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난 신구약의 인물들(손진길 작성)

86. 마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2. 15:49

86. 마가

 

(1)   흔히들 인생에는 세 번의 중요한 만남이 있다고 한다. 부모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배필과의 만남이 그것일 것이다. 그런데 인생 가운데에는 영적 성숙의 계기가 되는 세 번의 큰 만남이 있다. 마가의 경우를 보면 분명히 그러했다. 첫 번째는, 나사렛 예수와의 만남이었다(14:51-52). 두 번째는, 사도 바울과의 만남이었다(13:5). 세 번째는, 사도 베드로와의 개인적인 만남이었다(벧전5:13). 먼저 예루살렘의 부잣집에서 고이 자란 약관의 청년 마가가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만났는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마가는 동네 우물에서 물 한 동이를 길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나사렛 예수의 제자 두 사람을 만났다(14:12-16). 그들이 스승 예수와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을 수 있는 큰 다락방을 원한다고 하므로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에게 안내했다. 그 결과 그날 저녁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행해지게 되었다. 청년 마가는 아래층에 자기 방이 있었으나 그 날 저녁에는 이층 다락방에 자주 심부름을 다녔다. 그들 일행 13명의 유월절 만찬에 사용되는 음식과 그릇들을 날라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틈틈히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식사 도중에 나사렛 예수가 제자들에게 성찬식을 베푸는 광경도 보았고(14:22-25) 가룟 유다에 대하여 예언하는 말씀도 얻어 듣게 되었다(14:18-21). 마음이 이상해졌다. 마가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예언적 이야기와 상징적 이야기가 그 날 풍성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행동과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아직도 젊은 나이의 마가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그 밤 만찬이 끝난 후 자기 방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마가는 예수가 감람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려고 나가실 때에 급하게 일어나 홑이불만을 몸에 두른 채 먼발치에서 그들을 따라갔다(14:26-32).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세 사람만 데리고 올리브 숲 깊이 들어가시는 광경까지 보게 되었다(14:33-42). 뿐만 아니라 감람산에서 돌아오시는 도중에 무장한 세력들에게 예수님이 잡혀가시는 것을 보고서 그 뒤를 쫓다가 하마터면 그들 괴한들에게 잡힐 뻔하기도 했다(14:43-52). 그 날 저녁과 밤의 특이한 경험이 그 후 마가의 인생을 크게 뒤바꿀 줄은 당시에는 미처 몰랐다.

