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1강(창4:25-5: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9월 16일(월)
카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하나님이 주신 다른 씨 ‘셋’(창4:25)
아담은 아내 하와에게서 세 번째 아들을 얻게 됩니다(창4:25a). 아담은 그 이름을 ‘셋’(Seth)이라고 짓고 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내게 카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입니다(창4:25b). 여기서 생각을 깊이 해보아야만 하는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왜 둘째 아벨이 죽고 다른 아들 셋을 얻게 되었다고 아담이 그렇게나 기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아벨이 죽고 이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여전히 가득합니다. 오죽하면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그 가슴 속에 묻고 지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 아들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고 하여 그 진한 슬픔과 그리움을 그렇게 금방 씻어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그 깊은 연유가 무엇일까요? 욥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욥의 열 자녀가 같은 날 집이 무너져서 모두 죽게 됩니다(욥1:18-19). 그리고 나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욥의 신원이 회복됩니다.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욥42:10). 그렇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자녀 열명을 주는데 그칩니다(욥42:13)”. 두 배의 축복이라면 스무 명의 자녀를 주셔야만 되는데 열명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흔히 세상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고 나면 그만이며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12:26-27).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자들이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 자가 모두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열조들이 모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아벨도 천국에 있으며 욥의 열 자녀도 천국에서 살아 있습니다, 다시 열 명의 자녀를 더 주셨으니 훗날 천국에서 욥은 스무 명의 자녀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배의 축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동일한 계산법이 창세기에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아담부부는 셋을 얻고서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벨도 천국에서 살아 있고 또 이 세상에서 아들 하나를 더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의 의미가 각별합니다. 그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씨를 주셔야 아담부부가 자녀를 생산할 수가 있다고 하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남자에게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씨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부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자녀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씨를 주실 때에 비로서 이 세상에 자녀가 탄생을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고 있다는 정확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오늘 날 생물학적인 지식과 의학적인 상식에 젖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크게 경종을 울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고 인간은 그 생명이 이 땅에 오는데 사용되고 있는 일종의 통로가 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모세의 다음 지적이 옳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30:20). 히브리서의 저자는 열조가 얻고자 한 그 땅이 사실은 가나안 땅이 아니고 천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셋째로,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은 ‘대안을 주셨다’는 뜻과 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신입니다. 다른 대안을 얼마든지 창조하여 사람들에게 주실 수가 있는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새로운 구원과 생명의 길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65:17, 요3:14-15).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 앞에서는 절망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종교탄압으로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와 제사장이 자신만 남기고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모두 사라진 줄로 생각을 했습니다(왕상19:10). 그래서 남쪽 유다 왕국으로 도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호렙 산에 올랐습니다(왕상19:8).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걷어가 달라고 말합니다(왕상19:4, 14). 하나님 신앙이 조국에서 사라졌는데 자기 혼자서만 투쟁을 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너무나 무시하고 있는 성급한 판단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곧 바알 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아니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의인을 이스라엘 땅에 칠천 명이나 남겨놓을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왕상19:18). 그러자 엘리야는 비로서 깨닫게 됩니다. 대안을 마련하고 계시는 한 없이 크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의 좁은 안목과 자신의 입장에만 갇히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안을 가지고 있는 광대하신 창조주입니다”. 엘리야가 그와 같은 사실을 똑똑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 앞에 참으로 겸손한 엘리야의 인생이 전개되고 마침내 회오리 바람 속에서 불 말과 불 마차를 타고서 승천을 하게 됩니다(왕하2:11). 한 마디로, 독생자의 성육신, 대속의 십자가, 부활과 승천, 성령님의 강림과 각 개인별 임재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구원과 영생의 대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의 아들 ‘에노스’의 의미와 그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이유(창4:26-5:3)
‘에노스’(Enosh)의 의미는 ‘약한 자’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한 마디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mortal body)를 가진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신의 운명과 처지를 깨닫게 된 사람이 셋입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부르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신앙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셋과 에노스의 가계를 통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이 대물림이 되고 있습니다(창4:26). 그 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서서히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창5:3). 반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 속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점을 모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1-2).
어느 사이에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제1장 제26절과 제28절 사이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했는데 제5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오직 셋의 자손에게만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신앙을 대물림한 의인의 가계가 하나님의 형상을 보전하고 있으며 그 가계가 바로 셋의 가문임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6장에서는 그 셋의 가계를 ‘하나님의 집안’으로, 나아가서 카인과 ‘놋’ 땅의 사람들 및 그 후손들을 ‘사람들의 집안’으로 구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창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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