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53강(요19:17-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14. 01:55

요한복음 강해 제153(19:17-2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17()

 

십자가 처형장 골고다언덕의 의미(19:17)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게 되는 장소가 히브리어로 골고다언덕이며 그 의미는 해골이라고 사도 요한이 친절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9:17). 80세가 넘은 노인 사도 요한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그 십자가의 위치를 그렇게 단어의 뜻까지 밝혀가면서 적고 있는 것일까요? 그 깊은 의미를 묵상해보면 다음과 같이 성경적인 세 가지 의미가 나타납니다; 첫째, 예수님의 대속의 피가 그 땅에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해골골짜기에 묻혀있는 죽은 사람의 마른 뼈에 그 피가 적셔지고 있습니다. 영생하시는 독생자의 대속의 피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에스겔 선지자의 기록을 참조해볼 때, 그것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관련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37:1-14). 그 점을 예수님이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둘째, 아직 무덤 속에 들어가지는 아니하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해골이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데라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고향 갈대아 우르지역을 떠나서 목적지 가나안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좋은 땅 하란을 만나게 되자 그만 그곳에 안주하고 맙니다(11:31). 그의 나이 145세 때 장자인 아브람과 장손인 롯이 그를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남진합니다(11:26, 12:4). 그렇지만 데라는 205세 향년을 맞이할 때까지 60년 동안이나 하란 땅에서 움직이지를 아니했습니다(11:32).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훗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집사 스데반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7:4). 인간의 눈으로 보면, 데라는 60년 동안 멀쩡하게 하란 땅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미 죽어있는 해골에 불과합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속의 피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 해골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지으시는 새로운 성전의 장소가 골고다언덕입니다. 높은 언덕 예루살렘 성 안쪽에 예루살렘성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성전자리는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바로 그 장소 모리아 땅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대하3:1, 22:2). 그 성전을 내려다 보면서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이미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공언하신 예수님입니다(2:19-22). 예수님이 그 자리 골고다 언덕에서 죽고 그 시신이 인근 무덤에서 삼 일만에 부활을 합니다(19:31-20:18). 그 때 부활의 몸을 그곳에서 입게 됩니다(19:17, 19). 그러므로 새로운 성전이 이제는 해골골짜기에서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 그 해골이 예수님의 대속의 보혈의 은혜로 되살아나고 성령님의 강림하심과 내주하심으로 그 속사람 안에 성령의 전을 건설하게 되는 것입니다(8:1-2, 고전6:19-20).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성전을 그 몸 안에 모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새 언약의 시대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습니다. 그 획기적인 장소가 바로 골고다 언덕이라고 사도 요한이 여기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형수 두 사람과 함께 못 박히신 이유(19:18)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히실 때에 그 좌우편에 두 명의 사형수가 같이 처형이 되고 있습니다(19:18).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그들 사형수들의 구원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23:42-43). 둘째,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또 한 사람은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23:39-42). 회개를 한 사람에게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구원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23:43).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형수들 가운데 회개하는 자를 마지막까지 이 세상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게 됩니다.

더구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 비율이 2분의 1입니다. 똑 같은 비율이 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24:40-41). 구원을 받는 자는 남녀 공히 절반입니다. 그 황금의 비율이 마지막 골고다 언덕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그 순간까지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나는 어느 쪽 절반에 속하고 있는가를 늘 묵상해야만 할 것입니다. 어차피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수 중의 괴수가 아닙니까?(딤전1:15)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형을 당하는 자리에까지 예수님께서 오셔서 함께 십자가를 지시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무덤의 자리까지 따라 오셔서 부활의 은혜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좋으신 구원주를 주님으로 모시고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지 아니하면 과연 이 세상에서 누구를 동반자로 또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골고다 언덕은 참으로 묘한 곳입니다. 좀더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게 되는 그곳은 예루살렘 외곽이며 일종의 공동묘지지역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그리 넓은 지역이 아니며 땅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땅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는 개인묘지 대신에 공동묘지가 대세입니다. 그리고 매장이 아니라 굴속 안장으로 장례식을 하여 많은 시신을 한꺼번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말하자면, 예루살렘은 높은 고원지역이며 깊은 골짜기로 주변도시와 분리가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래서 그 옛날 다윗 왕이 여부스 족속에게서 시온산성을 빼앗을 때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외세의 침략이 불가능하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삼하5:6).  그러나 다윗은 시온산성 남쪽 기슭에 있는 기혼 샘물 쪽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불시에 성내로 잠입하여 그 지역을 정벌했습니다(삼하5:7-8).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차지하고자 하는 자는 그 물줄기를 따라서 전진을 해야만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도 그 샘물을 얻고자 하다가 메시아를 만나고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4:15, 29). 그 복음이 이제는 생명수와 보혈이 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흘러내리게 됩니다. 죽은 자들의 머리 위에 흘러내리면 지식이 새로워지고 그 죽은 영들이 소생할 것입니다.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인 이유(19:19-20)

 

빌라도는 끝까지 나사렛 예수를 사형에 처한 자신의 잘못을 면해보고자 합니다. 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며 백성들을 선동하여 로마의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이 정당하게 심판하여 사형에 처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를 십자가 위에 설치하는 것입니다(19:19). 그것도 헬라어, 라틴어, 그리고 히브리어 등 세 가지 언어로 기록함으로써 세상사람 누구나 읽어볼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입니다(19:20).

둘째, 나사렛 예수를 지지하는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신은 나사렛 예수를 무죄로 석방하려고 무척 노력을 했으나 유대교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압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좋은 방법이 나사렛 예수를 지지하는 자들이 해오는 요구를 가급적 긍정적으로 처리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쾌히 허락을 하고 있습니다(19:38).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정정해달라고 유대교지도자들이 요청하고 있는 이유(19:21-22)

 

유대교지도자들은 로마총독의 내심을 이미 읽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십자가 위에 큰 패를 붙이고 있는 저의를 간파하고 있습니다(19:19). 로마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라틴어로 적고, 이방인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헬라어로도 적고 있습니다. 뿐입니까? 나사렛 예수 일행까지 읽을 수 있도록 히브리어로도 적어 놓고 있습니다(19:20). 기본적으로, 유대교지도자들은 어지간하면 빌라도와 의견충돌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공식적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유대교인들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칠 것만 같습니다. 그 말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메시아를 뜻합니다. 로마의 세력을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야만 하는 메시아가 허무하게 십자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고 하면 유다의 백성들은 어디에다가 앞으로 희망을 두고 살아갈 것입니까?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기를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수정해주기를 청원하고 있습니다(19:21).

 하지만 로마총독 빌라도는 요지부동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지금 자신의 안위가 먼저입니다. 로마황제에 대한 뚜렷한 반역자임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로 국내외에 공시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변개하라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유다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데 나사렛 예수만이 자칭 그들의 왕이라고 떠들었다고 한다면 반란의 중심세력이 결코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세력도 없는 정신이상자를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자라고 판결하여 십자가에 처형까지 하고 있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본디오 빌라도의 체면은 무엇이 됩니까? 그것도 유대교지도자들과 어용으로 동원된 유대인들의 요구에 굴복을 한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19:6, 12, 15). 그렇게 심지가 약하고 통치력이 약한 자를 로마황제는 계속 로마총독의 자리에 있게 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그 문구를 단 한자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