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44강(요18: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5. 22:40

요한복음 강해 제144(18:1-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8 8()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 밤중에 동산으로 가신 이유는 무엇인가?(18:1-2)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0-33). 체포를 당하기 바로 전날, 그 마지막 저녁식사의 자리에서 드디어 제자들이 하나의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 가운데에는 과거에도 그와 같은 믿음을 스승에게 고백했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나다나엘과 베드로입니다(1:49, 16:16). 그러나 당시에는 세상만사를 모두 훤하게 알고 있는 창조주와 같은 자로서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때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뒤를 잇고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는 메시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1:50-51).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장차 하늘이 열리고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서 창조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그 점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더 분명합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순간적인 신앙고백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16:17). 아직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은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서 반드시 붙들어야만 될 구원주이며 창조주라는 인식의 단계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날 저녁에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다가올 일을 모두 아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의 수준까지 미리 알고 있는 것으로 제자들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사람의 생각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전능자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16:30). 그러나 그와 같은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제자들은 신앙고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엄청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그들에게 없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그들의 죄가 청산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대속의 십자가에서 피의 제사를 지내고 나서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을 해야만 그들이 죄사함을 받고 의인으로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야 비로서 성령님이 강림하여 그들에게 영원히 내주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의 믿음을 현재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미래지사가 지금 예수님의 눈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자신이 이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겨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그 밤늦은 캄캄한 시간은 일종의 흘러가는 시간 크로노스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앞두고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하는 그 시간은 유일한 시간이며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때인 카이로스입니다. , 자신의 공생애를 끝내고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장래를 모두 맡겨드려야만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과 헤어져야만 합니다. 그들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는 예수님의 신앙만이 구원을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아들이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바로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감람산 그 동산으로 결정이 되고 있습니다(18:1). 그 장소는 그들에게 생소한 곳이 아닙니다. 평소 예루살렘과 베다니의 숙소를 왔다갔다한 예수님 일행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장소입니다(18:2). 무척 익숙하고도 평범한 자신들의 집합장소이자 기도의 처소가 이제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는 장소로 선택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동산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으며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18:2-5)

 

마지막 기도의 장소로 선택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한밤중에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18:1). 언제나 그러하듯이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을 멀찍이 두고서 자신을 수행하고 있는 세 제자들과 함께 더 깊숙한 장소로 들어서고 있습니다(14:32-33). 그런데 그날 밤은 평소와는 다릅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체포를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도 헤어질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자신을 해칠 것입니다. 자신은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전에서 매년 드려지는 번제물의 고통을 예수님은 알고 있습니다.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목이 분리가 되고 조그만 번제단에 한꺼번에 올려지기 위하여 제물의 몸통마저 토막이 날 것입니다(1:5-9). 얼마나 끔찍한 광경인지 모릅니다. 이제 이 밤이 지나면 자신의 운명이 바로 그와 같은 번제물의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공포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불가항력의 공포와 고통을 지금이라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 등 세 명의 수행제자를 기다리라고 하고서 혼자서 동산 중앙에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독대를 청했습니다(14:34-35);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14:36). 뻔히 다가올 일을 알면서도 한번 더 어리광을 부리며 하나님 아버지에게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끔찍한 제물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자신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대속의 방법을 제시해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기도를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극형인 십자가의 처형이 아니면 그 무거운 인간의 죄를 도저히 한꺼번에 청산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7:27). 인간으로써는 감당할 수도 없는 대속의 방법입니다. 유일하게 독생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7:28). 그 방법이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도 도저히 사함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나와 너와 우리와 그들의 죄가 무겁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성찰 그대로 우리 모두가 하나같이 그러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하나님 아버지와의 독대와 기도가 모두 끝나자 드디어 제물을 찾는 무리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18:3).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일을 이미 모두 아시고 있습니다(18:4). 그러나 제자들은 명확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번 예언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들도 다소 눈치를 채고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준비가 예수님처럼 단단하지가 아니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아직도 다윗의 후계자로 오시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설마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그렇게 맥없이 체포를 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입장은 다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 예수님은 체포조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따라서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체포조(逮捕組, arrest team)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담담하게 자신이 나사렛 예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18:4-5).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체포를 당한 것이 아니라 체포를 자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꾀를 따르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승리가 아닙니다. 그 반대로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권세인 죄와 사망의 법이 깨어지는 전주곡이 마련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8:2).

 

배신과 흩어짐의 장소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유일한 신앙의 대상과 믿음의 개념(18:6, 16:31-33, 3:9-18, 23-24, 4:16-25)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자 내가 그니라!는 한 마디에 그를 체포하고자 몰려왔던 모든 무리들이 땅에 엎드러지고 있습니다(18:6). 무장을 하고 있는 군인들이 아무런 이유가 없이 바닥에 한꺼번에 쓰러질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16:32).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각각 블레셋 다섯 왕국의 최고통치자인 아비멜렉 왕과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맺고 있습니다(21:32, 26:31). 떠돌이 호족에 불과한 그들과 아비멜렉 왕이 대등하게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1:22),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26:28).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질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평안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믿고 있는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36개월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믿고 있을 따름입니다(16:31-33). 그러므로 신앙의 대상은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보여도 그 정체가 사람인 이상 믿음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갈파하고 있습니다(3:10).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있는 자신이 선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절대로 선한 존재는 하나님 아버지밖에 아니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18).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의인이 될 수가 있으며 선하신 하나님과 평생 동안 동행하는 인생을 살 수가 있을까요? 그 비결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역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6:56-57),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신앙의 대상이 창조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제자들의 삶이 변화되자면 또 하나의 깨달음과 경이로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예수님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깨달음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목숨을 살리고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망을 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자신의 믿음과 의지로써는 아무런 것도 이룰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정직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능력이 창조주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의 경우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갈지라도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기에 세상의 환난을 이기고 평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16:32-33).

그렇다면, 하나님이 긍휼의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점을 일찍이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4:18-22). 여기서 믿음의 개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현실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현실은 가변적인 피조물의 세계입니다. 언제나 변하며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절대선이 지배하고 있으며 변함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에 있어서 캄캄한 어두움이 극성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그 예언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자꾸만 희박해져 갑니다. 점점 더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예언의 말씀을 더욱 튼튼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선보인 자가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원과 영생의 은혜도 그 예언에 대하여 성도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비로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4:23-24). 변화무쌍한 이 세상의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자가 아브라함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고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의 경우에는 부활의 몸을 입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믿음의 삶을 영위하게 되면 성도들도 장차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