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50강(요18:29-3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11. 01:45

요한복음 강해 제150(18:29-3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14()

 

로마군정과 유대교의 선민사상(18:28-29)

 

기원전 1세기 중엽에 헬라세계는 모두 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이 되고 맙니다. 헬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헬라의 왕조들보다 로마제국의 군사적 지배가 훨씬 강력합니다. 그들의 영토는 헬라의 문명권보다 더 넓습니다. 이태리반도 서쪽의 유럽지역 끝까지 모두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로마의 군정 아래에서도 고개를 숙일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본문내용을 보더라도, 유대교지도자들은 종교적으로 부정이 탄다고 하여 자신들을 다스리고 있는 로마의 총독조차 가까이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8:28).

그들의 관념은 그 옛날 힘있는 애굽제국의 백성들이 힘없는 이주민에 불과한 히브리인들을 멸시하던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창세기에 그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애굽사람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43:32).  사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힘이 없습니다. 그들은 로마군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민족우월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는 선민사상에 푹 젖어 있습니다. 그 결과 감히 로마총독까지 이방인이라고 멸시하고 있습니다. 로마총독을 가까이 하면 부정을 탄다는 생각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유대교지도자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18:28-29).

참으로 위험한 사상입니다. 그 종교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합니다. 20세기 중엽에 독일의 히틀러가 유럽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아메리카의 미국이 개입을 하게 되자 세계전쟁으로 확전이 되고 맙니다. 히틀러의 나치당국은 군자금마련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때 나치는 유럽에서 그들의 독특한 선민사상 때문에 지탄을 받고 있는 유대인들의 재산을 수용하려는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됩니다. AD 70년에 발생했던 유대인들의 반란과 로마군대의 무자비한 살육이 20세기에 또다시 재현되고 만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의 지배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문명을 이끌고 있는 것은 헬라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로마의 라틴문명보다 헬라의 것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은 결코 게르만족과 같은 문명의 파괴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공화정을 실시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독재와 독점을 싫어했으며 역사적으로 다민족을 포용하여 그 세력을 강화시켜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의 장점 세 가지를 수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테네의 공화정치를 수입했습니다. 둘째, 스파르타의 강력한 군인정신과 군제를 도입했습니다. 셋째, 헬라의 학문과 철학 그리고 예술을 흠모하고 수입을 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민족국가인 로마제국의 번영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로마제국이 강력하게 패권을 행사하면서 오래도록 문명의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로마제국의 정책을 모방했던 제국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오늘 날 아메리카합중국의 영광도 그 옛날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유대교의 선민사상은 한 마디로,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총독에게 예수님의 처벌을 넘기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속셈(18:30-32)

 

유대교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백성들을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모세오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 여호와는 축복과 저주를 인간에게 주고 있는 유일신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을 주십니다. 그 반면에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축복에 비하여 몇 배나 되는 진노와 재앙으로 반드시 보응을 하시는 두려우신 하나님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만에 하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날 경우에는 그 후환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손이 아니라 로마총독의 손으로 처형을 시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아직도 나사렛 예수의 표적을 보고서 그를 따르고 있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12:11-13). 그러므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의 처형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고 하는 판단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사상을 가진 자로 몰아서 로마의 군정에서 판결을 하고 극형에 처해버리는 것이 후환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묘책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판단에 능한 자가 바로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라고 하겠습니다. 19년 동안이나 대제사장의 자리에 머무르게 되는 가야바야 말로 잔머리가 뛰어나고 처신술에 능수능란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사렛 예수를 로마총독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는 정당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 명분을 다음과 같이 찾아놓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18:31). 산헤드린 공회에서 이미 종교재판을 한 결과 나사렛 예수는 사형에 해당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18:30, 14:64). 그러므로 로마총독이 다시 재심을 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처형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유대교지도자들의 요구입니다. 이제 예수님에 대한 사형선고와 집행의 책임이 잘못하면 로마총독에게 모두 돌아올 판입니다. 하지만, 머리가 좋고 역시 처신술이 뛰어난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심문을 신중하기가 그지 없습니다(18:33-38).

 

빌라도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8:33-38a)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 둘째, “네가 무엇을 하였기에 유대교지도자들이 너를 나에게 넘겼느냐?”(18:35). 셋째, “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나라의 왕이냐?”(18:36-37a). 넷째, “진리가 무엇이냐?”(18:38). 위의 네 가지 빌라도의 질문은 한 가지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유대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진술을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무척 효과적인 질문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가지고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그 심문의 방법이 보통 세련되고 노련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총독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노련하고 신중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엉터리 판결을 내릴 수가 있을까요? 그 점에 관하여 사도 요한이 뒤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18:38b-40).

여기서는 단지 빌라도의 네 가지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유대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다윗 왕의 후계자이며 이 세상에 오는 유대인의 왕으로 주장하면서 그 신변을 로마총독에게 넘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로마의 황제가 총독을 내세워서 군사통치를 하고 있는 유대 땅에 과거의 패권국 이스라엘 제국을 다시 건설하겠다고 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그러한 자이며 자칭 유다의 왕이라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으니 부디 그를 사형시켜달라는 요구입니다. 노련한 정치인 빌라도가 유대교지도자들의 내심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유대교 내부에 무엇인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로마총독의 사형집행권한을 빌려서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처결하고자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쯤 짐작을 하면서도 절차에 의하여 고발내용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 우문(愚問, 어리석은 질문)에 대하여 현답(賢答, 현명한 답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가 보기에 내가 왕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나를 너에게 넘긴 자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저 한번 확인차원에서 묻는 말이냐?”(18:34).

차제에 예수님은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긴 유대교지도자들의 행동이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만약 이 세상에 세상적인 방법으로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으면 자신이 낭패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서 있지 아니했을 것이다. 부하들을 시켜서 한바탕 전투를 했을 것이며 승리를 했을 것이다. 자신은 그러한 나라를 건설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 증거로서 순순히 체포를 당했으며 로마총독의 앞에 피의자로 서있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을 것이다(18:36)”.

예수님의 그와 같은 설명에 의하여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있던 모세나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가 유다 땅에 나타나서 이스라엘 나라의 영광을 만방에 다시금 떨치는 꿈은 물 건너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점을 로마총독 빌라도의 다음 질문이 거듭 확인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나라의 왕이겠구나?”(18:37a). 예수님의 답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 나는 진리의 왕으로 이 세상에 왔다”(18:37bc). 빌라도는 궁금증을 이기고 못하고 마지막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18:38). 이미 그것은 심문이 아닙니다. 그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대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심문의 결과는 한 마디로, 유죄로 인정할 만한 사실이 나사렛 예수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18:38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