니하면 다른 이방인의 손을 빌려서는 얼마든지 사람의 명줄을 끊어놓을 수가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와 같은 잘못된 선민들의 행동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죄가 이방인들의 죄보다 더 크다고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단죄하고 있습니다;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