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9강(창7: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0. 16. 10:04

창세기 강해 제29(7:1-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924()

 

정결한 짐승 암수 7쌍과 부정한 짐승 2쌍씩 노아의 방주에 태운 이유(7:2)

 

  각 동물들을 암수로 짝을 지어 여러 쌍을 방주에 태운 이유는 한 마디로, 홍수심판으로 멸망을 당하는 동물들의 종자를 보전하기 위함입니다(7:3). 그렇지만 정결한 짐승뿐만 아니라 부정한 짐승까지 함께 방주에 태웠다는 사실 때문에 그 깊은 의미는 훗날 교회론으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흔히 교회를 노아의 방주에 비유합니다. 다음과 같은 유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수심판의 와중에서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있었던 사람과 동물들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구원주로 영접한 자들만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고 세상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노아의 방주와 비슷한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정결한 짐승이 암수 7쌍씩, 그리고 부정한 짐승이 암수 2쌍씩 함께 탑승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도 그렇게 두 가지의 부류가 그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교회론이 발생하는 상황을 먼저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후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서로마제국을 통일합니다. 그는 꿈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승리의 깃발의 문양을 계시해주었으며 그 것을 사용함으로써 승전을 하였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동로마의 황제와 협의하여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하나의 종교로 공인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1년후에는 콘스탄틴 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는 로마도 하나, 황제도 한 사람, 종교도 하나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내걸고서 기독교를 로마의 유일한 종교인 국교(國敎, national religion)로 선언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기독교인구가 10%도 되지 못하고 있던 시절입니다. 갑자기 모든 로마제국 내의 백성들이 콘스탄틴 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교황청과 교회에서는 그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를 못했습니다. 자연히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를 못했습니다. 갑자기 기독교인이 된 여러 족속들은 성경말씀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했으며 어떻게 자신들의 이방종교와 우상문화를 청산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 결과 로마의 기독교는 수 많은 이방종교의 사상과 우상문화에 오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의식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차라리 그 옛날 정치적 박해와 종교적 핍박을 받고 있던 시절의 기독교가 더 순수하고 좋았다고 한탄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건한 기독교인들이 세속화된 교회를 버리고 먼 곳으로 떠나서 고행주의와 금욕주의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로마교회의 내부에서 경건주의 정풍운동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과거 정치적 박해를 받던 시절에 끝까지 로마황제를 신으로 경배하기를 거절했던 일부 강경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배교의 전력을 가진 자들은 모두 회개를 하고서 교회에서 다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지 부정한 자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그러한 시대에 성 어거스틴의 교회론이 나타났습니다; “교회는 경건하고 거룩한 자들만의 모임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능력을 믿음으로 용서함을 받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거룩합니다. 그 이유는 구성원들이 거룩해서가 아니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바로 거룩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그 값을 치르고 산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함부로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포용해야만 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교회론이 분열위기에 직면했던 로마의 교회를 살려내었습니다. 그의 생각의 저변에는 홍수심판의 와중에서 부정한 짐승을 정결한 짐승과 함께 방주에 태우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깨달음과 지혜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하나님은 정결한 것을 부정한 것보다 3배 이상 더 많이 구원하고 있습니다(7:2). 그러므로 교회는 적어도 세상보다는 더 거룩하다고 하겠습니다.

 

7일과 40일의 의미(7:4)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홍수가 시작되기 7일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내라고 지시를 하시고 있습니다(7:4). 그래서 노아의 가족 8명이 먼저 7일 전에 방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족장 노아가 6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방주에 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입니다(7:1). 한 사람의 의인이 자신의 가족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넉넉하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18:32, 19:16, 29).

다음으로 정결한 짐승들이 모두 7쌍씩 방주로 나아옵니다. 부정한 짐승들은 2쌍씩 노아에게 나아옵니다. 모두 방주에 태운 다음에는 그들의 사료를 적재합니다.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기 전 7일 앞서서 마감이 되고 있습니다(7:4). 그 다음에 7일 동안의 점검기간이 있게 됩니다; “종류별로 태운 짐승들 가운데에는 육식을 하는 동물도 있습니다. 맹수류와 맹금류가 당연히 탑승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야성이 잠재워질 수 있도록 사전에 조치를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방주 내에서는 그 수많은 방들과 칸들을 노아의 가족이 일일이 점검을 해야만 합니다. 제대로 짐승들이 분류가 되어서 각 방에 수용이 되고 있는지를 살펴야만 하고 나아가서 서로가 평화공존을 하고 있는지도 점검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방주 내에 하자가 없는지도 살펴야만 합니다”. 물론 사람의 능력만으로써는 완벽한 점검이 불가능합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점검을 하십니다. 마침내 안전점검이 모두 끝나자 방주의 문이 닫힙니다. 그 마지막 문을 닫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7:16).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마감을 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7일 전에 모두 방주에 태우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40일간 지면에 비를 내리시고 있는 것일까요?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그 수의 의미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7’이란 수는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수 ‘3’과 사람의 수 ‘4’가 합해져 있는 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사람도 모두 만족을 시키고 있는 좋은 수이며 완전수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사전준비를 위하여 ‘7전에 일단 준비를 마치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40은 인간의 완전수 ‘4’에 손가락 모두를 동원하여 셀 수 있는 완전한 수 ‘10’을 곱하기 한 수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사람이 보기에 그리고 사람이 계산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땅을 심판하기에 충분한 비가 40일 동안에 모두 쏟아져 내릴 것이라는 예언입니다(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