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321강(사66: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0. 2. 00:35

이사야 강해 제321(66:1-4)

작성자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주후 2016 4 26()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르게 모시고 섬기는 방법(66:1-4)

 

선지자 이사야는 마지막 장을 시작하는 본문에서 그의 동족들에게 올바른 신앙자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66:1).  

(2)  둘째사람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그 마음속을 정확하게 투시하고 계심을 명심해야만 합니다(66:2). 백성들이 마음 따로 행동 따로 하면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면 그것을 금방 간파하십니다(66:3a).

(3)  셋째여호와를 자신의 창조주이며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단지 하나의 이용대상으로 여기며 우상과 같이 섬기고 종처럼 부려먹고자 하는 자를 결코 용서하시지 않으십니다(66:3b).

(4)  넷째자신의 잘못된 신앙자세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외식적이고도 가증스러운 신앙생활을 계속 선택하는 자들을 여호와께서는 심판하십니다(66:4b). 그 심판의 방법이 그러한 자들의 인생을 불쌍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계속 마귀의 유혹과 악한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사탄과 운명을 같이 하도록 내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66:4a).

그와 같은 내용을 어떻게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b) 하늘은 나의 보좌은 나의 발판이니, (c) 너희 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내가 안식할 처소 어디랴?(66:1); 하나님신앙의 가장 첫 번째 기본자세에 대하여 이사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66:1a); 선지자로서 이사야는 자신이 어떻게 여호와의 종으로 말씀사역을 하고 있는지부터 동족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이사야는 자기 개인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사역자가 결코 아닙니다그는 단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도구일 따름입니다그래서 여호와의 종인 이사야는 매일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뜻을 깨닫기 위하여 바쁜 사람입니다.

2)    구체적으로 이사야는 그 뜻이 이해되지 아니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실려있는 두루마리 히브리정경의 내용을 가지고 그 말씀을 조명하면서 그 안에서 그 뜻을 깨닫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마치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의 영적인 체험과 말씀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재정립하고자 애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물론 이사야는 기도하는 가운데 계시의 영으로 임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그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선지자입니다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이 깨달은 여호와의 말씀을 자신 있게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이사야가 그 사실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그의 동족인 선민들도 부디 그와 같이 말씀을 묵상하고 그 뜻을 깨달아서 신앙생활을 해주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무조건 선민이라고 하여 자신들이 의인이며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10:3).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진술하기에 앞서서 그 주장을 두루마리 히브리정경의 전체적인 말씀의 뜻에 비추어보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2)  하늘은 나의 보좌은 나의 발판이니(66:1b); 사람은 지구의 표면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물으면 하늘은 땅 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하늘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사람이 그 발로 디디고 있는 곳이 바로 땅입니다;

1)    그와 같은 관념 속에 살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성경의 기록도 위와 같이 하늘은 창조주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거룩한 곳이며 땅은 그 발치에 해당이 된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66:1b). 그리고 본문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을 모두 창조하신 위대한 창조주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2)    그런데 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가 전체 우주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해보면위의 말씀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과학적으로 설명을 하자면우주의 빈 공간 가운데 마치 유리조각을 뿌려놓은 것처럼 그렇게 드문드문 행성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행성의 수는 적어도 10의 24승 개가 넘어서고 있습니다그렇게 많은 무수한 별들 가운데 하나가 지구입니다그것은 비중으로 따지자면 마치 지구상에 있는 모래 알갱이 하나보다도 작은 것입니다.

3)    왜냐하면지구에 있는 모래가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mm의 크기를 지니고 있다고 전제할 때에 그것은 지구의 체적인 26X(10의 24승)(mm3승)과 비교할 때 잘해야 10의 24승 분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계산의 방법은 지구의 반지름 r=6370km로 보고지구의 체적 v= 4/3(πr3승)에 대입한 것입니다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 자체가 우주 공간에서는 겨우 지구상에서 하나의 모래 알갱이 정도의 존재에 불과합니다.

4)    그러므로 지구의 지표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란 전체 우주 공간에서는 하나의 점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존재라고 하겠습니다그와 같이 티끌보다도 못한 존재인 사람이(18:27감히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께서 그 발판으로 지구를 선택하고 계신다고 하는 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66:1b).

