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제159강(요20:19-2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8월 23일(금)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요20:19),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20),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23)
예수님이 안식일 후 첫날 새벽에 무덤에서 부활을 했습니다. 그 점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의사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돌아 가시기 직전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맡기고 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졌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45-46).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구별하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면서 예수님이 운명하고 있는 광경입니다. 지성소의 언약궤와 그 뚜껑인 속죄소 안에서 모세의 돌판 가운데 조용하게 말씀으로 존재하고 계시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는 휘장을 찢어버리시고 역사의 한복판으로 나오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첫 번째의 실력행사가 예수님의 영혼을 맡으시고 음부의 세력을 깨뜨리시고 삼일만에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육체를 벗겨버리고 영생하는 부활의 몸을 입혀준 것입니다(고전15:44, 고후5:1-10).
그와 같은 놀라운 부활의 능력이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도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전15:20-21). 다만, 그 부활의 능력이 언제 작동하게 되는가 하는 점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남기신 다음 말씀이 참고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7-8).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 지상명령을 실천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 죽음의 몸을 벗고 부활에 이르게 되는 때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막달라 마리아가 사도들에게 전달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유대교인들이 무서워서 숨어서 지내고 있습니다(요20:19). 스승님을 십자가에 처형해버린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 그리고 유대교의 행동대원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제는 스승님에 이어서 언제 자신들을 체포하여 사형을 시켜버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줄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손수 보여주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그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있는 예루살렘의 은신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모인 집의 모든 문들을 철통같이 닫아 걸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몸을 입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는 장애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영생하는 부활의 몸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며 영적인 능력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몸이기 때문입니다(요20:19). 이제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평강으로 바꾸어주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 점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몇 가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로,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20). 십자가에 못이 박힐 때에 손목과 발목에 관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으로 찌를 때에 옆구리에 구멍이 났습니다.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후 사정을 이해시키고 예수님이 지금의 주님이신 것을 믿게 하는데 가장 효과적이고도 빠른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몸은 그 형태가 시공간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속도를 뛰어넘거나 공간을 통과하기 위하여 그 형태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부활 전의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세심하신 배려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난 33년 동안 인간으로 살아 보셨기에 사람의 생각과 인식의 방법이 어떠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 결과 제자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이해를 시키고 있는 진풍경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파송하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온 세상에 파송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요20:21). 파송을 시키는 자가 주인입니다. 파송을 받는 자는 종입니다. 주인은 종을 그냥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두 가지 조치를 해줍니다; 첫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파송자가 되시며 모든 제자들의 남은 인생의 주인님이 되시는 부활의 주님께서 그 조치를 취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 주인의 눈이 종의 발걸음에 함께합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요16:32). 제자들의 앞길에는 주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요14:18-20, 행16:7). 그래서 종들의 짐이 가벼워집니다(마11:28-30). 사명을 감당하면서 평안을 느끼게 됩니다(요20:19).
셋째로, 성령님의 임재가 있게 되면 엄청난 능력이 부여됩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너무나 엄청난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구원과 멸망이 제자들의 발걸음과 말씀의 선포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판가름이 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감정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영성도 이성도 모두가 불안정합니다. 의지마저 약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중대한 결정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담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사도 요한이 이미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2-33).
예수님도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에 십자가의 처형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 아버지께 그 극형만은 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원의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응답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마지막 기도를 드리시고 난 후에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평안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약한 인간의 몸이지만 그 속에, 그 영혼 속에 임재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영을 강하게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 함께 인생을 살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느끼고 인식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미 창조주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죽음의 두려움까지 물리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지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환난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평안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인생입니다. 심부름을 올바르게 하고 있는 종은 주인의 보호를 확실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임재하시고 늘 동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명을 잊어버리고 딴 짓을 하게 되면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오고 세상의 환난에 휩쓸려버릴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구원과 멸망의 선포는 사명자의 입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종이 주인의 지배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행한 것이면 그것은 즉시 무효가 되고 말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주님께서 제자와 성도가 제멋대로 행한 일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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