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320강(사65:24-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4월 25일(월)
새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사65:24-25)
창세기 제1-2장에서 모세는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먼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다양한 동식물을 창조하십니다. 그것이 자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운 세상을 경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여호와의 종인 사람들이 주인이신 창조주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자연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능력을 사람에게 부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한 것입니다(창1:26-27). 그렇게 탄생한 사람들이 주인의 뜻에 맞게 자연을 잘 관리하고 경영을 하게 되자 피조세계의 모습이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이에 크게 만족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평가가 “심히 좋았더라”(창1:31)입니다.
창세기 제2장에서는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지니고 있는 아담 부부와 동행하시는 에덴동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기운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아담)이 생령이 되니라”(창2:7)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온갖 동물과 동무가 되어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정답게 지내고 있습니다(창2:18-20). 그러한 맥락에서 에덴동산은 선지자 이사야가 메시아의 나라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꿈꾸고 있는 이상향 곧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같습니다(사11:6-9, 65:25).
그렇지만 아담부부의 범죄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락원(失樂園, lost paradise)에서의 아담의 자손들의 삶은 고달프고 힘이 듭니다. 더 이상 땅과 동물들이 타락한 사람에게 우호적(友好的, friendly)이지를 않습니다(창3:17-19, 4:14-15). 더구나 인간의 사회에서도 약육강식의 철칙이 성립이 되고 있습니다(창6:2-5, 11). 그 영향은 훗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이 된 선민의 사회에까지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선민들의 치유와 회복을 여호와 하나님에게 간절하게 구하고 있습니다.
태초 에덴동산에서의 심히 아름다운 세상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가운데 본문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65:24-25).
본문은 앞 부분의 말씀(사65:17-23),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가 되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성도들이 기업과 분깃을 얻어 피조세계를 창조주의 뜻에 따라 새로이 관리하게 된다는 사실에 이어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인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청지기로 일을 할 때에 그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의 공의를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크게 도와주십니다.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위의 본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과연 그러한 내용을 본문의 두 구절이 어떻게 묘사를 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그 안에 내포가 되어 있는 깊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b)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 하나님의 돌보심과 청지기의 돌봄이 일치가 될 때에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1)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사65:24a); 부모가 아기를 돌볼 때에 있을 수 있는 일을 여기서 이사야가 예로 들고 있습니다;
1) 아기가 어딘가 불편하면 무조건 부모님을 부릅니다. 그러면 부모가 달려와서 살펴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기와 아주 친밀한 부모는 아기가 부르기 전에 벌써 그 표정을 보고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십니다. 그와 같이 친밀한 관계, 곧 성도의 형편과 필요성을 미리 알고서 적절한 사전조치를 해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사야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해주시는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①첫째가 돌보심이며, ②둘째가 생명 살리심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돌보심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하여 이사야가 이 대목에서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사65:24a).
3) 그렇다면 여기서 반대해석도 가능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의 선민우월사상과 현세구복사상을 내세우면서 메시아를 배척하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설혹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외면을 하시고 응답을 아니하십니다. 그 이유는 만민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선민들이 전혀 실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들만 잘 살고 구원을 독점하고자 하는 신앙생활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b);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첫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뜻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기업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여기서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b)라고 예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이 땅에서 선민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대부분 긍정적으로 응답이 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와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헌신하는 인생을 살아가라고 요구하십니다(출19:5-6).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러한 희생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기적인 구원과 현실적인 형통함을 위해서 간구를 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께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필요성이 없는 것입니다.
3) 셋째, 또 하나 살펴볼 내용은 선민이나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경우입니다. 너무나 힘들고 지쳐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외면하실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응답이 바로 임하는 것입니다(사65:24a).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이 땅에서도 미리 맛볼 수가 있습니다. 단지 성도들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고 있을 때입니다.
