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45강(요18:7-1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7. 02:38

요한복음 강해 제145(18:7-1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9()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18:8)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나사렛 예수를 처단하려고 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예수님의 사상이 그들의 유대교리와 완전히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유대교의 신관은 유일하신 한 분 여호와 출애굽의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20:3-5, 6:4-5).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강조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은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5:19-27, 10:30). 유대교지도자들은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과 함께 창조주의 권위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명백하게 유대교리와 어긋나며 이단의 사상입니다. 또한 예수는 히브리 사상을 전면 부인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선민의 상징인 할례, 안식일,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에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는 누구나,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4:21-24, 5:24). 둘째,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은 안식일에 행해도 무방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2:28, 3:4). 셋째, 예루살렘 성전은 세상사람 누구나 들어와서 기도할 수 있는 집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제물장사를 하고 있는 성전을 청결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2:16, 11:7). 요컨대, 선민의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처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지지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9-19). 그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그의 놀라운 능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같은 표적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눈을 피하여 전격적으로 나사렛 예수를 해치워버려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사렛 예수를 은밀하게 체포하여 순식간에 조용하게 처단할 수가 있을까요? 그 방책을 마련하기에 고심하고 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낭보가 날아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내부고발자가 되어주겠다는 제안입니다(11:53, 22:1-6). 그래서 대제사장은 군사를 마련하여 밤중에 은밀하게 겟세마네 동산으로 출동을 시키고 있습니다(18:3). 그렇지만 예수님의 체포가 용이하지가 않습니다. “내가 그니라!라고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그 말씀의 위력 때문에 군사들이 추풍낙엽같이 모두 쓰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8:6). 체포는커녕 군사들이 온전하게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뜻밖의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18:8). 그 말씀은 자신이 순순히 체포를 당해줄 터이니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는 타협안의 제시인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스스로 체포를 당해주겠다고 선심을 쓰고 있습니다. 군사들의 입장에서는 이 때가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자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얼른 예수님의 체포에 나서고자 합니다(18:12).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스스로 체포를 당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8:11). 사도 마태는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3-54).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면서 그 점을 다시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8:9). 그 말씀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는 말씀의 적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용기와 비겁함이 주고 있는 교훈(18:6, 10-11, 17, 25, 27)

 

시몬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와 동년배로 보입니다. 베다니의 나사로와도 서로 연령이 비슷했으며 모두가 개인적으로는 친구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4-15).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좋아했으며 늘 함께 데리고 다녔습니다. 베드로도 스승 예수님의 일이라면 항상 팔을 걷어붙이고 먼저 나섰습니다(13:9, 37, 20:6, 21:7).

본문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군대와 천부장이 총출동을 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한 마디에 모두가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18:3, 6). 그 광경을 바라보고서 베드로는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군사들 앞에서도 용기백배하여 마치 관우나 장비처럼 혼자서 칼을 뽑아 들고서 대항을 하고 있습니다(18:10). 그렇지만 예수님의 꾸지람을 듣고 맙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 대항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엄명입니다. 자신의 의도와 예수님의 의도가 서로 어긋나고 있습니다. 그 순간부터 용감한 시몬 베드로의 모습은 사라지고 맙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과 맞으면 사기가 진작이 되지만 그 의도에 어긋나게 되면 의기소침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을 하자면, 성도들은 그 속에 예수님께서 계실 때에 힘이 납니다. 아니 계시게 되면 세상을 이길 힘도 없으며 패잔병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고 멀찌감치 스승을 따라가던 베드로가 한낱 계집종의 추궁에도 비겁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확실히 그러합니다(18:16-17).

 

예수님은 왜 칼 대신에 잔을 선택하고 있는가?(18:11)

 

칼과 잔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주변국들과 많은 전쟁을 쳤습니다. 대부분이 정복전쟁입니다. 다윗은 휘하의 37명의 용장들과 함께 자신의 칼로써 대제국을 당대에 건설한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렇지만 솔로몬 왕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전쟁을 치른 왕이 아닙니다. 외국의 수많은 사절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면서 술잔을 기울였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외교술로써 그 큰 제국을 잘 지켜낸 왕입니다. 전쟁과 외교의 상징이 칼과 잔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그 피 묻은 손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가 없었지만 그 아들 솔로몬은 성전을 7년 동안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하고 있습니다(왕상5:3, 6:38, 8:66).

기독교와 회교와의 차이도 잔과 칼의 차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잔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받아 마심으로 만민구원의 계획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회교는 한 손에는 코란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잡고서 정복전쟁에 나서고 있습니다. “코란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칼을 받을 것인가?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진정한 평화를 위한 잔은 존재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은 각각 블레셋의 대왕인 아비멜렉과 브엘세바에서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합니다(21:31, 26:30-31). 그들은 감히 아비멜렉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평화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군사력으로 보면, 그들은 아비멜렉의 상대가 도저히 되지를 못합니다. 그렇지만 평화조약은 아비멜렉의 요청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의 권능이 그들에게 임하고 있음을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21:22, 26:28).

지금 예수님이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고자 합니다. 그것은 칼로 정복을 하는 것보다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정복이 아니고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반목과 질시를 종식시키고 전쟁을 예방하는 길은 그 쓴 잔을 대신 받아서 마시는 도리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5:10-11, 18). 그 대속의 잔을 받아서 마셨기에 천국에서는 훗날 잔치자리가 마련되고 축제의 잔이 있을 것입니다. 칼 대신에 대속의 잔을 마시고자 하는 성도들이 교회를 이루고 지상명령을 완수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 때 기쁨의 잔을 들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잔을 마셔야만 하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