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8강(창6:15-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0. 16. 10:02

창세기 강해 제28(6:15-2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923()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가 300규빗, 너비는 50규빗, 높이는 30규빗이라(6:15)

 

방주의 규모가 실로 엄청납니다; “길이가 약135미터, 높이가 13.5미터, 폭이 23미터 정도입니다(6:15). 그리고 방주의 3분의 1이 물속에 잠긴다고 하더라도 물위에 삼층 높이의 건물이 세워지게 됩니다. 상중하 삼층에는 각각 위에서 1규빗 아래에 옆으로 창들을 내고 문들도 옆으로 내고 있습니다(6:16)”. 여기서  ‘1규빗이라고 하는 길이의 단위는 고대 사람들의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길이가 대략 45센티미터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규빗은 구약성경의 원문인 히브리어가 아닙니다. 히브리 원어는암마’(ammah)입니다. ‘암마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고대어의 하나인 아카드어 아마투’(ammatu)에서 온 것으로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규빗팔꿈치를 의미하고 있는 라틴어큐비툼’(cubitum)에서 따온 말입니다.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히브리어암마는 라틴어규빗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영어성경에서 그대로 규빗이라고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헬라어로 직접 기록이 된 신약성경을 보면 규빗은 헬라어로 페이콘’(πηχων)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21:17);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라틴어 규빗이 아니라 헬라어 단어인 페이콘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1규빗은 정확하게 어느 정도일까요?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 길이는 대략 ‘45센티미터입니다. 그 이유는 실로암 비문에 히스기야 왕의 도수(導水, 물을 끌어옴) 터널(tunnel)의 길이가 ‘1,200규빗으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길이를 측정해본 결과 ‘533.1미터였습니다. 그러므로 ‘1규빗  ‘44.425cm’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사용한 ‘1규빗의 길이는 바벨론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대략 45cm 내외를 ‘1규빗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성막 및 성전의 규모를 말하면서 그 길이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5-27, 왕상6-7, 대하3-4). 결론적으로, ‘1규빗을 약 45센티미터 또는18인치 정도로 보면, 방주는 길이가 약 135미터, 폭이 23미터, 높이가 약 13.5미터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의 다른 견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라가슈의 제사왕 구데아(Gudea, 주전 2000년경) 의상에 새겨진 척도표에 따르면, 1규빗은 지금 단위로 약49.5cm입니다. 그것은 보통의 규빗인데, 왕실에서 사용하는 규빗은 그보다 큰 55cm였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약 50.3센티미터에 해당하는왕실에서만 사용하는 규빗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척도표에서도 한 규빗은 45cm, 왕실 규빗은 55cm였습니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애굽 사람들은 약 67.5센티미터와 44.7센티미터에 해당하는 긴 규빗과 작은 규빗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일반 규빗과 왕실 규빗을 다르게 적용했던 것처럼 에스겔 선지자도 장대 규빗(long cubits)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장대 규빗은 보통의 규빗에 한 손바닥을 더한 것입니다. 즉 에스겔은 일곱 손바닥의 규빗을 쓰고 있습니다( 40:5). 이스라엘에서도 바벨론, 애굽과 마찬가지로 장ㆍ단의 규빗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 규빗은 45cm이고 장 규빗은 52cm로서, 애굽의 그것에 근접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이상의 내용은 창조신학연구소의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밝혀둡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의 치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노아가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치수를 정하여 방주를 짓게 되면, 홍수심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방주를 건립했을 경우에만 40일간의 폭우와 70일간의 지진과 지하수의 분출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은 한국의 창조과학회의 실험결과에서도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선박의 설계도를 주전25세기 노아의 시대에 벌써 하나님께서 밝혀두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 하나님 경외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하는 솔로몬 왕의 기록이 진리라고 하겠습니다(1:7, 9:10).

 

홍수심판으로 죽는 것과 죽지 아니하는 것, 그 구분의 의미(6:17-20)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동물을 크게 보아 세 가지로 창조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새의 종류입니다. 둘째는 육지를 달릴 수 있는 땅의 동물들입니다. 셋째는 물 속에서 살 수 있는 물고기 종류입니다”. 그 가운데 홍수심판으로 멸절이 되고 있는 것은 새와 땅의 짐승들입니다. 150일 동안 물이 온 땅을 뒤덮어버리자 땅 위의 짐승들이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죽고 맙니다(7:24, 8:3-4). 새들도 발을 디딜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오직 아가미로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물고기 종류들만이 생존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멸종을 당하게 되는 사람과 동물들의 종자를 보존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 8명과 동물들의 극소수를 선별하여 종류별로 방주에 태우게 됩니다(6:18-19). 암수를 짝을 이루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새 종류는 7쌍씩 방주로 나아오게 합니다(7:3). 땅의 동물들은 정결한 종자는 7쌍씩, 부정한 종자는 2쌍씩 역시 방주로 찾아오도록 만들고 있습니다(7:2). 그것들을 노아가 방주 내 여러 칸에 구분하여 싣고 있습니다(6:14-16, 19-20). 그 동물들의 사료도 함께 여러 칸에 적재하고 있는 것입니다(6:21)”.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온 세상에 대한 전면심판이라고 하더라도 종자의 보전에 신경을 쓰시고 있습니다(6:18-20). 그리고 땅이 흉포화된 것이지 바다가 부패한 것은 아닙니다. 물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 미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것이 물이라고 창세기가 기록하고 있습니다(1:2). 땅은 그 물을 빗물로 받아 들일 때에 부드러운 흙’(top soil)으로 변합니다. 그 부드러워진 흙이 비로서 공기를 통하게 하고 땅속에서 물을 통하여 양분을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부드러워진 흙이 식물을 자라나게 할 수 있는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생명을 얻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씨앗 역시 그와 같이 부드러워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13:23). 하나님의 나라가 그 온유한 마음 속에 임하는 것입니다(17:21).

 

식물성만 먹고 살게 되는 방주의 동물들이 의미하고 있는 것(6:21-22)

 

노아의 방주 내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방주가 튼튼하게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홍수심판을 완전히 견디기에는 부족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하늘에서는 마치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처럼 장대비가 40일간이나 쏟아지고 있습니다. 해저에서는 지진이 발생을 하고 지하수가 70일간이나 분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심한 지각변동과 해일을 나무로 만든 배가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노아의 방주가 깨어지지 아니하고 무사하게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동물들은 그러한 천재지변을 만나게 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미쳐 날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잡아 죽이지도 아니하고 그 세상이 뒤집히는 스트레스의 현장에서 식물성 사료만 먹고서 평온하게 지낼 수가 있었을까요? 그 유일한 설명은 이 세상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의 역사가 방주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방주를 안전하게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 내의 동물들의 삶을 그 옛날 에덴동산 낙원에서의 생활로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원의 회복은 이미 노아의 방주 내에서 실현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놀라운 구원의 능력으로 성도들과 교회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옛날 에덴동산과 노아의 방주 내에서 이루어진 그와 같은 꿈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할 것임을 주전 70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1:6-9). 할렐루야!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 때부터 벌써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그 놀라운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