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52강(요19:1-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12. 23:09

요한복음 강해 제152(19:1-1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16()

 

빌라도의 책략과 유대교지도자들의 책략(19:1-7, 12-15)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가 로마제국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는 자신이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자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은 진리의 왕이며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8:36-37).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철학자들은 헬라의 세계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 반대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제국의 철학과 학문 그리고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총독인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나사렛 예수를 처벌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를 석방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무지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를 자신에게 사형시켜달라고 넘긴 유대교지도자들의 반발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책략을 사용합니다; 첫째, 유대인들의 속이 시원하게 풀리도록 나사렛 예수에게 엄청 매질을 하고 가시나무 관까지 씌우는 모욕을 한 다음에 석방을 시키고자 합니다(19:1-5). 둘째, 유월절이면 한 사람의 중죄인을 석방하여주는 전례를 이 기회에 적용하여 나사렛 예수를 석방시키고자 합니다(18:38-39).

두 가지 책략 모두 성공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유대교지도자들이 빌라도의 순진한 책략에 대하여 훨씬 뛰어난 책략으로 맞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매질을 당하여 상처를 많이 입은 몸으로, 그리고 가시관에 찔려서 머리에 상처가 나고 얼굴에 피까지 흘리고 있는 참혹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처참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유대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그 정도에 만족을 하지 아니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합니다. 한 마디로, 사형에 처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논리와 명분을 교묘하게 제시하는 책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잘 따르고 있는 유대교인들을 동원하여 예수는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획책했던 중죄인이라는 사실을 로마총독에게 상기시킵니다(19:7, 12).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황제만이 소위 신의 아들입니다. 예수는 황제의 권위에 도전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총독은 당연히 그를 십자가에서 처형을 해야만 한다는 논리를 동원한 것입니다. 변방지역의 반역자를 가장 끔찍한 십자가 형벌에 처하는 것이 추후의 반란을 예방하고자 하는 로마제국의 일벌백계(一罰百戒, 하나를 극형으로 처벌함으로써 백 사람에게 강력한 경고를 주는 것)형식의 형법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유월절 명절이므로 중죄인 예수를 석방하겠다고 빌라도가 선언하는 말에 대하여 더 강하게 유대교지도자들이 밀어 부치고 있습니다; 예수 대신에 독립투사 바라바를 석방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왕이라고 참칭하고 있는 예수를 계속 석방하려고 노력하면 빌라도 역시 로마의 황제에게 역심(逆心, 반역을 원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반역자라고 주장합니다(19:12). 만약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아니하면, 그와 같은 상소를 로마황제에게 직접 전달할 것처럼 로마총독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교활한 유대교지도자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장군출신인 빌라도가 더 순진한 책략을 우직하게 구사한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책략이 훨씬 교활하며 뛰어납니다. 그 결과 책략에 더 밝은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승리가 주어지게 됩니다(19:16). 그러나 그것은 승리가 아니라 불행의 시작입니다. 세상의 책략과 하나님의 경륜이 반비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6:9, 9:15-20).

 

빌라도의 최종선택과 유대교지도자들의 최종선택(19:8-16)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를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에 되돌려주고자 무진장 애를 쓰고 있습니다(18:38-39, 19:4). 그는 진리의 왕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두려운 것입니다(18:36-37, 19:7-8). 그런데 유대교지도자들이 아침 일찍부터 동원한 수 많은 유대교인들은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참칭하는 예수를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이미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하였으니 로마총독은 지체하지를 말고 그대로 십자가에 처형해달라!”(19:6-7). 급기야 빌라도는 사형집행의 권한을 포기합니다. 이번만큼은 유대교지도자들이 나사렛 예수를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을 박아도 좋다고 승인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19:6).

