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사도 바울
(1) 바울은 헬라식 이름이고 그의 유대식 이름은 사울이다. 이름이 두 개인 것처럼 그는 두 개의 문명권 사이에서 성장했다. 집 바깥에서는 헬라와 로마식 문명, 이른바 그레꼬 로마 문명이었고 집안에서는 히브리 문명이었던 것이다. 그의 고향 다소는 소아시아 길리기아(오늘날 터어키 남부)에 있는 작은 도시였지만 일찌기 로마를 위해서 공을 세운 이방인들에게 황제가 면세와 시민권 혜택을 준 바 있어 그 혜택을 받은 자들이 몰려살고 있었던 곳이었다(행21:39, 22:25-29). 더구나 그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교육시설이 잘 되어 있었던 도시였다. 그 곳에서 바울은 AD 1세기초에 그리스, 로마식 교육을 받았다(행21:37, 헬라말). 그리고 가정에서는 부모님으로부터 전통적인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 자녀에게 행하는 히브리식 교육을 받았다. 히브리 언어와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유대교 율법과 선민 사상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교육은 전통적인 유대인 콤뮤니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회당(synagogue)에서 차세대 교육으로 실시되어 부족한 가정교육을 철저하게 보완하고 있었다. 그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장래 진로문제를 두고서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소아시아에 그냥 살면서 그리스, 로마 문화권속에서 입신양명할 것인가? 아니면, 조상들의 유다 땅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에서 유대 사상을 더 공부할 것인가?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영특한 학생이었기에 더욱 신중하게 깊이 생각했다.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그는 세상적인 권력과 출세보다는 철학, 논리학, 사상, 종교 등에 심취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종교적이며 학자적인 성향에 따라 후자를 선택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유대식 이름 사울로 살아가고자 했다.
(2) 사울은 예루살렘의 랍비 가운데 가장 명성이 높았던 가말리엘의 문하에 들어갔다(행5:34, 22:3). 그의 제자가 되는 입문 시험이 쉽지는 아니했지만 사울은 평소 유다의 역사와 율법 그리고 유대교 기본 교리 및 사상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으며 그동안 공부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기에 거뜬히 합격했던 것이다. 그 때부터 거의 십 년동안 그는 율법과 유대교 사상을 철저하게 공부했다. 양피지에 기록되어있는 히브리 경전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헬라어를 알고 있었기에 칠십 인역(Septuagint)도 아울러 공부했다. 어느듯 이십대 후반의 나이가 되자 젊은 랍비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교포 출신인 유대인이었으므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나름대로 헬라 철학과 로마법에도 일가견이 있는 양수겸장의 유망한 청년 랍비였다. 그러나 그의 유대교 사상에 대한 탐닉과 조상들의 하나님, 한 분 뿐이신 여호와 하나님 신앙, 그리고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심취는 그 정도가 심했다. 다른 견해를 한 번 더 생각해본다거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리나 사상이 헛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접어두고서 그 때까지 바리새파의 큰 랍비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바를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고 있었다. 정확무오한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은 필요한 것이지만 인간인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젊은 랍비 사울의 고지식한 사고방식은 큰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교 이단으로 몰린 나사렛파 제자들의 탄압에 그가 앞장 섰기 때문이다. 그들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부활을 선전하면서 삼 년간 교세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이를 계속 두고보지 못하게된 유대교 수뇌부에서 응징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때 유대 교리의 진리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아니했던 열혈 랍비 사울이 그 탄압에 앞장 섰던 것이다(행22:3-4).
(3) 같은 교포 출신 유학생이지만 헬라파 유대인 사이에는 당시 세 파벌이 존재했다. 첫째, 유대교를 시대에 맞게 개혁해보고자 시도하는 조심스러운 개방파인 “힐렐파”. 둘째, 유대교 전통을 강하게 고집하는 근본주의 과격파인 “샴마이파”. 셋째, 전통 유대교를 떠나 만민 구원의 주창자인 예수를 추종하는 “나사렛파”였다. 그 가운데 샴마이파에 속하는 사울이 나사렛파에 속하는 스데반이나 빌립 그리고 의사 누가 등과 대립한 것이다(행6:5, 골4:14, 딤후4:11). 나사렛파의 집사 스데반은 AD 33년경 기독교 탄압 초기에 공적(公敵) 제1호가 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가장 강하게 유대교의 성전 문화와 율법주의를 비판했으며 선지자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처형해버린 유대교 지도자들의 잘못에 대하여 심히 질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행7:47-53). 대제사장 가야바가 스데반을 잡아들여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죄한 후 성난 군중들에게 내어주어 돌로 쳐죽이게 했다(행7:57-60). 그 불법적인(요18:31) 인민재판식 살해 현장에 사울이, 그것도 제일선에 서있었던 것이다(행7:58, 8:1, 22:20). 그리고 사울은 대제사장의 명을 받아 유대교를 떠나 이단 나사렛파에 합류한 유대인들을 무조건 잡아들여서 회당에서 매질하였으며 도망치는 기독교인들을 뒤쫓아 국경넘어 다메섹까지 그들을 잡으러 갔다(행8:1-3, 9:1-2, 22:5). 스승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율법과 유대교 사상을 절대시하면서 대제사장에게 충성하는 것이 유대교의 전통과 교리를 수호하는 길이며 개인적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고 이스라엘 민족이 번영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아니하고 있었던 사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큰 변화가 나타났다.
