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51강(요18:38-4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11. 23:44

요한복음 강해 제151(18:38-4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15()

 

빌라도는 왜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하며 유대교지도자들은 왜 계속 처형을 강요하고 있는가?(18:38b-40)

 

빌라도는 알아채고 있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나사렛 예수를 처형하고자 하는 이유가 그들의 교리문제 때문임을 확인한 것입니다(18:35-38, 27:18). 그리고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대신 로마총독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어합니다. 예수를 처형한 책임을 빌라도에게 전가시키고 자신들은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18:29-31). 그 이유는 예수를 지지하는 백성들이 유대인들 사회에 제법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10-13). 로마총독의 입장에서 빌라도는 되도록 반대자를 만들지 아니하고 손쉽게 경제적으로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왜 자신이 그 부담과 책임을 떠안고 후에 일어날 종교적인 분쟁에까지 끌려들어가야만 하다는 것입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로마의 장군출신이지만 AD 26년에 예루살렘에 부임하여 벌써 5년째 총독생활을 하고 있는 빌라도입니다. 그 정도의 이치쯤을 이미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를 무죄로 방면하고자 그는 노력하게 됩니다(18:38-39). 유월절 명절이면 중죄인 한 사람을 사면시켜주는 관례가 있는데 그 전통을 활용해서라도 나사렛 예수를 석방하려고 합니다(18:39, 27:15-17). 그러나 유대교지도자들은 유대교인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빌라도의 의도를 좌절시키고 있습니다(18:40). 그러자 매를 매우 쳐서 놓아주겠다고 두 차례나 제안을 합니다(23:16, 22). 그러나 그 제안마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23:21, 23).

빌라도가 보기에는 유대인들은 일종의 장군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의 아들인 장군이 이 세상에 출현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자신들의 제국을 이 땅 위에 다시 패권국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들의 구세주가 될 장군을 그들은 다윗 왕의 후계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을 할 것입니다(1:41, 49). 그 뜻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유대인들이 독특한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희망 때문에 결코 강력한 외세에도 진심으로 굴복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사실을 로마총독인 빌라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나사렛 예수가 진짜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라면 유대교지도자들은 그를 자기에게 죽여달라고 보내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 반대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니고 오히려 장차 유대교의 분열을 몰고 올 위험인물이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총독의 힘을 빌려서 나사렛 예수를 처형하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의 대동단결보다는 분열이 훨씬 통치하기에 수월합니다. 따라서 구태여 처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속국의 종교문제, 특히 교권다툼과 교리분쟁에 대해서는 직접 개입을 아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괜히 원주민들의 종교적인 분쟁에 개입을 했다가는 그 후환이 만만치 아니한 것입니다.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이 종파간의 전쟁입니다. 국가간의 전쟁은 그 기본이 이익집단간의 다툼입니다. 그러므로 이익분배의 문제가 타협이 되면 휴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종파간의 전쟁은 이념투쟁입니다. 이념문제는 결코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가 강하다고 하여 결코 굴복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어놓고 내세를 바라보면서 끝까지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원주민들의 종교의 분쟁에는 결코 개입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기본원칙입니다.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속국에서 분쟁과 분란이 발생하게 되면 그것은 로마황제에게 보고가 될 것이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헤롯대왕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었던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인들과 분쟁이 있게 되자 그만 유대인들의 청원으로 AD 6년에 로마로 소환이 되고 말았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총독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로마총독인 빌라도는 그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그러한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지근거리인 시리아에는 예루살렘 총독보다 더 높은 직급의 로마총독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령이 있으면 언제라도 출동하여 자신을 연행할 수 있는 감찰관입니다. 그러므로 본디오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의 처형문제에 절대로 관여하고 싶지를 아니합니다. 예수는 로마제국에 아무런 위협이 되고 있지를 않다는 사실을 그가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진리의 나라의 왕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8:37). 이 세상에서 민족의 해방이나 패권을 도모하는 나라가 아닌데 로마제국의 통치에 무슨 위험이 될 것입니까? 그렇게 빌라도는 정확하게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18:36-38a). 그래서 그는 예수가 무죄라고 판결을 하고 있습니다(18:38b). 그렇지만 그의 판결을 유대교지도자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8:40, 27:20-24). 도리어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빌라도를 정치적인 곤경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유다의 왕으로 온 예수를 무죄로 방면하는 자는 로마의 황제에게 역심을 품고 있는 자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19:12). 기가 찰 노릇이지만 빌라도는 그들의 상소가 가지고 올 후환이 염려되기가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 총독의 소임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는 로마제국의 심장부로 진출을 하여 더 큰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고자 소원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신양명과 출세에 장애물이 될지도 모를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에 예수의 핏값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27:23-26).

 

바라바는 누구이며 그를 선택한 유대인들의 운명은 장차 어떻게 되는가?(18:40)

 

바라바에 대해서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각각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죄수”(27:16),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15:7),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23:19), “강도”(18:40) 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바라바는 민란의 주동자입니다. 둘째, 민란과정에서 살인, 강도 등의 범죄행위를 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바는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유대인들의 해방을 위하여 무장봉기를 했던 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독립투사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예수 대신에 독립투사 바라바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제국을 재건할 메시아를 아니 보내어주신다면 자신들은 바라바와 함께 자신들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유대인 사회에서 분란만 조장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불필요한 악입니다. 로마총독의 심판으로 처형됨으로써 나사렛 예수의 지지자들도 외세타도에 동참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열심히 정치적인 주판알을 퉁기고 있는 자들이 바로 유대교지도자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의 복음을 외면하고 선민들의 나라를 칼로써 되찾겠다고 바라바를 중심으로 다시 뭉치고 있는 유대인들의 말로는 비참합니다(18:11, 26:52-54). 유대인들은 로마가 자신들을 헬라인들보다 더 차별을 하고 있다고 가이샤라에서 민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무장투쟁노선이 예루살렘에서 점점 지지를 받기 시작합니다. 로마의 황제를 우상화하는 것은 유대교의 하나님 신앙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거룩한 목적으로 무장봉기에 나서지만 현실적으로 역부족입니다. AD 70년 무자비한 로마군대의 진압으로 백만 명 이상이 예루살렘에서 희생을 당하고 그들은 유대 땅에서 쫓겨납니다. 그 때부터 이천 년 가까운 세월을 이방 땅에 유민으로 떠돌게 됩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며 역사를 섭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선택은 언제나 칼이 아니라 십자가임을 역사가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