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43강(요17:24-2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4. 21:35

요한복음 강해 제143(17:24-2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7()

 

예수님처럼 인생을 살게 되는 제자들과 성도들이 얻게 되는 지극히 큰 상급의 내용(17:24)

 

창세기 제15장을 보면 독생자인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의 조상이 될 아브람에게 환상 중에 현신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 훗날 하나님 말씀이 이 땅에 성육신하게 되는데 그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실체는 천국에서 창조주의 영광을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독생자입니다(1:1). 그 독생자가 아브람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이제 요한복음 제17장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4). 한 마디로, 지극히 큰 상급은 창세 전부터 독생자가 창조주로부터 얻어서 함께 공유하고 있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특별히 독생자의 영광 가운데 사람들의 생명과 빛이 담겨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4-5). 사람들이 믿음이 없기에 보이지 아니하는 생명을, 그 영적인 빛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독생자의 영광이 사람을 살리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목숨을 보전하고 물질계를 경영하며 자신들의 육신을 살게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1:18-25).

예를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심장을 뛰게 하지도 못하고 장기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자율신경은 오로지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으로 지금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가 없으며 그 움직임 자체를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목숨과 육체의 내부 움직임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하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자만과 욕심 때문에 그 영이 어두워져 있는 인간들이 인정을 하지 아니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수술에 있어서도 의사가 큰 신경조직과 근육조직만을 수술하고 봉합할 따름입니다. 미세한 신경조직과 세포들은 의사의 손이 닿지를 못하고 있는 분야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따라서 재생이 되고 서로 연결이 되어서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의학적인 치료행위입니다.

만약에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섭리가 없다면 사람들은 진작에 모두가 죽은 목숨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독생자의 영광이 바로 사람들의 생명력이며 인생을 움직이는 빛이 된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리에 해당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영광은 하늘의 빛이며 그것은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조에’, ζωη)과 영광(‘독사’, δοξα)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상급이라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지극히 큰 상급을 받기 위해서 믿음의 열조들이 모두 평생을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기를 원하고 그가 자신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여주기를 소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3-1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 그것이 믿음의 장(, chapter)인 히브리서 제11장의 기록의 특징입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사도 요한은 사도 바울의 다음 기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3-6). 사도 바울의 에베소서는 AD 60년경의 저술이지만 사도 요한의 복음서는 AD 90년경의 저술이기 때문에 요한이 바울의 저서를 참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하나 덧붙이자면, 창세 전에 독생자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던 창조주의 영광은 사람들의 생명이며 구원의 빛입니다. 그것이 지극히 큰 상급이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정론적으로 창세 전부터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 사도들에 의하여 훗날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될 모든 성도들에게 지극히 큰 상급으로 달라고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이 바로 17:24’ 절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조주를 아버지로 아는 것이 정체성이며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시는 예수님(17:25-26)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소위 여자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3:15, 1:18).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니 계시고 오로지 영적인 아버지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님의 유일하신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한 다음에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그 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38-40).

이제 제자들과 헤어질 때가 임박하게 되자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제자들이 계승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처럼 제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영적으로 자신과 함께 그들에게 임재하여 달라고 다음과 같이 청원을 하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17:25-26).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있는 새로운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지키기만 하면 제자들에게 영적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함께 거하실 수가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제자들과 성도들은 지상명령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의 성화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마침내 이 땅에서의 목숨이 다하는 날 천국으로 직행하게 되는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볼 수 있으며 모두가 왕과 같은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17:24-26, 벧전2:9, 2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