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49강(요18:2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9. 23:11

요한복음 강해 제149(18:2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13()

 

사도 요한은 왜 가야바의 심문과정을 생략하고 있는가?(18:24, 28, 26:57-68, 27:1-2)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의 저자들과 다른 입장에서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의 서해안 항구도시 에베소에서 20년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적어도 두 가지의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다시 정리하여 헬라세계와 로마제국의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논리와 사고체계에 맞도록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서술체계는 헬라의 철학과 학문의 진술방법을 많이 따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장 서론에서부터 연역법적인 기술이 돋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그가 깨닫기로는 25년쯤 전에 이 세상에 나온 공관복음서 세 권에는 빠진 내용과 잘못 기술이 되고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가급적 빠진 대목을 삽입하고 잘못된 부문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대목들이 예수님 공생애 첫해의 예루살렘 성전청결사건과 니고데모의 방문, 가나에서의 두 차례의 기적,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과의 대화, 베다니 나사로의 부활이야기, 베데스다 못과 실로암 못의 기적,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일,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부음, 제자들을 목자로 발령하는 일, 세족식, 선한 목자의 비유,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내용 등입니다. 다음으로 후자에 속하는 기록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예수님 심문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안나스의 심문 이야기가 나오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만이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특종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요한은 예수님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으로 먼저 연행된 것이 아니고 전직인 안나스의 집으로 먼저 끌려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12-13). 둘째, 당연히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사건도 안나스의 저택 뜰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8:17, 25-27). 그렇지만 공관복음에서는 그 모두가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혼란을 마지막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바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체포해오도록 명령을 내린 자는 현직이 아니고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이다. 따라서 천부장의 군대와 안나스의 하인들이 예수를 연행하여 안나스의 집으로 먼저 끌고 온 것이다(18:12-13). 둘째, 안나스가 심문을 마친 후에 나사렛 예수를 현직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인계를 한 것이다(18:24).

그렇다면 이제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첫째, 사도 요한은 왜 가야바의 심문과정을 생략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기 전에 성도들은 이미 공관복음서를 20년 이상 읽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벌써 공관복음에서 소상하게 다루고 있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산헤드린 공회의 예수님 심문과정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을 더 이상 그의 복음서에서 반복하여 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낭비이며 지면의 낭비인 것입니다. 참고로 사도 요한이 생략하고 있는 부문에 대하여서는 마태복음 제26장과 제27장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고 하겠습니다(26:57-68, 27:1-2). 둘째, 공관복음에서는 왜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심문을 생략하고 있는가?(18:13, 15, 26:57-58). 사도 요한은 자신이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를 잘 알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18:15). 그리고 그 집 문지기 여종에게 말하여 사도 베드로까지 그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주선해주고 있습니다(18:16).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유대교 실세의 집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으며 특히 그 집의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친밀하게 알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공관복음서의 저자인 마태, 마가, 누가 등은 안나스의 프라이버시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의 형인 사도 야고보는 그 집안을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 요한이 그의 형에게까지 안나스 집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하여 침묵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사도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사건 때문으로 보입니다. 사도 요한은 항상 베드로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형 야고보보다 베드로를 더 따르고 있는 자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베드로의 치부를 덮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사건은 공관복음에 실려 있습니다. 다만 그 사건의 발생장소가 사도 요한의 기록과 다를 뿐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 베드로가 여러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장소가 가야바의 집이 아니고 안나스의 집이라고 하는 사실까지는 밝히지 아니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성도들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이지 그 장소에 대한 정확한 기억과 진술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서 판단을 해보면, 사도 요한은 입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허물을 덮어주려고 했던 온건한 인물로 보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소집된 날치기 공회가 전격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종교재판의 내용과 판결의 결과는 무엇인가?(26:57-68, 27:1-2)

 

대제사장 가야바, 서기관, 장로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고 그 늦은 밤에 가야바의 집에 모여 있습니다(26:57).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고 현재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의 집에서 심문을 받고 있다고 전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그들에게 예수님이 연행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안나스가 실패한 자백을 받아 내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한 망언이 사실이냐는 것입니다(26:61). 예수님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답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26:63). 예수님이 긍정적인 답변을 하면서 훗날 하늘에서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언급을 하자 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26:64-65).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판결을 하고 있습니다(26:66). 셋째, 일단 죄인으로 정죄를 하고 나서는 죄인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죄인에게는 인권이 없습니다. 폭행을 하고 모욕을 가하고 있습니다(26:67-68).

늦은 밤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에서 열린 긴급공회에서 전격적으로 은밀하게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사형이 선고됩니다. 그것은 정당한 종교재판이라고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불법이 깊숙하게 내재되어 있습니다; 첫째, 산헤드린 공회가 정식으로 사람을 보내어서 예수님을 체포해온 것이 아닙니다. 현직이 아닌 안나스가 개인적으로 로마의 천부장에게 청탁을 하여 로마의 군대를 움직이고 자신의 하인들을 붙여주어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행자체도 불법입니다. 둘째, 심문의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안나스가 자신의 저택으로 먼저 예수님을 연행하여 심문을 행한 것입니다. 셋째, 종교재판의 정당성을 정치적인 권력에서부터 얻고자 하고 있습니다. 사형판결과 집행의 권한이 유대인에게 없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서 로마총독에게 예수님의 처벌을 강요한 것입니다(27:1-2, 18:28-32). 남의 칼을 빌려서 예수님을 처단하고 자신들은 거룩하게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합니다(18:28). 사도 요한이 그와 같이 상세하게 기술을 하고 있는 이유는 한 마디로, 예수님에 대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재판과 처벌이라고 하는 것이 불법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주장 그대로 불법체포, 불법연행, 불법감금, 불법심문, 그리고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을 빌려서 사람을 죽임)의 계략으로 얼룩지고 있는 대표적인 종교재판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