둘째로, “(a)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b)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c)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d)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65:25).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두 번째인 생명살림의 역사가 청지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모습과 노아의 방주 내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1)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사65:25a); 어린양을 사냥하고 잡아먹는 짐승이 여럿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맹수류가 사자와 곰입니다(삼상17:34-35). 다윗은 어린양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자와 곰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삼상17:37). 그런데 주로 어린양을 잡아먹는 짐승은 이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리가 어린양을 잡아먹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아니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약육강식의 짐승사회를 평화공존의 새 세상으로 바꾸고 있는 경우가 성경에 몇 번 있습니다;
1) 첫째,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에덴동산’이 그러합니다. 아담은 온갖 동물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동무가 되어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창2:19-20). 그곳에서 평화공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노아의 방주 안’이 그러합니다. 세상의 모든 짐승들이 함께 타고 있는 방주이지만 서로 잡아먹지를 않고 있습니다(창7:7-9). 그곳에서 오로지 식물성 먹이만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창6:21).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하고 있는 구원의 공간입니다.
3) 셋째, ‘메시아의 나라’가 그러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사11:6).
4) 넷째,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이 창조가 되자 ‘하나님의 나라’에서 동물들의 평화공존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사65:25a). 그것은 전적으로 창조주의 능력이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을 없애버린 결과입니다.
(2)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사65:25b); 태초에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바다와 육지를 창조하십니다(창1:9-10). 그리고 다양한 식물을 디자인하여 붉은 땅을 뒤덮어버리십니다(창1:11-13);
1) 그렇게 동물들의 먹이를 먼저 준비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각종 동물을 창조하여 온 땅과 바다에 살게 하십니다(창1:20-25). 동물들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식물을 먹이로 삼고 있습니다. 서로 잡아먹는다는 생각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른바 “보시기에 좋은 세상”(창1:21, 25)입니다.
2)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약육강식의 두려움이 찾아온 것은 사람들의 탐욕과 타락 때문입니다(창6:2-7, 11-13). 그러한 악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자 노아의 방주 안에, 메시아의 나라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다시 전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사65:25b).
3) 다만 일찍이 사탄의 화신이 되어 하와를 유혹한 바 있는 뱀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징벌이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창3:14)는 심판이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사65:25b)라고 동일하게 반복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사65:25c); 선지자 이사야가 갑자기 이상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나의 성산’ 곧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출애굽기의 기록에 따르면 거룩한 산은 호렙 산과 시내 산입니다(출3:1-5, 19:1-9). 공통점은 그곳에 하나님의 강림과 임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하나님의 강림과 임재가 있는 곳에서는 약육강식의 철칙이 사라지고 서로 죽이고 죽는 악순환의 고리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사65:25c).
2) 그 좋은 예가 옛날 에덴동산, 노아의 방주 안, 메시아의 나라, 나아가서 하나님나라 등입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성전을 만드시고 그곳에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여 성도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경우입니다(고전6:19-20). 그 앞에서는 해함도 상함도 전부 사라지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사65:25c).
(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65:25d);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주의 의지와 능력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 말씀을 훼방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그 말씀 그대로 미래의 역사가 진행이 됩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변개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때가 되면 약육강식의 철칙이 사라지고 모두가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동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아름다운 미래를 소망하면서 선지자 이사야는 부디 그의 동족들부터 하나님의 공의를 솔선수범하여 실천하는 성도들이 모두 되어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선지자 이사야가 직면하고 있는 선민의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자신들의 이기적인 탐욕과 현세적인 소원성취만을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 신들 그리고 우상들에게 빌고 있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방나라보다 더 악하게 보이는 선민의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 명약관화해지고 있습니다(사39:5-7).
이제 이사야는 무엇에 희망을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옛날 에덴동산과 노아의 방주 안에서 발생했던 모든 동물들의 평화공존과 생명살림의 역사는 다시 이 세상에 도래할 수가 없는 것일까요? 이사야의 질문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답변이 본문과 그 앞 부분의 말씀으로 그에게 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디로, 그 내용은 메시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현이 되고 있는 심히 좋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사야는 그 좋은 세상을 죽어서 천국에 가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은근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예언 그대로 훗날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성전을 만드시면 그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여 성도들과 함께 거듭난 삶을 살아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세상에서 그 앞길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요14:16-23, 고전6:19-20, 롬8:37-39).
그것이 이름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승리의 인생’입니다. 그 은혜를 누리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영생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어떤 위협도 한갓 그 앞에서 물거품같이 사라지게 됩니다(롬8:37-39, 사65:25c). 그러므로 아무쪼록 만민구원의 영적인 삶을 살아가심으로써 그와 같은 임재와 동행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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