그러나 그 사형의 책임을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 역시 지고 싶지가 않습니다. 로마총독에 이어 그들이 어찌하여 그 처형의 책임만은 면하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진리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주인이 있습니다. 창조주가 그 주인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간이 크다고 해도 역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피조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1:18-20). 그것은 시원적인 것이고 동시에 종말론적인 것입니다(55:8-9, 11:33-36). 현재에도 인간의 영혼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는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이 없는 자가 어떻게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어 있겠습니까? 그 두려움이 없는 자가 어떻게 로마제국의 중신이 되어 있겠습니까? 높은 지위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어주는지는 몰라도 유한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합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 창조주는 오늘도 절대적인 생명력을 공급하고 인간의 길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 절대자에 대한 반역만큼은 최종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습성임을 사도 요한이 여기서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재판의 자리에서 로마총독인 빌라도는 그만 어리석은 최종의 선택을 하고 맙니다(19:13-16). 자신을 역적으로 몰아서 황제에게 고발할지도 모른다는 유대교지도자들의 협박에 그만 굴복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19:16). 빌라도를 끝까지 밀어 부치기 위하여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맙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9:15). 먼저 빌라도에게 있어서는 유대인들의 하나님보다는 로마의 황제가 더 신으로 보일 것입니다. 진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로마의 황제가 자신에게 더 위협이 되는 존재임을 알고 있기에 빌라도는 그렇게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로마의 황제를 선택했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기고 있다는 유대교지도자들은 마치 신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일종의 우상인 로마황제보다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지도자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를 자신들의 왕으로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피조세계입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방나라 로마의 총독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해서 로마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있는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들이 나사렛 예수를 처형하기 위하여 그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메시아까지 버리고 마침내 로마의 황제를 그들의 왕으로 선택하고 만 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선민인 유다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똑 같은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거룩한 백성이기를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22:21)고 가르쳐주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포기하고 있습니다(1:26-27, 22:20). 아예 인간다움을, 그 청지기의 사명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님의 처벌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AD 36년에 먼저 빌라도가 로마총독의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이어서 AD 70년에는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운명은 누구의 손에 빠져들고 있는가?(19:15-16, 22:20-21)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스스로 묶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후의 운명을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지도자들과 로마총독은 마치 그 운명이 자신들의 장중에 놓여있다고 착각을 하고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안나스의 불법연행과 불법심문의 모습이 그러합니다(18:12-13, 19-24).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와 긴급 공회의 심문과 판결의 모습이 그러합니다(18:28, 26:57-68). 이제는 로마총독 빌라도의 심문과 재판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9:10). 예수님은 오직 자신의 운명을 아버지 하나님 만이 결정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9:11).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생길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중요한 지점에서는 조연자를 배정해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할을 각각 누가 선택할지는 미정입니다. 여러 명의 후보자가 물망에 올라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미끼를 무는 자는 각 역할에 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종선택을 자신이 했으므로 책임추궁을 피할 방도가 없습니다. 왜 나에게 그러한 인생의 역할을 배정하고 선택하도록 했는가를 항의해보아야 말짱 헛것입니다. 그 이유는 완벽한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만민구원의 길에 주인공과 조연을 배정하고 각본을 쓰고 있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 분의 장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있습니다. 이제 조연을 맡게 되는 자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 일을 수행하기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 말씀으로 그 역할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9:11). 그 역할을, 그 미끼를 덥석 물도록 속삭인 자는 사탄이거나 사탄의 조정을 받고 있는 인간의 탐욕입니다(3:1-7, 12:6, 13:27); 일찍이 가룟 유다가 그 미끼를 물었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물었으며, 이제는 빌라도가 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를 갚으실 때에 그 순서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제일 먼저 사탄의 머리를 치실 것입니다(3:15). 그 다음에는 가룟 유다를 처벌하십니다(27:3-10). 그 다음에는 유대인들을 세상에 흩어버릴 것입니다(2:19, 21:20-24), 마지막으로 로마제국과 그 뒤를 따르는 세상의 임금들을 차례대로 처벌하실 것입니다(2:38-45, 17:2-18:10).

끝으로, 사도 요한은 아버지의 만민구원의 뜻을 이루고자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돕고 계시는가를 슬쩍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최종적으로 재판을 행한 시간이 유대인 시간으로 제6시이며 오늘 날의 시간으로 정오라는 것입니다(19:14). 그렇다면 오후 3시에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게 되는 예수님의 경우 단지 3시간만 십자가 위에 달리신 셈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15:25, 34). 그렇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십자가 형벌이 시작된 시간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운명하신 시간을 마태복음에서는 오후 3시라고 말하고 있으며(27:46), 누가복음에서는 더 일찍 정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3:44). 어느 기록이 더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이 평균 3-4일 걸린다고 하는 십자가의 죽음의 시간을 단지 3-6시간으로 단축하여 준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사도 요한이 더 크게 깨닫고 있다는 의미가 물씬 풍기고 있는 구절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들도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할 수가 있게 됩니다;아버지 하나님 저의 고통이 육체적으로 견디기에 너무 힘이 듭니다. 이 시간 간구하오니, 예수님의 십자가 처벌처럼 그 시간을 단축하여 주십시오. 그 긍휼과 은혜를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