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319강(사65:21-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0. 1. 10:55

이사야 강해 제319(65:21-23)

작성자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주후 2016 4 24(주일)

 

선지자 이사야가 살아간 시대와 그가 꿈꾸는 이상향(理想鄕이상적이고 완전한 세계, utopia)에 대하여(65:21-23)

 

본문은 짧은 3구절의 말씀에 불과하지만 선지자 이사야의 체험이 짙게 반영이 되어 있는 글입니다그러므로 이사야가 경험한 그의 시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풀이를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이에 따라 먼저 이사야가 경험한 시대적 상황에 대하여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고 나서 본문의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이사야의 가문은 예루살렘에서 유력한 집안으로 보입니다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그의 이름자 앞에 자랑스럽게 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사야의 아버지인 아모스’가(1:1, 2:1전설에 따르면유다 왕 요아스 왕의 아들이며 아마샤 왕의 형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그것이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그러므로 여기서는 단지 아모스가 예루살렘의 귀족이며 그의 뛰어난 아들이 이사야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  이사야는 젊은 나이에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10번째 왕(대상3:10-12, 다윗 대왕을 포함하면 11번째 왕임)인 웃시야의 사관으로 발탁이 될 정도로 학문이 깊은 사람입니다(대하26:22). 물론 문장력이 뛰어난 젊은이입니다이사야가 모시고 있던 웃시야 왕은 대단한 인물입니다왜냐하면그가 부왕 아마샤의 뒤를 이어 유다 왕국을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입니다예를 들면주변국인 블레셋모압암몬마온에돔그리고 북부 아라비아까지 쳐서 승리를 얻습니다(대하26:2-15). 많은 조공을 받으며 유다 왕국을 번영시킵니다유다 왕국의 번영과 강성함을 뒷받침하고 있는 웃시야 왕의 군대는 무려 30만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대하26:13).

(3)  일찍이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등극한 웃시야(왕하15:1, 대하26:1, 아사랴’로 불리기도 함) 52년간 통치를 하면서 유다 왕국을 크게 부흥시킨 것입니다(왕하15:2-5, 대하26:2-15). 그래서 백성들은 웃시야 왕을 다윗 대왕에 비견할 정도로 칭송하고 있습니다그러한 웃시야 왕이 서거를 하고 맙니다백성들은 하나같이 유다 왕국의 장래에 대하여 걱정이 태산입니다앞으로 누가 웃시야 왕처럼 유다 왕국을 잘 이끌어나갈 수가 있을까요안타깝게도 왕자들의 자질을 두고 보면도저히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4)  그렇게 선민의 나라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미래를 두고서 백성들이 걱정과 우려에 휩싸여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관 이사야를 불러서 선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6:1-13). 왜 그와 같은 미묘한 시기에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우고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게 했을까요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누가 선민의 나라의 주인인가를 깨우쳐주기 위함입니다.

(5)  선민들이 세상적인 번영과 강성함에 눈이 멀어서 웃시야 왕과 같은 지도자를 계속 원하고 있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웃시야 왕이 선지자 스가랴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라를 잘 이끌었지만 스가랴의 사후에는 그만 교만하여 대제사장의 직무까지 자신이 행하겠다고 나서는 교만함을 보이고 있습니다(30:7-8, 대하26:5, 16-18). 그 때문에 나병환자가 되고 맙니다(대하19-21). 그와 같이 세상적인 성공에 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왕을 계속 원하고 있으니 선민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유일하게 믿음과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적인 지도자에게서 선민의 나라의 강성함과 영광을 얻으려고 하고 있으니 그것이 근본적인 하나님신앙의 타락입니다.

(6)  그 때문에 이사야가 선지자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시기 곧 요담아하스히스기야 등 세 왕의 시대에 다윗 왕조 유다 왕국에는 엄청난 내우외환(內憂外患안의 근심과 바깥에서 오는 환난)이 찾아옵니다; “①요담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백성은 여전히 믿음이 없는 부패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대하27:2). 아하스 왕은 이방 신을 섬기는 한편(대하28:2-4) 북방 아람과 이스라엘 왕국의 내침을 막기 위하여 동쪽의 강대국 앗수르의 원군을 청하게 됩니다(왕하16:7-9).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외환을 불러오는 화근이 됩니다아람과 이스라엘 왕국을 차례로 집어삼킨 강대국 앗수르가 이제는 유다 왕국을 침입하기 때문입니다(대하28:20-21). 히스기야 왕 때에도 앗수르의 침략은 계속이 됩니다예루살렘 성만 제외하고 전국이 적에게 점령을 당하고 선민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대하32:9, 36:1-3).