5)    그것은 과학적으로는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하지만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빌려서 그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은 나의 발판이니(66:1b). 그 말씀 자체가 크나큰 은혜입니다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미생물과 같은 사람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얼마나 비중 있게 귀하게 생각해주시는가 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믿는 자는 그 사실을 깨닫고 여호와 앞에 새삼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3)  너희 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내가 안식할 처소 어디랴?(66:1c);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모신다고 사람들이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하지만 과연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그 집에 모실 수가 있을까요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1)    일찍이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고 솔로몬 왕에게 성전을 짓게 여호와께서 허용하신 이유는 백성들 사이에 임재하시기 위한 것입니다(25:8). 그 말은 지성소 언약궤와 그 뚜껑인 속죄소에서 하나님께서는 음성으로 백성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고자 하신 것입니다(25:22). 일종의 스피커나 단말기를 그곳에 설치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다고 설치는 것이 사실은 불경스러운 일입니다피조물에 불과한 온 우주도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담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사람이 지은 그 작은 집에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그렇게 사람의 능력으로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그러나 가능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창조의 능력으로 사람과 함께 안식하실 수 있는 처소를 만드시는 것입니다그러면 성도들이 아버지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그 안식의 처소에 들어가서 함께 지내기만 하면 됩니다그 안식의 처소로 인도해주시는 분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14:1-3).

둘째로, (a)  여호와가 말하노라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그들이 생겼느니라. (b)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심령에 통회하며, (c) 내 말을 듣고 떠는 자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66:2);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의 창조주를 알고 자신의 한계를 알며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가 말하노라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그들이 생겼느니라(66:2a);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 손으로 사람을 창조하십니다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알아듣도록 해주고 있습니다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만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려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그렇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 여호와의 종인 사람들의 본분이며 신앙생활입니다예컨대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닮아 있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곳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2:15).

(2)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심령에 통회하며(66:2b); 비록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서 창조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결코 창조주가 아닙니다;

1)   그러므로 주인을 모시고 있는 종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만 합니다그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이며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만 하는 법도입니다그렇게 자신의 한계를 알고서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한 자로 설 수 있는 자가 참 신앙인입니다.

2)   만약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마치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교만스럽게 행동을 했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곧바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합니다그렇게 영이신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바로 서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평안을 회복시켜주십니다용서를 해주시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다시 할 수 있도록 능력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그것이 통회하는 자의 심령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와 회복의 은혜입니다.

(3)  “내 말을 듣고 떠는 자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66:2c); 이 말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압권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여호와의 말씀은 창조주의 말씀이므로 피조물을 창조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소멸시켜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는 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신앙인입니다창세기를 참조하면 모리아 산상의 아브라함이 그러한 신앙인입니다(22:12). 그와 같은 절대적인 창조주의 능력을 인정하고서 그 앞에 두려움과 겸손함으로 서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그리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그 일꾼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일에 항상 함께하시고 돌보아주시는 것입니다(66:2c).

셋째로, (a) 를 잡아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어린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하며드리는 예물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하고(b)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c) 자기의  택하며그들의 마음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66:3); 잘못된 신앙태도의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1)  를 잡아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어린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하며드리는 예물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하고(66:3a);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있는 두려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와 그러하지 아니하는 자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그 좋은 예가 이 대목입니다;

1)    하나님을 마음 속으로 경외하는 자는 제물을 바치는 마음가짐이 반듯합니다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바치고 제물을 준비하게 됩니다; 속죄의 제물로 바치는 소와 양에 대하여 안수를 하면서 자신의 죄과를 뉘우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그 희생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2)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면서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흉내를 내고 있는 선민은 그 태도가 불량합니다; 속죄의 제물로 바치는 소와 양에 대하여 안수를 하면서 자신의 죄과를 뉘우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희생을 귀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그저 도살자와 같이 소를 잡고 개의 목을 비틀듯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양의 목을 분질러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깨끗한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취득한 예물을 바치고 있습니다(66:3a).

(2)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66:3b); 성전 내의 성막의 구조를 보면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고 하는 지성소의 휘장의 바로 다음에 분향제단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30:6). 그 제단에는 매일 대제사장이 향기로운 가루 향을 사르도록 되어 있습니다(30:7);

1)    그 향 내음이 휘장 안으로 스며들어갑니다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성소에서 그 향내를 흠향하시는 것입니다그것은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성도의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5:8). 그러므로 사람들이 함부로 분향을 할 수가 없습니다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대대로 대제사장만이 거룩한 예복을 입고서 그 일을 행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30:7-10).

2)    그런데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역사 가운데 그 일을 강조하고 있는 한 대목을 볼 수가 있습니다유다 왕국을 부흥시킨 위대한 군주로 칭송이 자자한 웃시야 왕이 말년에 교만하게 되어 스스로 대제사장을 대신하여 분향을 하려고 하다가 그만 나병환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대하26:16-21).

3)    그러한 교만한 일을 선민들이 대대적으로 자행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자신의 현세적인 소원이나 들어주는 우상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따라서 겁도 없이 함부로 분향을 하듯이 그렇게 자신들의 이기적이고도 탐욕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마구잡이로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66:3b).

