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6강(창6:8-1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9월 21일(토)
노아의 가족만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는 이유와 예수님 일행(창6:8-10)
홍수심판의 와중에서 노아의 가족만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는 이유를 모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Noah was a righteous man, blameless among the people of his time, and he walked with God)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창6:8-10). 노아가 첫째, 의인이며 둘째 완전한 자이고 셋째, 하나님과 동행을 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 8명이 전부 방주를 타고서 구원함을 얻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창6:18, 8:16).
첫째로, 여기서 의인이라고 하는 말은 ‘the righteous’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때에 자신의 오른 쪽으로 분류를 하고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정확한 의미를 ‘양과 염소의 비유’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이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으로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25:31-37).
사도 바울 역시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서 의로움이 확정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랍비였던 시절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 복음은 유대교리와 선민사상을 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의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사도들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론은 선민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죄인인 이방인의 구원까지를 말하고 있습니다(행2:38-42). 나아가서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을 했으며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다고까지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요10:30, 행2:32-36). 참담한 신성모독이라고 당시 사울은 판단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행9:15-22).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옳다고 인정하셨으므로 감히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이 그 하나님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바울은 로마서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둘째로, ‘완전한 자’라고 하는 뜻은 창세기 제17장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은 자신의 전능하심으로 사람의 인생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하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사결정을 하고 그 말씀대로 행동을 하면 완전한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황이 급해지고 여건이 여의치 아니하게 되면 사람들은 마치 그 옛날 사울 왕처럼 당황해 하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잡으려고 합니다(삼상13:8-14).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멀리 계시는듯하며 당장 해결을 해야만 하는 문제는 눈덩이처럼 크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힘있는 사람들에게 뛰어갑니다. 그 힘을 빌리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해결을 기다리고 있기에는 너무 사정이 급한 것입니다. 당장 사람들에게 사정을 하고 남의 힘을 꾸어오게 되면 쉽게 문제가 해결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요? 당장의 문제는 해결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체질개선과 정상적인 해결방법이 아닌 것이기에 얼마 후에는 더 큰 문제가 발생을 하게 됩니다(마12:45). 완전한 체질개선과 근본적인 해결책은 영생하시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고 사면초가(四面楚歌, 온 사방에 적군의 노래소리가 들림, 완전히 포위된 상태임)라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방법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출14:13). 그 때에야 자신을 추격해오던 원수들의 군대가 모두 수장(水葬, 물속에 장사를 지냄)되고 마는 현장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옛날 모세의 때처럼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제는 자신의 발로써 그 새로 생긴 마른 땅을 한걸음씩 걸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사는 자가 구원을 받은 경우가 이미 있습니다. 에녹이 그러한 자였습니다. 그는 65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습니다(창5:21-22). 365년간 하나님과 계속 동행을 하자 아예 그를 하나님이 휴거를 시켜주었습니다(창5:23-24). 노아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백 년 이상이나 걸리는 대규모 방주건립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습니다(창6:22). 사람들이 비웃거나 손가락질을 하여도 그는 개의치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는 것이 우선이지 사람들의 비웃음이 우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창7:5).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사력(死力, 죽을 힘)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잠이 깨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데 하루 하루의 인생을 모두 바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행하는 자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임재를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가 바로 하나님 말씀의 화신(化神, avataara)인 것입니다. 그러한 뜻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神)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요10:34-38). 창조주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 독생자가 이 땅에 성육신을 했습니다(요1:14).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고 열두 제자가 3년6개월간 동행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을 ‘신’이며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요10:35, 15:15).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이미 제자들에게 모두 전했으며 장차 진리의 성령님을 그들에게 보내어서 모든 말씀을 깨닫도록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동행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의 모습은 에녹이나 노아나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나 모두 동일합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대원칙이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그와 같은 하나님과의 동행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컨대,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역사가 오늘 날에도 계속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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