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의사 누가
(1) 누가는 시리아 안디옥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지고 있다(눅1:3, 행1:1).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들이 성경말씀으로 정확하게 입증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가 유대인이 아니라 완전한 헬라인인지 아니면 교포인 헬라파 유대인인지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성경적 언급이 없다. 그렇지만 바울서신에 나타나고 있는 그의 행적과 직업을 참고해본다면(골4:14, 딤후4:11, 몬1:24), 누가가 두 글의 저자일 가능성은 농후하다. 먼저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라는 사실은 “딤후4:11”말씀에 의하여 상당히 뒷받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AD 66-67년경 로마 감옥에 재수감되어 그의 마지막 서신서인 디모데후서를 쓰고 있을 때 그의 곁에는 유일하게 주치의이자 동역자인 누가만이 남아 있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AD 60년경 로마에 도착한 사도 바울이 두 해동안 셋집에 거주하면서 그 곳에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까지 넉넉하게 사도행전 말미에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의 그 후의 행적이 빠져있다. 전승으로 전해지고 있는 사도 바울의 제4차 선교여행(AD62-66)과 재수감 그리고 로마에서의 순교 등이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면 바울과 함께 끝까지 동행했던 의사 누가가 왜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한 것일까?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로마에서 바울과 함께 지냈던 동역자들이 의사 누가 이외에도 여러 명 있었기에 반드시 누가가 사도행전의 저자일 수 밖에 없다고 한 마디로 말하기는 힘든 것이다. 그렇지만 끝까지 로마에서 바울과 함께 생활했던 의사 누가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누가가 사도행전의 저자라고 보고서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와같은 입장에서 누가가 사도행전기록을 사도 바울의 로마입성과 그의 가택연금까지로 한정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저자 누가가 더 이상 사도들의 행적을 공식적으로 보고해주어야할 윗선이 갑자기 사라져버렸거나 아니면 로마에서 순교당하는 바울의 모습보다는 감옥생활이라는 고난속에서도 천국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생전의 모습이 더 소중했기때문일 것이다.
(2)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의 기록자라면 누가복음서의 저자도 의사 누가일 것이다. 그 이유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고하는 편지형식의 글”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데오빌로 각하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역시 암중모색을 해야한다. 문자적 해석만으로 본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분이 높으신 분”이다(눅1:4). 그러나 “데오”를 일반 종교적 신의 의미로, 그리고 “빌로”를 철학이나 학문에 대한 사랑의 의미로 새겨본다면 “데오빌로 각하”는 로마 제국의 실력자 또는 중동 전체를 관할하고 있는 당시 시리아 총독부내의 실권자로서 특별히 식민지역 현지인들의 종교와 사상에 관심이 많거나 이를 직책상 검열하고 있었던 고위 관직자를 의미하게된다. 이 경우에는 의사 누가의 표면적 신분과 내적 신분이 이중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기록과 관련하여 누가가 정통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동시에 능통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왜냐 하면, 누가복음 서문이 신약성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고전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고 또한 제1장후반에서 제2장까지의 운율이 역시 최고 수준의 히브리어 문학적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가 안디옥에서 사전에 두 가지 언어를 당시 최고 수준으로 습득하도록 교육받았을 뿐아니라 향후 유대 땅에서 실력있는 의사로 행세할 수 있도록 전문 직업교육까지 확실하게 받은 인물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는 것이다.
(3) 누가의 고향으로 알려지고 있는 안디옥은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그의 후계자가 된 네 명의 장군중 한 사람인 “셀류코스”(Seleucos)가 건설한 도시이다. 그는 시리아를 지배하게 되자 그의 부친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서 헬라식 신도시 안디옥을 오른테스강 하류에 건설했다. 안디옥은 지중해쪽 항구도시인 “셀루키아 피에리아”(Seleucia Pieria)와 이웃해 있어 유럽과 중동 사이의 해상무역을 통제하는 한편 지정학적으로 시리아로 통하는 관문을 강력하게 보호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헬라가 중동으로 진출한 최초의 유럽 제국이었기에 당연히 그리스인들은 유럽과 가까운 중동의 지중해쪽 연안지역을 중시한 것이다. 과거 대륙국가였던 시리아의 중심 도시 다메섹은 내륙 깊숙히 오른테스 강 상류쪽에 위치해 있었기에 자연히 쇠퇴하게 되었다. 헬라 제국의 뒤를 이은 로마 제국도 안디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곳에 대규모로 로마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동 전체를 관장하는 총독부를 세웠다. 그리고 시리아 총독으로는 실권을 가진 황제의 최측근을 파견했다. 시리아 총독의 권력이 막강하였다는 사실은 AD 36년경 시리아 비델리우스 총독이 이웃 땅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가야바를 직권으로 해임시키고 또한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여 당시 유다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를 로마로 소환시킨 역사적 실례만 보더라도 넉넉하게 짐작할 수 있다. 누가는 어릴 때부터 총명한 학생이었다. 그의 이름의 뜻 그대로 “총기가 빛나는” 학생이었다. 부모가 유대인 디아스포라였으므로 안디옥 총독부에서는 누가를 일찍 선발하여 영재교육을 시킨 후 예루살렘으로 진출시킨 것으로 보인다. 누가가 받은 교육은 언어적으로는 고급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히브리어였으며 직업적으로는 의료기술이었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와 헬라의 신학이였으며 총독부의 필요에 따라 각종 정보수집 교육까지 철저하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이 문체가 뛰어나고 문장력이 놀랍다. 평범한 의사의 기록이 아니고 문학적 언어적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은 사람의 글인 것이다. 둘째로, 예수의 족보를 독자적으로 추적하여 기록하고 있는데(눅3:23-38) 사도 마태의 기록분(마1:1-17)에 비해서 그 정보수집 능력이 월등한 것이다. 