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패권(손진길 정치학박사)

동서양의 패권 13. 몽골제국의 후예와 중동지역 티무르제국의 패권(작성자; 손진길 박사)

손진길 2022. 3. 14. 06:31

동서양의 패권

 

13. 몽골제국의 후예와 중동지역 티무르제국의 패권(작성자; 손진길 박사)

 

주후 13세기에 중국 북방의 대평원에서 유목민들을 통합한 몽골족의 전쟁영웅 징기스칸의 군대가 서진하여 대평원 러시아 지역은 물론 중동지역의 회교권 국가들을 전부 정복하고 광활한 몽골제국을 그곳에 세운다. 그 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몽골제국은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3개의 칸국을 세우고 있다;

초원을 중시하고 있는 징기스칸이므로 그는 장남 주치에게 흑해와 카스피해 이북의 대 평원 곧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땅을 주고 있다. 따라서 장남의 가문이  킵차크한국의 지배세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징기스칸 사후에 장남인 주치는 징기스칸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모친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볼모가 되어 있을 때에 임신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거론하면서 차남 차가타이가 형과 주먹다짐을 하자 화가 난 징기스칸은 자신의 후계자로 삼남인 오고타이를 지목하게 된다. 사실 오고타이는 징기스칸의 아들 가운데 가장 지적이고 포용력이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오고타이는 부친의 사후에 스스로 대칸이 되어 몽골제국을 크게 발전시키게 된다. 오고타이 대칸이 몽골제국을 확장하고자 서방원정군을 편성할 때에 그곳 지리에 밝은 주치의 차남 바투를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바투의 서방원정군이 동유럽의 폴란드와 헝가리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거의 두 왕국을 정복하는 시기에 그만 회군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징기스칸의 뒤를 이은 3남 오코타이 대칸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대칸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유럽의 나라들이 살아남게 된다.

바투는 비록 서방원정군을 이끌고 회군하였지만 대칸의 자리를 얻지 못한다. 그 이유는 부친 주치의 혈통이 여전히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투는 킵차크한국으로 돌아와 그곳의 칸이 되고 만다. 그는 훗날 절친인 사촌 몽케를 지지하여 새로운 대칸이 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한편 오고타이와 구육의 뒤를 이어 새로운 대칸이 된 몽케는 징기스칸의 4남이며 막내인 톨루이의 아들이다. 그런데 몽케 대칸의 동생 가운데 2명의 영웅이 나타나고 있다. 동생 훌라구가 일한국을 세우고 스스로 칸이 되고 있으며 그 다음 동생 쿠빌라이는 대칸이 되어 원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통일하여 원제국의 초대황제가 되기 때문이다.  

일한국의 영토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그곳은 옛날 페르시아제국의 땅으로서 그동안 이슬람왕국들이 차지하고 있던 곳이다. 그 지역을 완전 정복하여 훌라구가 일한국을 세운 것이다.

한편 징기스칸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차남 차가타이는 중앙아시아를 차지하고 그곳에 차가타이한국을 건설한다. 그와 흡사하게 대칸의 자리가 막내 집안으로 넘어가자 오고타이 대칸의 자손들은 몽골초원을 차지하고 그곳에 오고타이한국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몽골군대의 막강한 전투력에 의지하여 세계적인 제국을 형성하고 있던 몽골제국의 4개의 칸국과 원제국의 시대가 오래 가지를 못한다. 그 이유가 크게 보아 두가지이다; 하나는, 몽골제국의 지배세력인 유목민의 수가 피지배민족의 수보다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몽골병의 전투력의 핵심인 기마술과 궁술을 피지배민족들이 어느 사이에 터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주후 14세기에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이 중국의 원주민인 한족이다. 그들 가운데 영웅 주원장이 나타나서 한족의 반란군을 이끌고 원제국의 군대를 쳐부수고 만다. 원의 왕족과 귀족들이 처음에는 오고타이한국으로 피신하지만 나중에는 명나라 군대의 추격을 피하여 더 북쪽으로 도망치고 만다;

한편 그 옛날 페르시아의 영토이며 그 다음에는 이슬람제국이 다스리고 있던 중동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새로운 영웅이 나타나서 티무르제국을 건설하고 있다. 몽골제국의 칸국들 곧 차가타이한국, 킵차크한국, 일한국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나중에는 인도의 북부까지 점령하게 되는 대영웅의 이름이 티무르(AD 1336-1405)이다;

주후 13세기초에 징기스칸이 중국 북부의 몽골평원에서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에 버금가고 있는 정복자 티무르는 주후 14세기 후반에 차가타이한국이 다스리고 있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등장하고 있다. 징기스칸이 몽골족 출신인데 비해서 티무르는 그 부계로 보아 투르크족 출신이다;

그 옛날 돌궐족은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서돌궐이 중앙아시아 텐산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무슬림이 되고 술탄이 다스리는 왕국으로 변모한다. 그 세력이 커지자 서진하여 중동 이슬람왕국들을 정복하고 주후 11세기에 셀주크 투르크제국을 형성한다;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이 주후 11-13세기에 무려 200년에 걸쳐서 십자군 전쟁을 치루면서 그 힘이 약해지자 주후 13세기에 서진하는 몽골군대에 의하여 정복을 당하게 된다. 그에 따라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에 몽골제국의 칸들의 나라가 성립이 된 것이다.