(3)  “자기의  택하며그들의 마음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66:3c); 이사야를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선민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쫓아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하여 하나님의 복을 얻으라고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30:19-20).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민들이 잘못된 선택을 마음속으로부터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그것은 두 가지입니다①첫째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게 되면 자신의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예를 들면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따라 모두를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려고 하면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헌신을 해야만 합니다그리고 구원의 복음도 모든 이방인들과 함께 나누어야만 합니다그것을 선민들이 절대로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②둘째하나님의 안목을 사람의 눈높이 정도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만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감찰의 시각에서도 벗어나고 있다고 안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에 따라 외식적이고도 가증스러운 이중적인 신앙태도가 자꾸만 만연이 되고 있습니다.  

넷째로, (a)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하여 주며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b)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c) 오직 나의 목전에서 을 행하며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66:4); 외식적이고도 가증스러운 신앙생활을 선택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여호와께서도 거기에 어울리는 선택을 해주실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1)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하여 주며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66:4a); 여기서 유혹은 마귀의 유혹을 말하고 있습니다(3:1-6, 4:1). 그리고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2:2-3, 6:12, 8:2);

1)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어째서 마귀의 유혹이 선택사항으로그리고 악한 영들의 위협이 여과 없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요선민을 보호해주시고 동행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요그 이유는 선민들이 자신들의 세상적인 이익과 선민의 특권에 집착하여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2)    만약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선민들이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헌신적으로 실천했더라면 생명과 사망 가운데 생명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축복 가운데 영생의 축복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선민들은 어리석게도 눈앞의 현세적인 이익과 선민들의 기득권만을 쫓아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3)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과 영원한 축복의 삶이 아닙니다사람의 탐욕을 한없이 충동질하고 있는 마귀의 유혹에 시달리고 영적으로는 평안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을 뿐입니다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욕심과 탐욕에 눈이 먼 백성들을 그 더러움 가운데 그대로 내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1:28-32).

(2)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66:4b); 이사야가 참으로 백성들이 알아 듣기 쉽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민구원을 위하여 선민들을 이방인 선지자로 파송을 하시고자 하십니다그러나 그들이 하나같이 못들을 척하고 있습니다”(66:4b). 그래서 하나님은 나중에 변방 갈릴리의 선지자 요나를 불러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보내십니다(1:1-2). 반대쪽으로 도망을 치는 요나를 설득하여 임무를 수행하게 하느라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심하시는지 모릅니다나중에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를 하는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합니다(1:17, 2:1-9, 3:1-4). 그 결과 그 성의 왕과 백성들이 모두 놀랍게도 회개를 합니다(3:5-9). 하나님께서는 멸망 대신에 용서와 구원을 주십니다(3:10). 그러자 선민사상에 젖어 있는 요나 선지자가 이의를 제기합니다(4:1-5). 그 성에 있는 12만명의 백성과 가축을 긍휼히 여기시고 살리고자 하시는 여호와의 마음을 설명해주어도 도무지 듣지를 아니하고 있는 선민의 선지자가 바로 요나입니다(4:10-11).

(3)  “오직 나의 목전에서 을 행하며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66:4c); 결국 재앙을 불러들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인생이란 두 가지의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첫째하나님이 보지 못하시는 줄 알고서 어두운 구석에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실제로 아무리 은밀하고 어두운 곳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안목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창조주 앞에서는 불가시광선이나 불가청의 소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어리석게도 그런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앞인 목전에서 버젓이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창조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과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12:1-2). 그것이 참된 헌신이며 만민구원의 삶입니다그런데 선민이나 성도들이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러한 희생과 헌신을 하고자 하지를 않습니다그와 같은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는 응분의 보응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결론적으로이사야는 그의 대선지서 마지막 장을 기술하면서 그의 동족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는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그러므로 피조물들이 만든 조그만 성전에 가두어두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2)  여호와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그 인생을 인도하시는 주인이십니다그러므로 여호와의 종인 선민들은 주인을 바로 모시고 그 공의를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3)  그런데 선민들이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 동시에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자기희생의 헌신도 행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만 구원을 받으면 족하다고 하는 선민구원사상그리고 현세적인 성공과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우상문화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렇게 선민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여호와께서 잘못된 선택에 따른 응분의 대가를 받도록 내어버려 두실 것입니다.

(5)  그와 같은 이사야의 기록은 선민에게만 해당이 되고 있는 메시지가 아닙니다오늘날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6)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뻐하시는 만민구원을 위하여 헌신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아무쪼록 그러한 은혜가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