또한 나사렛 예수와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 부모들의 신원에 이르기까지 정밀 취재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그 탁월함이 보통 학자나 기자, 정보원의 능력 이상의 것이다. 셋째로, 사도행전에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과 관련하여 구브로 섬의 미신들, 소아시아와 길리기아의 여러 신들, 그리고 아테네와 데살로니가에 이르기까지 헬라의 신들과 우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전해듣거나 직접 보고서 기록하고 있는 누가의 견해가 탁월한 것이다. 평범한 종교인이 아니라 사전에 여러 헬라 세계의 신들에 대하여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자가 누가인 것이다. 끝으로, 의사 누가의 직업적 신뢰도는 사도 바울이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로 언급하고 있어(골4:14) 그의 의술의 전문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4) 의사 누가는 나사렛 예수 공생애 후반기에 헬라파 유대인 젊은이들이 제자로 많이 들어오자 그들과 친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누가만이 후반기 제자들이 중심이된 예수님의 70인 제자들, 그들의 사마리아 지역 전도여행 이야기를 싣고있기 때문이다(눅10:1-20).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그들중 7명이 집사로 선출되고(행6:1-6) 그 가운데 스데반이 제일 먼저 순교당했으며(행7장) 빌립이 사마리아 지역 선교에 성공하였고 또한 가사에서도 에디오피아 내시를 회심시켰다는 이야기(행8:5-13, 26-40, 21:8)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 누가가 그들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이며 개방주의적 입장에서 종교개혁에 관심이 많았음을 엿볼 수 있다. 누가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종교적 견해보다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종교적 시각을 선호하고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그의 견해는 그의 복음서와 역사서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열두 제자의 파송과 능력부여(눅9:1-6)에 이어서 70인의 제자 선발과 파송 그리고 똑같은 능력부여(눅10:1-16)를 기록함으로써 열두 제자에 국한된 능력과 권세부여가 아님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둘째,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120명의 제자가 똑같이 성령세례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행2:1-4). 셋째, 열두 사도 이외에 바울과 바나바를 “두 사도”라고 불렀으며(행13:43, 14:1, 3) 야고보를 위시한 여러 장로들이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열두 사도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행15:2, 4, 6-7, 13, 22-23, 21:18). 넷째, 이방지역 선교가 더욱 성공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도 안디옥교회에서 먼저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행11:26). 그리고 공식적으로 이방 선교팀을 결성하여 파송한 교회가 이방 지역 첫 교회였던 안디옥교회였슴을 말하고 있다(행13:2-3). 끝으로, 초대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과정과 결론이 세계선교를 위하여 유대주의 색채를 크게 희석해나가는 방향으로 기술되어지고 있다. 사도 베드로의 “로마인 백부장 고넬료 가정 회심이야기”(행10:1-11:18)가 총회의 분위기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행15:7-11). 예수의 친동생인 장로 야고보와 사촌동생인 시므온도(행15:13-21) 개방주의 입장에 서있으며 소장파 리더인 바사바 유다와 실라도 같은 의견이다(행15:22). 이와 같이 누가는 신이나서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상부보고서용으로 정보수집과 요인접근, 보고서 작성을 시작했는지 몰라도 그의 나중은 이렇게 자신의 뜻과 인생이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에 맞추어져서 신명나게 기록을 완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5) 누가는 특별한 용도와 의미에서 하나님이 예수님께 붙여준 제자이다. 누가의 전문성, 정보수집 능력, 헬라철학 및 학문세계, 로마정치, 행정, 교통에 대한 해박한 지식, 폭넓은 사교의 범위,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집념, 인간관계와 권력의 흐름까지 꿰뚫어보는 그의 능력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되어 사람을 사람대접해주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솔선수범을 의사 누가가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행적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여 가장 친근하게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가 만나고 그려내었던 예수가 어느듯 그의 진짜 스승이요 주님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마가의 다락방,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전도 여행, 초대 예루살렘교회, 이방 안디옥교회 등에 모두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에 합류하여 끝까지 바울을 쫓아다녔다. 그 방대한 기록이 누가복음이며 사도행전인 것이다. 그렇지만 의사 누가는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보고서용 기록에 전혀 삽입하지를 아니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실명을 드러내지 아니해야만 하는 상부보고용 비밀문건이기 때문에 그와같이 익명으로 보고했는지몰라도 나중에는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보고서를 하나님이 달리 사용하도록 이미 섭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누가복음이 사대 복음서중의 하나로 자리잡았고 사도행전이 신약에서 유일한 역사서로 정경 가운데 당당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익명성도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익명성이란 자신을 사용하신 하나님 그리고 스승 예수 그리스도, 그 쪽만을 쳐다보고서 이름도 없이 헌신하고 봉사했던 수많은 음지의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결코 익명으로 끝나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성경에 그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사도 바울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도록 조치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골4:14),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4:11). 나의 동역자 누가가 여러 성도들에게 문안하느니라(몬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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