(2)   마가는 두 가지 문화권에서 자라고 성장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중해의 섬 구브로였다. 구브로섬은 그리스와 로마의 배가 마지막으로 정박했다가 중동 땅으로 들어가는 곳이었다. 따라서 그 곳에서 마가는 헬라식 교육을 받고 동시에 로마인들의 말인 라틴어까지 배우게 되었다. 그의 이름도 당시 로마 제국시대이므로 로마식 이름으로 마가였다. 그렇지만 집에 들어오면 또다른 문화가 있었다. 어머니 마리아와 외삼촌 바나바가 철저한 유대교인인 레위 지파였다(4:36, 4:10). 그래서 외가의 영향으로 마가는 율법과 유대교 사상을 엄하게 교육받았다. 그리고 집에서 사용되는 이름도 히브리식 이름인 요한이었다(13:5, 13, 15:37). 구브로 섬은 동과 철 같은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지중해 해산물이 풍성했으며 무역의 중개지역이었다. 그러므로 구브로 섬에서 일찌기 장사에 눈을 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훗날 외삼촌 바나바는 재산을 일부 정리하여 큰 돈을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헌납할 수가 있었다(4:37). 그런데 어머니 마리아는 더 장사수완이 좋았으며 아들 마가의 교육에도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그녀는 구브로에서 큰 돈을 벌자 남편과 아들 마가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조상들의 땅 예루살렘에서 아들 마가를 확실하게 히브리인 요한으로 키웠다. 유대 문화와 사상에 깊이 뿌리박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친척들이 구브로 섬에서 예루살렘에 들렀을 때에 항상 그녀의 집에서 마음놓고 쉬어갈 수 있도록 아예 손님용 다락방이 이층에 별도로 자리잡고 있는 넓고도 큰 집을 사서 살았다. 이와 같이 현명하고 친척 순례자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던 어머니 마리아와 이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던 아버지(14:14) 덕택에 마가인 요한은 젊어서부터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제자가 되어 평생을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밤에 잡혀간 예수가 날이 밝자 오전 9시경에 전격적으로 골고다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 날 오후에 바로 운명하였다는 기막힌 소식을 유월절날 저녁에 요한은 똑똑히 듣고 있었다. 어젯밤에 자신이 만찬준비를 해주었는데 그 주인공이 하루만에 사형당하고 말다니 정말 허무했다. 그가 과연 그만큼 무서운 죄인이었던가? 도저히 납득이 되지를 아니했다. 그래서 마가는 갈릴리에서 온 예수의 친척들과 제자들이 예수의 무덤을 왕래하면서 그의 집 다락방에 머물고 있는 동안 줄곳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제3일이 되는 날 예수의 무덤에 다녀온 갈릴리 여자들, 곧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숙모와 막달라 마리아 등이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예수님이 그의 예언대로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 소식에 누구보다 마가가 놀랐다. 왜냐 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세 차례나 부활 예언을 들은 바 있지만(9:9, 31, 10:34) 마가는 금시초문(今時初聞)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부터 마가라 하는 요한의 인생이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40일간 그 분을 쫓아다니면서 천국복음을 들었다. 승천후 10일만에 자신의 집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오순절 성령강림을 맞이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앞장선 예루살렘과 온 유다 땅 전도에 합류하게 되었다. 마가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젊은 일꾼으로 성장했다. 그렇지만 마가의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아니했다. 부잣집 청년이며 여전히 학문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혼자서 멀리 여행을 한다거나 돌아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아니했다. 한 마디로,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조용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실라와 바사바 유다처럼 힘있는 초대교회의 젊은 리더가 되지는 못했다(15:22). 그렇지만 마가의 어학실력과 문장력은 뛰어났다. 그는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 등 모두에 정통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가는 부친이 별세하시고나자 틈틈히 어머니의 사업을 도와야 했다. 구브로 섬과 예루살렘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가는 30세중반이 될 때까지 예루살렘과 구브로 섬 사이를 오가면서 바쁘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구브로 섬으로 외삼촌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을 왔다(13:4). 그 곳에서 다짜고짜 외삼촌이 그를 끌고다니기 시작했다(13:5). 길 안내와 사람 안내를 하라는 것이었다. 섬 동쪽 살라미에서부터 서쪽 바보에 이르기까지 안내했다(13:5-12). 외삼촌는 그를 끌고서 터어키 땅 밤빌리아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도 전지역을 선교해야된다는 것이었다. 마가는 기가 막혔다. 구브로 섬과 예루살렘에서는 자신이 처리해야만하는 일이 산더미같이 밀려있는데 어찌 그들만 쫓아다니고 있을 것인가? 마가는 며칠 더 쫓아다니다가 버가에서 결단을 내렸다. 그만 외삼촌에게만 통보하고 되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그는 아직 남은 생을 그렇게 선교 여행에 모두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있지 아니했다. 무역으로 더 큰 돈을 벌게되면 초대교회의 선교팀을 재정적으로 돕는 것이 자신의 일인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4)   나이 마흔이 되자 마가는 인생이 허무했다. 돈은 많이 벌었다. 가정도 화목했다. 자녀도 잘 성장했으며 자기 길들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남은 자신의 생은 어찌할 것인가? 너무 일찍 성공하고 자녀 뒤치다거리도 어느 정도 끝나고나자 자기자신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후회스러웠다. 오년 전 그 때 그렇게 선교여행에서 도중하차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까지 경험했던 축복받은 자신의 인생이 그만 지난 세월 너무 안이하게 생업에만 매달려서 살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선교현장을 떠나있지만 재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그리고 더 크게 지원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인생의 의미가 다 메꾸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2선의 물질적 후원보다 이제는 자기 인생자체의 헌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가는 결단을 내렸다. 2차 선교여행을 준비하고자 예루살렘에 들른 외삼촌 바나바와 사도 바울에게 매어달렸다. 그리고 안디옥까지 그들을 뒤쫓아갔다(15:4, 35-37). 그러나 사도 바울의 시선은 차가왔다. 다행히 외삼촌이 그를 변호해주었으나 바울은 이에 동의하지 아니했다. 결국 자기 때문에 팀이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15:37-41). 마가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외삼촌이나 사도 바울이 자신보다 열 살쯤 연상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엄청난 영적 스승들이었다. 마가 자신 때문에 그 어른들이 결별되고 말았다. 마가는 그들을 화해시키고 자신도 그들만큼 영적 스승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마가는 남은 인생을 철저하게 영적 성숙과 이방 선교에 매어달렸다. 이 일은 개인적으로 사도 베드로의 통역자와 대필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모두 가능해졌다. 베드로의 선교여행에는 항상 마가가 따라다녔다. 마가의 놀라운 영적 성숙을 보고서 베드로는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마가를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라고 불렀다(벧전5:13). 그리스 로마에 이르기까지 선교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던 사도 바울도 마가의 변화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왔을 때에는 마가에게 도움을 청했다(4:10, 딤후4:11). 왜냐하면, 마가가 라틴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틴어와 헬라어를 동시에 사용하여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등 마가의 언어적 감각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의 판단은 옳았다. 사도 베드로가 훈련시킨 마가는 그들의 사후에 놀라운 일을 행했다. 그가 직접 경험하고 사도들이 전해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을 인류 최초로 집대성하여 복음서로 펴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애굽에 이르기까지 선교했으며 애굽인들의 곱틱어로 복음을 전해주었다. 요컨대, 곱틱 교회의 아버지, 알렉산드리아 교황청의 초대 교황으로까지 불리게되는 마가의 말년의 성취는 분명히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작품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