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46강(요18:12-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7. 09:08

요한복음 강해 제146(18:12-1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10()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18:3, 12)이라고 열거하고 있는 이유, 그리고 전직과 현직 대제사장의 이름을 저자가 혼동하고 있는 이유(18:13-14, 19)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사두개인들이며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오경만을 믿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와 제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2성전을 재건했을 때부터 외세와 타협하여 외교적으로 유대교의 자치권을 보전해왔던 세속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상한 전통은 에스라와 느헤미아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암몬의 지도자 도비야와 결탁을 하여 성전의 안위를 보전하고 있는 데서부터 비롯되고 있다고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13:4-7).

예수님 당시에도 그 전통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가 로마총독과 가깝게 지내면서 로비를 하여 자신의 사위 가야바를 현직 대제사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18:13b). 그리고 자신은 막후에서 현직보다 더 강력한 유대교지도자로서 군림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나 의사 누가와 같이 똑똑한 복음서의 저자들도 때로는 이미 그 직을 물러난 지 오래인 안나스가 마치 현직 대제사장인 것처럼, 또는 대제사장이 복수인 것처럼 혼동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제자는 (안나스)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18:15), “(안나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18:19),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박으소서”(19:6),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3:2), “예수를 잡아 끌고 (안나스)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 가니라”(22:5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23:4) 등이 그러한 대목들입니다.

참고로, 안나스 대제사장의 재임기간은 AD 6-14년인데 그는 시리아의 로마총독 구레뇨의 임명을 받은 자입니다. 4년 후에 그의 사위 가야바는 유다를 다스리는 로마총독 그라투스로부터 임명을 받았는데 그는 장인보다 더욱 두뇌회전이 빠르고 외교술과 처세술이 동시에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보통 4년에 그치는 임기를 몇 번이나 연임을 했습니다. 그 결과 가야바는 AD 18년부터 37년까지 무려 19년간이나 대제사장으로 현직에 머물렀던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 처형 당시의 대제사장인데 그 때에도 그는 뛰어난 처세술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처벌할 수밖에 없는 명분만을 제시하고 자신은 우직한 장인의 뒤에 숨어버립니다(11:50, 18:12-14). 빌라도의 힘을 빌려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압력을 가할 때에도 가야바는 어김없이 장인 안나스를 함께 내세웁니다(19:6).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마의 반역자에 대한 최종처벌권, 곧 사형판결권이 없다는 법적인 조건을 빌미로 내세워서 예수를 로마총독에게 넘겨버립니다(18:30-31). 그리고 여론몰이를 하여 로마총독에게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합니다. 그 결과 어처구니가 없게도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 처형의 책임은 전적으로 로마에서 파견을 나와 있는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어가버리고 맙니다. 오늘날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성도들도 그 점을 깜박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이 그 점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9:11).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로 역사 가운데 40년 후에 임하고 있습니다. AD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이 함락되고 성전은 불탔으며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 바깥으로 쫓겨나버리게 됩니다. 무려 110만명이 희생되고 10만명 정도 쓸만한 인재들은 모두 인질로 북송이 되고 맙니다.  

한편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는 예수를 체포하는데 있어서 개인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로마군대의 천부장과 군사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18:3, 12).  그 결과 예수를 결박한 그들은 어처구니가 없게도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관저가 아니라 전직인 안나스의 개인 사저로 예수님을 먼저 끌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8:12-13a). 참고로, 예루살렘은 당시 로마의 총독이 군정을 실시하고 있던 도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정(軍政, 군사통치)이라고 하는 것은 점령군이 군사력과 경찰력을 독점하고 있는 체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는 로마총독이 군정의 책임자로 되어 있으며 모든 군대는 로마군사령부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현지의 유대인들에게는 군대나 군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온 무리들 가운데에는 군대와 천부장”(18:3, 12)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로마인의 군대와 그 지휘관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누가 동원했을까요? 그 점을 은연중에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18:12-13).