그런데 주후 1369년이 되자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에서 33살인 티무르가 나타나 차가타이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투르크인들을 규합하고 있다. 그 세력이 커지자 티무르는 1370년부터 10년동안 차가타이한국을 정복하고 이어서 러시아에 자리잡고 있는 킵차크한국을 공격한다;

킵차크한국을 멀리 북방으로 몰아낸 다음에는 1380년부터 1404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그 옛날 페르시아지역과 이슬람제국의 영토를 당시 점령하고 있는 일한국을 정복하고 북부인도 델리까지 점령하게 된다. 그것이 티무르가 당대에 건설한 소위 티무르제국이다.

주후 1404년말 68세인 노 영웅 티무르는 자신의 모친이 몽골 징기스칸의 혈통임을 내세워 원제국을 정복하고자 2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동방 원정에 나선다. 그렇지만 14052월에 수도 사마르칸트의 먼 북방에 있는 당시 실크로드 제2의 도시인 오트라르에서 병사하고 만다.

티무르가 원정도중에 갑자기 서거하게 되자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을 겨우 수습하고 4남인 샤 루흐가 42년간 티무르제국을 다스리게 된다.

먼저 샤 루흐는 수도를 옮기는데 그것이 사마르칸트의 남서부인 헤라트이다;

 샤 류흐는 부친을 닮아 군사운용에 자질이 있어 나름대로 티무르제국을 재통합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샤 루흐는 부친 티무르와는 달리 동방의 명제국과 친선외교를 하면서 무역과 문화적 교류에 힘을 쓰고 있다.

특히 샤 루흐의 장남인 울룩 벡이 부친을 대신하여 사마르칸트 지역을 다스리면서 40년간 과학과 문예진흥에 큰 업적을 남기고 있다.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하여 소위 티무르제국의 문화적인 황금기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울룩 벡이 부친의 왕좌를 물려받자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티무르제국에 망조가 들고 있다. 재위 3년만에 울룩 벡이 왕자의 반란으로 죽고 말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걸작이다. 이슬람교를 따르지 아니하고 지나치게 세속화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티무르제국은 내부적으로 분열이 되고 대외적인 침략에 직면하고 만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우즈벡의 독립군들이 남진을 하고 서쪽의 오스만 투르크가 대대적으로 동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훗날 왕족 바부르가 남하하여 인도 북부에 무굴제국을 세우게 된다. 그것을 보고서 많은 티무르제국의 유민들이 무굴제국으로 피난을 가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가게 된다. 따라서 혹자는 무굴제국이 티무르제국의 뒤를 잇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제는 티무르가 어떻게 몽골제국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자신의 대제국을 건설할 수가 있었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티무르는 자신의 혈통이 부계는 투르크 계통이고 모계는 징기스칸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당시 우즈벡의 주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우즈벡 지방에서는 지배자가 징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와 차남인 차가타이의 후손들이고 피지배인은 투르크인들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티무르는 자신이 무슬림이며 이슬람 종교를 나라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우즈벡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또한 페르시아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 옛날 페르시아제국의 후손들과 그 문화에 동화가 된 페르시아계 백인들의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티무르는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차가타이한국의 몽골군대에서 지휘관으로 종사한 인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몽골군의 전술과 전략에 밝아 뛰어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티무르 군대에서는 차가타이 계통의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이 훗날 우즈베키스탄의 언어가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즈베키스탄은 티무르제국의 후손들을 남쪽으로 쫓아내면서 하나의 민족국가로 형성이 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자신들이 쫓아낸 티무르제국의 건설자인 티무르를 마치 우즈베키스탄의 영웅으로서 국부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인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티무르가 역사적으로 우즈벡의 땅에서 태어난 위대한 정복자이기에 그러한 영웅 대접을 오늘날 받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그 업적과 자질면에서 티무르는 그러한 영웅대접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한 인물인 것이다.  

참고로, 1299년에 소아시아 북서부에서 발생한 오스만 투르크가 1354년에 유럽으로 건너가 발칸반도를 점령하고 1453년에는 비잔틴의 동로마제국을 정복한다. 그리고 티무르제국의 말기에는 서쪽에서 밀고 들어온다;

 그 때문에 티무르제국의 멸망이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