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5강(창6:5-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0. 15. 14:40

창세기 강해 제25(6:5-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920()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6:5)

 

이 세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인간의 감각기능을 통하여 인지를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른 바 오감이라고 하는 것 곧 시각, 취각, 미각, 청각, 촉각 등으로 확인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오감에 의존하여 얻어진 정보를 두뇌가 종합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일단 그 실체가 확인이 되면 그 다음에는 머리에 저장이 되어 있는 과학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그 물체를 분류하고 그 운동의 양상까지 계산해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두뇌의 작용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에 속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고 있는 판단기능과 연산의 기능인데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혼적인 작용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두되 뿐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혼적인 작용에는 감정과 자유의지가 포함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따듯한 심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간의 감정과 정서도 그 존재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서 마치 그 추상적인 것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도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지만 인간의 오감과 판단기능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혼을 통제하고 있는 영적인 차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적인 기능이 사람의 영혼 속 가장 깊숙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지성소와 성소의 구별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두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기에 하나로 합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합하여 하나의 성막이라고 부르듯이 영과 혼을 합하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의 존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 특히 그 영의 작용은 눈에 보이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나타나는 현상조차 마치 기적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11:1).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오늘 날도 말씀으로써 사람의 영과 혼과 육을 다스리고 있습니다(1:1-5, 4:12-13). 그리고 영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욥기와 주기도문이 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들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 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1:8-1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9-10).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운 용모만을 보고서 그 육체를 탐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모두 아내로 삼고 있습니다. 여인의 속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내심과 성품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육신만을 탐하는 그들은 믿음의 길에서 이미 떠나게 된 자들입니다. 그 결과 노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죄악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마음 속 생각과 계획이 모두 악할 뿐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지켜보시고 있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마음의 중심까지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에(삼상16:7)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은 절망적입니다. 구제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시고 전면적인 홍수심판으로 모두 쓸어버리기로 결심하십니다(6:5-7).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절망으로 몰고 가고 있는 사람의 마음 속 생각과 계획의 악함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선하게 창조가 되어 있는 인간이 어찌하여 그러한 악의 화신으로 둔갑이 되고 만 것일까요?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서는 그 원인을 규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계획의 악함만 가지고서 모든 것의 근본원인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람의 생각의 뿌리가 어디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본래 계획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 구체화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 바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가장 깊숙한 것, 그 영적인 실체가 그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선한 영과 악한 영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선한 영이라면 그 계획은 생명을 살리는 선한 것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죽이고 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악한 영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한 영을 사람의 영성과 생각 그리고 마음에서 도려내는 대수술이 시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수술을 고려하지 아니하시고 세상을 전면 심판하는 방향으로 결심을 굳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전면심판은 단 한번 노아의 홍수심판으로 끝납니다. 그 다음에는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둠으로써 자신에 대한 일종의 제어장치를 설치하고 있습니다(9:11-17). 그리고 악한 영을 도말함으로써 사람을 살려내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8:21, 2:23, 28). 그 실행이 약 2,500년 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으로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의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24:44-53, 2:5-11). 사탄의 머리를 깨뜨림으로써 악한 영들이 사람의 머리에 더 이상 악한 생각을 집어넣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3:15, 8:1-4). 그렇지만 그 도중에도 몇 번의 국지적인 심판이 역사 가운데 임하고 있습니다; 첫째,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임합니다(3:20). 둘째, 소돔과 고모라 등지에 불 심판이 임합니다(19:24-25). 셋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불신앙에 빠지자 모두 없애버리려고 시도하십니다(32:10, 14:11-12). 그 때마다 제한적인 징계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하는 백성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32:11-14, 14:19-25). 결국에는 그 걸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있습니다(11:29, 18:15, 18).

 

창조주의 한탄과 근심, 그리고 모두 쓸어버리기로 결심하심(6:6-7)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17:1). 후회, 한탄, 근심이라는 용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아니하시는 분이 바로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가 창세기에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5-7).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서 창조가 되어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 사람입니다(1:26). 그들만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구현할 수 있는 청지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생각과 행동이 패역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모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고 사탄의 화신인 뱀의 말을 더 신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의 속에 하나님처럼 전능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3:5-6).

만약에 그 욕망을 없애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때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존엄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의지도 존엄성도 없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와 같은 로봇에게서 하나님이 무슨 찬양과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무 것도 소용이 없으며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를 하고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 때에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실 수가 있습니다. 그 방법론을 마련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고민을 하시고 한탄도 하시고 근심도 하시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6:6). 그리고 전면적인 홍수심판이라고 하는 극약처방까지 동원이 되고 있습니다(6:7). 그렇지만 마침내 사람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론이 실행에 옮겨지게 됩니다. 독생자를 성육신시켜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 그 완전한 대속의 제사가 골고다 언덕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1:12-14, 3:12-21).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그 구원의 길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