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48강(요18:25-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8. 20:18

요한복음 강해 제148(18:25-2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12()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시몬 베드로, 그 상황과 답변의 차이(18:17, 25-27)

 

첫 번째 부인(否認,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의 성격은 문지기 여종 한 사람의 의심에 대하여 베드로가 행한 거짓 해명입니다(18:17). 두 번째 부인은 함께 모닥불을 쬐고 있던 옆 사람들이 베드로를 집단적으로 의심하자 그것을 여러 명 앞에서 강하게 부인한 것입니다(18:25). 세 번째 부인은 말고의 친척 한 사람이 베드로를 정확하게 알아보고서 확인을 하려고 하자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부인한 것입니다(18:26-27).

 그러므로 그 세 가지의 경우는 의심의 강도와 해명의 정도가 다음과 같이 각각 다릅니다; 첫째, 문지기 여종은 예수님이 스스로 체포를 당하고 있던 겟세마네 동산에 없었던 여자입니다. 그저 문지기의 소임을 다하느라고 그날 밤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출동을 하고 있는 안나스 집의 하인들이 대문을 나서는 것을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무사히 체포하여 안나스의 집에 돌아온 그들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메시아라고 전해지고 있는 예수님에게 그들은 접근조차 못했다는 것입니다. 정체를 확인하려고 하자 내가 그니라!라고 외치는 한 마디에 모두 너무나 놀라서 고꾸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18:6).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스스로 자신을 체포해가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18:11b). 그 뿐만이 아닙니다. 칼을 뽑아 들고서 저항을 시도하고 있는 자신의 사람을 말렸다는 것입니다(18:11a). 그 한번 칼질에 그만 말고의 귀가 베어져 나갔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신기하게도 그냥 만져서 낫게 했다는 것입니다(22:50-51). 실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문지기 여종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호위무사인 제자의 인상착의까지 소상하게 듣게 되자 그 일련의 사건이 사실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그녀 앞에 시몬 베드로가 나타난 것입니다(18:16).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이야기 속의 그 호위무사와 똑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 확인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18:17). 시몬 베드로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인을 하고서 많은 사람들이 불을 쬐고 있는 모닥불 사이로 몸을 숨기고 맙니다(18:18). 둘째, 그런데 베드로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를 않습니다. 거짓말은 계속 거짓말을 생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사람 앞에서 행한 거짓말은 여러 사람 앞에서 행하는 거짓말로 확대됩니다. 모닥불 가의 여러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베드로를 그 때의 그 호위무사 겸 예수님의 제자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18:25a). 이미 한번 부인을 했는데 두 번인들 못하겠습니까? 이제는 태연하게 베드로의 입에서 자동적으로 버릇처럼 변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18:25b).

세 번째가 끝입니다. 마침내 꼼짝도 할 수 없는 진실의 규명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이 종착역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함께 출동을 했던 말고의 친구 한 사람이 정확하게 베드로의 용모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네가 그 사람(예수님)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18:26). 베드로는 혐의를 벗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여야만 합니다. 죽을 힘을 다하여 거짓말의 강도를 최대로 높입니다. 그것은 배교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한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나고자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베드로입니다”(26:74). 그것이 베드로이며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 이유는 속죄양에게 자신들의 모든 죄를 안수하고 저주하여 광야 그 죽음의 길로 떠나 보냄으로써 유대인들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16:21-22). 오늘 날에도 매번 그렇게 속죄양을 마련하여 자신들의 모든 허물을 대신 뒤집어 씌우고서 마치 자신들은 의인이 된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자들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몬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들의 추악한 면모를 그대로 원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원형’(prototype)이라고 하겠습니다.

 

닭 울음소리와 예언과 베드로를 돌아보고 있는 예수님의 시선(18:27, 22:60-62)

 

예수님은 베드로가 스승인 자신을 저주하고 있는 모습을 슬픈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22:61). 바로 그 순간에 닭이 울고 있습니다(22:60).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는 예수님의 그 예언이 현실이 되어 닥친 것입니다. 그러자 입버릇처럼,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13:37)라고 큰 소리를 쳤던 베드로가 형편이 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22:62); “자신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중죄인입니다(13:38, 18:27). 이제는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그 죄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한편, 같은 장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대속의 십자가를 자신이 빨리 지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이 예수님의 눈길 속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슬픔과 함께 연민의 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예수님의 그 동정의 눈길을 도저히 감당을 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집에, 스승님이 계시는 그 자리에 머무르지를 못하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책감과 열패의식(劣敗意識,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젖어서 스승님을 영원히 떠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남은 세월을 그냥 살아가리라! 희망도 없이, 꿈도 없이, 스승 예수님이 주시던 천국에의 소망도 없이 그저 살다가 그렇게 흙으로 돌아가리라!”. 자기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도리가 전혀 없다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할 일 없이 다시 어부가 되고 만 것으로 보입니다”(21:1-7). 비록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스승님이 부활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두 차례나 직접 만나보기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써는 여전히 마음의 평안과 용서함을 완전히 실감하지를 못하고 있는 베드로입니다(20:1-10, 19-29).

그렇다면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는 예수님의 지혜와 처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목자로 남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21:15-18). 예수님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이 그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두 번 다시 배신을 하지 아니하고 목숨을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21:18-19).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할 것입니다(20:22-23). 성령님이 임하시면 베드로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영생을 얻는 경지의 신앙소유자가 될 것입니다(1:8, 2:14-42). 그러한 처방은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것이기에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말미에 특별히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