(7)   이방강대국 앗수르 제국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 공격하면서 선전관 랍사게 장군을 통하여 히스기야 왕과 성내의 백성들에게 항복을 권유합니다그래도 히스기야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애굽의 원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30:1-5, 31:1). 그러나 불행하게도 애굽 제25왕조의 바로인 이디오피아 왕 디르하가의 원군이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매복전략에 휘말려 대패를 하고 맙니다(왕하19:8-9). 그 소식을 전해들은 히스기야 왕이 절망합니다랍사게 장군의 2차 항복문서가 도착을 하고 앗수르 산헤립 왕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8)  모든 희망이 사라진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적들의 문서를 펴놓고서 눈물로 하나님께 참회를 합니다(37:14-20). 오로지 적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사오니 그들을 처벌해달라는 읍소입니다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과 다윗의 이름 때문에 너희를 구원해줄 것이다(37:35 의역). 그 뜻은 히스기야 왕이나 선민들의 신앙생활은 구원을 얻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단지 여호와를 멸시한 이방인을 처벌하기 위하여그리고 그 옛날 하나님신앙의 본을 보인 다윗의 믿음을 본받을 기회를 선민들에게 한번 더 주기 위하여구원을 베풀어주겠다는 것입니다.

(9)  그렇다면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이 그렇게 구원을 받은 후에 자신들의 신앙생활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철저하게 반성을 하였을까요전혀 그러하지 아니했습니다오히려 더 큰 현세주의 구복신앙과 선민의 자랑에 빠져들었을 뿐입니다대표적으로히스기야 왕은 바벨론 사신을 맞이하여 교만하게도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고 유다 왕국의 강성함과 부를 자랑하기에 바빴을 따름입니다(39:1-4). 그 결과 100여년이 지나면 바벨론에 의하여 지상 마지막 선민의 나라가 종말을 맞이하고 마는 것입니다(39:5-7). 그 예언을 이사야가 전해주지만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은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그저 한 세상 잘 살고 가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39:8). 그래서 이사야는 절망하고 있습니다이제 유일한 소망은 구속자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는 것뿐입니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가 메시아의 나라를 고대하고 있습니다(11:1-12).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의 종말심판과 함께 건설하시는 하나님나라를 앙망하고 있습니다(65:17-20). 그 나라에서는 새로운 예루살렘 성이 수도로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그 성으로 입장하는 성도들은 이사야 시대의 그러한 무늬뿐인 선민들이 아닐 것입니다(21:23-27). 그들은 진실로 이 세상을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52:13-53:12). 환언하면구속자 메시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예루살렘 성에서 누리게 되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이사야는 자신의 비극적인 시대상을 되돌아보면서 하나의 이상적인 나라의 모습으로 본문의 예언을 기술하고 있습니다그 내용은 심히 간단합니다; 외침을 받아 자신들의 집도 포도원도 모두 적에게 빼앗기는 불행한 삶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입니다(65:21-23). 그와 같은 내용을 본문의 각 구절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더 깊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그들이 가옥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b)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65:21); 자기가 지은 집에 살고 자기가 심은 포도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의미는 크게 보아 두 가지입니다하나는 빼앗기지를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새 예루살렘 성에서 그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1)  그들이 가옥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65:21a); 이미 말씀 드린 그대로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1)    첫째이사야가 체험한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예루살렘 성을 제외하고 전국이 앗수르 제국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습니다그러므로 백성들의 집은 압류를 당하여 앗수르의 군대가 점령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그렇지만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그와 같은 적의 침입과 약탈이 없습니다이사야가 꿈꾸고 있는 새 세상은 그러한 곳입니다.

2)    둘째또 하나의 해석은 본문이 하나님나라의 수도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이에 따라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성도들은 자신의 가옥을 자신들이 건축하여 그 안에서 살게 된다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3)    그렇다면 누구나 자신의 집을 쉽게 지을 수가 있을까요그것은 아닙니다왜냐하면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하여 어떠한 희생과 헌신을 했느냐고 하는 그 공로를 따져서 건축자재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일종의 기업을 나누어주는 상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1:12, 3:24).

(2)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65:21b); 역시 두 가지로 풀이가 됩니다;

1)    집만 짓는다고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농사를 지어야만 합니다당장 여기서는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농사를 짓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농부가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를 경작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전쟁에 휘말리고 말았습니다적들이 포도원을 차압하고 맙니다한 마디로 헛농사’를 지은 것입니다그러나 천국을 의미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를 않습니다오로지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을 뿐입니다.