(4) 십자가 처형이라는 가장 저주스러운 죽임을 당한 바있는(신21:33) 나사렛 예수가 “부활의 주”로 환상 가운데 사울의 앞에 나타났다(행9:3-5, 22:6-8). 그 때 사울은 하늘 빛에 눈이 멀었으며 땅에 엎드리어 그 소리만을 들었다. 사흘후(행9:9) 당시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었던 기독교인 아나니아를 찾아가서 자신이 받은 환상과 계시가 무엇인지 그 내용을 확인했다. 아나니아 역시 동일한 환상과 계시를 받았으므로 사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사울의 눈을 뜨게 안수해주고 그의 회심을 확인한 후 세례까지 주었다. 그 때 사울은 눈을 떴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아나니아가 받은 계시와 대조해보고서 확인했다(행9:10-22, 22:10-16). 훗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울은 기도를 하다가 자신이 이방 사도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환상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재차 확인하게 된다(행22:17-21). 그 때부터 유대교인 사울은 자신의 헬라식 이름 바울을 사용하여 기독교인으로서 세계 선교에 나서게 된다. 스승 가말리엘의 문하를 떠나 본의 아니게 나사렛 예수를 부활의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모시게된 사도 바울!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환상과 계시는 그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가 오랜 묵상끝에 깨달은 절대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그 핵심만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다메섹 환상은 일찌기 구약의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을 때 직접 체험했던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한 환상 그대로이다. 그 환상 가운데 나타난 예수는 선지자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동시에 그 분은 재림의 주로 오시는 파루시아 그리스도이셨다. 그 분은 하나님의 영광인 빛 가운데 계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 그 때 그 분이 바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이심을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이시지만(신6:4, One God) 그 분은 동시에 그리스도안에 그리고 성령님안에 계셔서 선택된 자에게 동일한 계시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즉 삼위일체의 신비로 역사하시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요14:15-21, 17:3, 엡4:4-6, Unique God)이시다. 그 분이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사도로 선택하였기에 평생 그 일에 헌신하는 것이 이제 나의 남은 생에 유일한 목적이 된 것이다.”
(5) 사도 바울의 남은 생은 로마 제국의 길을 따라 세계 선교에 헌신한 것이었다. “다메섹-예루살렘-시리아 안디옥-에베소-빌립보-고린도-로마”에 이르는 먼거리를 도보로 여행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했다. 자신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정체와 그 분이 이루고자 하신 만민 구원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바울은 자신의 깨달음과 체험을 간증형식으로 전했기에 그의 복음설명은 힘이 있고 생생했다. 그리고 그가 일찌기 공부했던 헬라 철학과 수사학은 그의 말과 글에 논리성과 설득력을 부여해 주었다. 그가 유대인 디아스포라로서 로마 시민권자였으므로 그는 로마 제국내 어느 지방을 다니더라도 통행의 자유와 신분의 자유를 누렸다. 그가 세운 교회로부터 로마식의 후원자가(patron) 나타나 그의 선교 여행을 적극 후원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로마식의 협업(partnership)에 익숙한 바울은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던 선민사상, 율법정신, 성전문화, 언약의 의미, 선지자의 예언, 지혜서와 묵시록 등은 그의 깨달음을 쉽고도 풍성하게 전하도록 만들어주는 귀중한 모형들이며 교육 자재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많은 도시를 방문했으며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그렇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얻고자한 것은 많은 교회도 많은 업적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가 얻은 바 부활과 영생을 그도 하나님 아버지 품에서 얻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한 평생 이 세상에 살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신령한 하늘의 복이었다.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그의 남은 생도, 그가 이룩한 모든 업적도 이 땅에 두고서 떠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구원과 영생의 길이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었기에 그는 그 길만 선택했다(빌3:7-14). 그 외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모든 다른 생각은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 모든 다른 철학과 학문 그리고 종교적인 사상도 그 길 발견에 도움은 될지언정 궁극적인 부활과 영생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나 살리는 이의 능력은 아니었던 것이다(롬8:9-18). 그는 그가 가는 선교여행의 길도 하나님께 맡겼다. 그래서 죄인이 되어 험한 바닷길로 하여 오지로, 외딴 섬으로 옮겨지는 것도 마다하지 아니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서 받아들였다. 결론적으로 그와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믿음, 오로지 그것 한 가지만 가지고 온갖 세상적인 소유욕과 목회적인 야망 또는 지극히 이기적인 명예심까지 모두 물리치고서 한 평생을 깨끗하게 살다가 주님께로 돌아간 자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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