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58강(요20:15-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19. 01:32

요한복음 강해 제158(20:15-1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22()

 

마리아의 관심사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사의 차이(20:15-18)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20:14). 마리아의 관심사가 예수님의 부활의 예언을 믿는 것이 아니었기에 당장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온통 사라진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굴 속을 자꾸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20:11). 그 때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 그 머리와 발이 놓여 있던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굴 속에서부터 마리아에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20:12-13);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을 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20:13). 바로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습니다.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자 동산지기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는 것입니다(20:14-15). 사도 요한은 그 자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그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전에 예수님과 그토록 친밀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추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번에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한 가지 이유가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사와 마리아의 관심사와의 차이입니다. 그 점이 본문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마리아가 그 사람을 동산지기인 줄 알고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20:15). 그녀의 관심사는 인간 예수에 대한 것입니다. 이제 돌아가셨으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남기신 시신이 그녀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사라져버린 그 시신을 찾아서 고이 모시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사는 전혀 다릅니다. 사라져버린 시신에 신경을 쓸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20:17).

둘째로,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제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과 승천의 소식을 빨리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 제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이제는 제자들의 하나님이 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무덤 속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복음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고서 제자로서의 한 평생을 살아가는 자는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고 승천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빨리 전하고 그들이 그러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굴 속만을 쳐다보면서 사라진 시신을 찾아서 모시겠다는 사명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닌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생전의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를 지내도록 내어 버려두고 제자들은 남은 세월을 천국만을 바라보고서 전진하고 또 전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8:22).

 

마리아를 부르고 있는 예수님의 두 가지 음성(20:15-16)

 

유심히 살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가지 명칭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 가운데 드러나고 있습니다(20:15).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마리아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0:16a). 예수님이 마리아야라고 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에 그녀는 예수님이신 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십니까?라는 의미를 담아서 랍오니?라고 확인하고 있습니다(20:16b).

여자여라고 부르는 경우와 마리아야라고 그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경우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호칭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호칭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제1장과 제2장에서부터 그와 같은 차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만드시고 그냥 남자여자라고 호칭을 하고 있습니다(1:26-27). 비록 그들에게 세상적인 복을 주셨지만 여전히 그들은 남자와 여자라는 집단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1:28-31). 한 마디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창세기 제1장의 기록의 특징입니다. 반면에, 창세기 제2장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이 아담아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아담을 옮겨와서 동거하시면서 하나님의 청지기로 양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반려자까지 창조해주고 있습니다. 아담의 아내인 하와의 탄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사랑의 가정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아담하와의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청지기의 신앙이 대물림을 하게 됩니다.

보통 아담의 말의 뜻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아담은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당사자와의 친밀감을 표현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냥 집단에 속한 하나로 호칭할  때에는 남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여자여라는 것은 보통명사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부를 때 그냥 사용하는 호칭에 불과합니다. 피조물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창조주를 즉석에서 알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그 호칭을 듣고서 그저 동산지기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야라고 정답게 불러 주었을 때에는 개인적인 친밀감이 전해져 왔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생전에 불러 주었던 선생님 예수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확인작업에 들어갑니다; “선생님, 예수 당신이 맞습니까?”(20:16).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은 놀라운 반문입니다. 그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20:17).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지금 마리아를 부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는 시신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무덤 굴 앞에서 바보처럼 울고 서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길을 따라 자신의 인생도 그렇게 살아가면 됩니다(20:18).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마련해놓으신 구원과 영생의 길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그 놀라운 메시지가 마리아야라고 정답게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서부터 온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20:16). 그 목소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올 때 복음을 믿는 자는 자신의 무덤은 사라지고 하늘이 열리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5:24). 팔을 벌리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천국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밝히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10:21). 3천년 전에 다윗이 이미 그 눈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 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110:1). 주님의 옆 자리가 우리 성도들이 차지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이 세상의 임금과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역사로 패배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맛보는 성도들의 승리입니다(16:33).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20:17-18)

 

부활하신 예수님이 새로운 육체를 입고 있습니다. 부활의 몸입니다. 그 몸은 예수님과 함께 승천을 할 것입니다(24:50-51). 그리고 오순절 날 성령님이 강림하게 됩니다(2:1-4). 영이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임재하여 역사하시게 되면 승천하신 주님도 영적으로 제자들에게 내주하여 역사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 점을 요한복음 제14장과 사도행전 제16장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7-18),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16:6-7).

예수님은 완전한 부활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시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할 수만 있다면 동시에 수 많은 제자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체휼하신 바를 가지고 성도들의 앞길을 잘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유익을 주기 위하여 성령님을 먼저 보내시고 뒤따라 성도들의 몸 속에 마련되어 있는 성전에 자리를 함께하고 계신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고전3:16, 6:19-20). 그와 같은 역사가 이를 때까지 당장은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20:17).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만이 주님을 독점하고 있다고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제자와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동시에 임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몸이 승천하여 다시 이 세상에 영적으로 왔을 때에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동시 임재가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다음의 말씀을 가지고 정확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