2)    구약에서 포도원은 선민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5:7).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포도나무이고 성도들이 그 가지입니다(15:1-2). 그러므로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포도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15:4-5). 그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예물로 바칠 수가 있습니다(5:2, 14:25). 그 예물이 바로 전도의 열매입니다(66:20). 그와 같은 내용을 여기서 이사야가,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65:21b)라고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a)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b) 이는 내 백성의 수한 나무의 수한 같겠고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65:22); 건축한 것과 심은 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요그리고 그 보답을 충분히 얻고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떠한 조치를 해주시고 있는 것일까요?

(1)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65:22a); 두 가지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1)    겉으로 보면이사야의 소원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더 이상 외침을 받아서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적에게 점령을 당하거나 재물의 약탈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그것은 가장 안전한 나라입니다하나님께서 새로이 창조하시는 새 예루살렘 성이 그토록 안전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2)    그렇지만 더 깊은 의미를 속으로 지니고 있습니다그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건설에 헌신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 곧 만민을 돌보고 그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그 삶이 하나님나라에 자신의 집을 건축하고 기업을 얻게 되는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2)  “이는 내 백성의 수한 나무의 수한 같겠고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65:22b); 새 예루살렘 성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종에 대한 분깃과 기업은 어느 정도의 것일까요?

1)    포도나무가 계속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을 경작하게 하십니다그러므로 여호와의 종이 새 예루살렘에서 얻게 되는 기업은 그가 이 땅에서 심은 포도나무와 그가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 열매의 크기와 관련이 되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포도나무를 계속 심고 그 열매를 계속 생산하고 있다면 새 예루살렘 성에서도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장수함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언약입니다.

2)    여호와의 종이 얻게 되는 분깃은 기업을 경영하여 얻은 것 가운데 자신의 몫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새 예루살렘 성에서 길이 누릴 수 있도록 향년을 보장해주겠다고 하십니다성도가 충분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 분깃을 얻어서 기쁘게 누릴 수가 있으니 그곳이야 말로 낙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a)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b) 그들은 여호와 복된 자 자손이요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65:23); 대대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새로운 언약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65:23a); 이 땅에 쌓고 있는 것은 헛된 것들입니다왜냐하면도적이 들고 벌레를 먹어 상하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로 오시는 예수님의 증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6:19).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예루살렘 성에서는 그런 위험이 사라지고 없습니다이사야의 예언과 예수님의 증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65:23a),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6:20).

(2)  “그들은 여호와 복된 자 자손이요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65:23b); 참으로 의미가 심장한 예언입니다;

1)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범을 보고서 그대로 따라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그리하면 이 땅에서의 복음사역을 끝낸 다음에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22:28-30, 21:26-27). 그리고 논공행상에 참여하여 기업도 얻고 분깃도 얻게 됩니다(3:24). 그들이 여호와의 복된 자손들이며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2)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남긴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고서 그대로 따라서 실천을 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있습니다그들도 훗날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동일한 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65:23b). 왜냐하면여호와 하나님께서 후세대의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아버지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공의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그 효력이 동일하십니다사도 바울의 간증과 같이피조세계의 그 어떠한 권력이나 명분으로도 변개시킬 수 없는 영원한 언약입니다(8:38-39). 그러므로 만민구원은 그 넓이에 있어서온 세상의 모든 나라와 백성을 전부 구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동시에 그 길이에 있어서는 세상의 끝날 모든 후세대까지 믿는 자를 전부 구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3:18-19).

결론적으로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새 예루살렘 성에는 선민이라고 하여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오로지 이 땅에서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집을 짓고 하나님께 이방인 전도의 예물을 올려드린 성도들만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간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되면 기업과 분깃을 얻게 될 것입니다그것은 적에게 점령당하지도 아니하며 약탈당하지도 아니하는 영원한 집이며 기업입니다.

그와 같은 논공행상은 한번에 끝나지를 않습니다세상 끝날까지 그곳으로 입성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질 것입니다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간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게 되면 동일한 기업과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본문에서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상급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얻고자 한 그것과 같아 보입니다따라서 다음의 사도 바울의 글을 음미하시면서 더 깊은 메시지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형제들아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3:10-16).

아무쪼록 지금 서 계신 그 자리에서 이제부터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셔서 영원한 하늘의 상급을 얻으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