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63강(요21:20-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24. 01:08

요한복음 강해 제163(21:20-2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826()

 

베드로가 사도 요한의 훗날에 대하여 관심을 보인 이유는 무엇인가?(21:20-21)

 

첫째로, 베드로가 요한과 가장 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형제는 예수님의 수행제자의 역할을 도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 세 사람을 주로 대동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상에 갔을 때에도 그들 세 사람의 제자를 끝까지 대동했습니다(9:2). 마지막 기도를 드리러 감람산에 갔을 때에도 그들 세 사람을 가장 가까이까지 데리고 갔습니다(14:33). 그러므로 열두 사도 가운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세 사람이 최측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주로 베드로와 요한이 같은 팀입니다. 예수님이 나이가 많은 베드로에게 막내인 요한을 잘 보살펴주라고 부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은 참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자연히 사도 요한이 이 글을 쓰면서 친한 베드로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베드로가 평소 요한과 코드가 맞기 때문에 요한의 미래도 자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지레 짐작을 하고서 그 점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21:21). 열두 사도 가운데 베드로가 가장 나이가 많다고 합니다. 반면에 사도 요한이 막내입니다. 그런데 연장자인 베드로와 최연소자인 요한이 서로 코드가 맞아서 짝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더라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던 앉은뱅이를 고쳐줍니다(3:1-10).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이 최선봉에 서서 예루살렘의 유대인 전도에 가장 열심이었기에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4:13). 두 사람은 학문이 없기가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은 있으나 학문이 없기에 서로 배짱이 맞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자기가 궁금한 사항을 참지를 못하고 막내인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께 묻는데 익숙합니다. 예를 들면, 마지막 만찬자리에서 베드로가 요한에게 누가 스승님을 배신하고 팔 자인지를 물어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13:24-25). 이제 마지막 장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스승으로부터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예언의 내용이 별로 좋지를 못합니다. 늙어서는 남들에게 이끌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끌려간다는 것입니다(21:18).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습관적으로 요한의 장래에 대하여 궁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21:20-21).

 

예수님의 답변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21:22)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1:22). 성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남은 인생을 살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남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타고난 재능이 각각 다른 것이기에 그것의 양을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두 배의 이익을 남기면 되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종들은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로 재능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주인이 원하는 것은 같은 비율의 이문입니다. 가진 재능을 200%로 발휘하면 그것으로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25:20-23). 둘째, 남은 인생을 모두 주님에게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과 장수함이 모두 하나님께 속하고 있습니다(30:20).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오래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나 짧게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나 그 길이를 가지고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길게 살게 하거나 짧게 살게 하거나 모두 주님의 필요에 따라서 결정하실 것인데 종이 그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1:7). 셋째,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만 잘 감당하면 됩니다. 그것이 사명의 완수입니다. 구체적인 사명은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지역전도와 세계선교가 다릅니다. 설교하는 것과 말씀을 차분하게 가르치는 것이 다릅니다. 목회를 하는 것과 연구를 하는 것이 다릅니다. 요컨대, 분담과 협력이 다 함께 필요합니다(8:28). 그것을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조정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하라고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21:22).

 

그 말씀을 들은 여러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이며 사도 요한의 진술은 무엇인가?(21:23)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21:22)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서 사도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21:23). 대체적인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사도 요한은 죽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냐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요한은 그 생각에 동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지금 자신만이 마지막 사도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80대의 노인이 되어 있으며 이 세상을 하직할 날이 매우 가까운데 아직 세상의 종말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소식이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한 자신이 확인해줄 수 있는 확실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난 자로서 지상명령을 수행하게 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 잔류하게 되는 시간의 길이의 장단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천국에 모든 것이 예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에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를 결정하는 것은 제자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파견을 받은 종이 사명만 감당하면 되지 임기에 너무 신경을 쓸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언제 떠나도 여한이 없도록 사명감당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이 모범답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