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4강(창6:1-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9월 19(목)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관계(창6:1-2)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족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인의 족보와(창4:16-24) 셋의 족보(창4:25-5:32)입니다. 다 같은 아담부부의 자손들인데 창세기는 카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두 집안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대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인간을 창조했습니다(창1:26-27). 그러나 아담의 아들들에게 그 형상과 모양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셋만이 아담의 형상을 닮아 있다고 창세기 제5장 제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형상은 셋의 가계를 통하여 유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타의 집안들은 모양은 사람이지만 하는 그들의 인생살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삶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둘째, 카인은 유배를 가서 자신의 아성을 짓고 그 성을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불렀으며 자손들에게 대물림하고 있습니다(창4:16-17). 그 반면에 셋은 아들 에노스를 낳고서 하나님 신앙을 대물림하고 있습니다(창4:26). 한 마디로, 유한한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대물림하는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셋째, 카인의 후손은 이름과 직업만 열거가 되고 있습니다(창4:18-22). 반면에 셋의 후손들은 자녀를 낳은 해와 그들의 향년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창5:3-32). 특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에녹과 노아의 행적을 적고 있습니다(창5:21-24, 6:8-10). 그러나 카인의 후손의 경우에는 5대째 라멕의 대에 오게 되면 죄악이 10배이상 증폭이 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일부일처제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입니다(창4:23-24).
위와 같은 차이 때문인지 창세기 제6장에 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사람의 집안’과 ‘하나님의 집안’의 구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카인의 후손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람의 집안’으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창6:1-2).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을 파수하고 있는 셋의 후손을 ‘하나님의 집안’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창6:2).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집안의 아들들’이 타락을 하고 있습니다(창6:2-7). 사람의 집안의 딸들이 너무 용모가 아름답게 태어나게 되자 그만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신앙보다는 여자의 외모의 아름다움에 끌리게 됩니다(창8:1-2). 한 마디로,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사람의 모양을 더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힘과 권력이 있으면 ‘일부일처제’라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여러 여자를 아내로 삼기 시작합니다(창2:20-25, 6:2). 이제는 결혼의 조건 가운데 하나님 신앙이라는 덕목이 사라지고 맙니다. 힘이 센 자는 아름다운 여자를 모두 차지합니다. 힘이 없는 자는 결혼도 할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맙니다. 요컨대 짐승의 사회와 같은 ‘약탈식 결혼’과 ‘약육강식의 사회’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 바 ‘육신이 된 사회’입니다. 영적인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이 전혀 구현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회를 떠나버리시게 됩니다(창6:3, 롬1:21-32).
하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생의 주인이며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는 절대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창6:5). 하나님 대신에 인간의 용맹함과 힘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힘이 센 거인 용사들 네피림이 존경의 대상이며 왕으로서 군림합니다(창6:4). 그 네피림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만들어낸 세상의 치리자들입니다(창6:4). 그들은 폭력을 조직화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힘이 약한 무죄한 자의 피가 땅을 적시게 됩니다. 동물들도 흉포화되고 맙니다(창6:12-13). 온 세상이 흉악한 모습만 보이게 되고 맙니다. 더 이상 그와 같은 세상을 존재하게 할 실익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홍수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삶에 탐닉하는 인간들에게 임하는 심판의 내용에 대한 시사(창6:3)
120년 후에 심판이 임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창6:3). 그 내용은 묘하게도 또 하나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수명이 보통 900년 이상(창5:5, 8, 11)이었는데 그것을 120년 정도로 끌어내린다는 뜻이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가 있은 다음에 나타나는 신 인류의 수명을 보면, 노아의 향년이 950세인데 비해서 그 아들 셈이 600세, 손자 아르박삿이 438세, 증손자 셀라가 433세 등으로 그 수명이 줄어듭니다(창9:29, 11:10-15). 마침내 9대손인 데라가 205세이고 10대손인 아브라함이 175세로 감소합니다(창11:26, 32, 25:7). 드디어 창세기를 끝내면서 모세는 요셉의 향년이 110세라고(창50:22)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서 모세는 자신의 향년이 120세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신34:7). 그러므로 모세오경 가운데 창세기를 기록하고 있는 모세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홍수심판 후 새로운 인류의 수명이 자신처럼 120세로 감소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인류의 수명이 그렇게 많이 줄어들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의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홍수심판이라고 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지형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장대비만이 40일간 땅으로 쏟아진 것이 아닙니다(창7:12). 70일 이상 해저지진이 발생을 하고 용암과 지하수가 동시에 땅 위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창7:11, 24, 8:1-3). 그 결과 홍수 이전에는 완전한 평지였던 땅의 모습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해보아야 15규빗으로서 7미터 남짓했는데(창7:20) 홍수 후에는 무려 해발 팔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히말리야 산맥에 즐비하게 나타나고 가장 깊은 태평양 바다에는 해저 삼천 미터나 되는 골짜기가 형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사해를 보더라도 해저 삼백 미터가 넘는 골짜기입니다. 그렇게 높은 산과 낮은 골짜기를 바람이 지나갈 때에는 큰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됩니다. 기상조건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일기의 변화가 극심해집니다. 무척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이 차례로 찾아옵니다. 그 영향으로 모든 생물들은 빠른 속도로 세포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 모든 세포의 수명이 단축되고 있습니다. 요컨대, 홍수심판의 결과 새로 생긴 땅에서는 먹거리가 줄어들고 수명이 줄어들며 사람들은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모진 환경에서도 먹고 사는 문제만은 여전히 해결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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