청탁을 받은 자는 먼저 계약금을 받고서 맡은 일을 시작합니다. 그 일이 성사가 되면 결과물을 그 사람에게 인도하고서 잔금을 받는 법입니다. 그러한 이치를 생각해보면 금방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그대로 안나스가 천부장에게 개인적으로 청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로마총독인 본디오 빌라도가 나중에서야 예수님의 체포소식을 보고받고 있습니다(18:28-38). 더구나 심문과정에서 빌라도는 무척 예수님에게 호의적입니다(18:38:-40). 참고로, 여기서 유대의 아랫사람들이라고 분류가 되고 있는 사람들은 산헤드린 소속의 하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가야바가 주장했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11:49-50).

 

종의 이름 말고’, 그리고 유대교 실세 안나스까지 알고 있는 사도 요한(18:10, 15)

 

사도 요한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언급이 아닙니다. 간접적으로 요한이 그의 집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요한은 스스로 안나스 전임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18:15). 약관의 요한이 어떻게 나이가 많은 유대교 최고의 실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이일까요? 그 이유는 요한의 집안의 배경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최초의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의 혈통입니다(1:5, 36, 40-41, 56). 따라서 마리아의 여동생이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도 대제사장 가문의 후예입니다. 안나스 역시 아론의 후예였기에 감히 대제사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한의 집안은 안나스의 집안과 가까운 친척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두 집안 사이에는 자주 왕래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안나스 집의 문 지키는 여종까지 알고 있습니다(18:16). 그 뿐만이 아닙니다. 궂은 일을 하고 있는 하속 말고의 이름까지 알고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18:10).

참고로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할 때에 그 아래까지 접근을 하고 있는 갈릴리 여자들의 이름 가운데 예수님의 이모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19:25). 사도 요한은 자신의 어머니 살로메가(15:40, 16:1) 예수님의 이모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는 대목입니다. 둘째, 공관복음서에서 요한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0-21). 사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조카인 예수에게 당당하게 요구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종동생들에게 높은 자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동안 남편 세베대와 함께 그녀가 예수님의 공생애 비용을 엄청나게 지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8:3). 셋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노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19:25-27). 그 말씀은 사실 이모에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노후 생계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장수하게 되는 모친을 훗날 이종동생 요한이 끝까지 봉양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부탁을 사도 요한이 엄수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망하고 나자 요한은 이모 마리아를 모시고 소아시아 에베소로 이주하여 끝까지 봉양을 했다고 합니다. 그 무덤이 에베소에 남아 있다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가문과 가문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 점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로마서 마지막 장 제16장에서 그와 같이 기술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문을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의 인상착의를 알아보고 있는 이유(18:17-18)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는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에게 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안나스 집의 하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18:10-11). 그 때 말고의 동료들이 베드로의 모습을 기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고의 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주었습니다(22:51). 그 두 가지 광경은 종들의 뇌리에 깊이 인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나스의 집으로 끌고 왔습니다. 추운 봄날이므로 군사들과 하인들은 불을 쬐고 있습니다. 그들 하인들의 화제의 중심은 베드로의 칼과 예수님의 치유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문 지키는 여종까지 베드로의 용모파기를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유대교의 최고 실세의 집입니다. 그 집의 수위가 되고 있는 여종입니다. 그녀는 직업상 굉장히 눈썰미가 좋아야 합니다. 한번 보면 그 사람의 생업이나 용모의 특징을 금방 파악하고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야기만 듣고서도 그 사람의 용모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직업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덕분에 비록 밤늦은 시간이지만 사도 요한의 신원보증으로 대문 안으로 얼핏 들어서는 베드로의 용모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집안 뜰에 피워놓은 모닥불의 빛 줄기에 비추어지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은 이야기로만 들었던 나사렛 예수의 그 호위무사의 인상과 꼭 맞아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종이 슬쩍 찔러보고 있습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18:17a). 시몬 베드로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 의하여 거의 반사적으로 부인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18:17b). 그리고 나서 자신을 숨기기 위하여 불을 쪼이고 있는 여러 사람들 사이로 파고 들어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