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323강(사66:7-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4월 28일(목)
예루살렘의 심판과 멸망이 오기 전에 구속자 메시아와 그 제자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사66:7-9)
이사야가 전해주고 있는 본문의 말씀은 창세기 제30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라헬의 이야기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결혼한지 6년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던 라헬의 태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어주십니다(창30:22). 라헬이 처음으로 아기를 낳습니다. 아들입니다(창30:23). 그런데 그 이름을 ‘요셉’이라고 짓습니다. 그 뜻은 “아들 하나를 더 달라”는 것입니다(창30:24).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첫째, 또 아기를 낳는 고통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아들을 하나 더 생산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언니 레아와의 경쟁에서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아니하게 아들을 하나 더 가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3) 셋째, 무자식인 라헬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아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한번 더 확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4) 넷째, 그 아들 요셉이 훗날 야곱의 집안을 7년 연속 흉년의 재앙으로부터 모두 구하는 구원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즉, 라헬이 요셉을 먼저 낳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동생 베냐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 야곱의 집안을 모두 구원하게 되는 대 역사가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라헬과 요셉의 이야기는 심상하지 아니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미가 이사야의 본문말씀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男兒, 사내아이)를 낳았으니”(사66:7); 여기서 ‘시온’은 이사야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선민의 사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사회에 메시아가 오십니다. 메시아가 사내아이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탄생의 시기는 선민사회가 고통을 당하기 직전이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그 옛날 여호와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오랜 세월 애굽에서 노예와 같은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을 구출하여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출19:5). 그리고 그곳에서 선민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출19:6). 그 의미는 마치 제사장이 자신의 백성들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수행하듯이 그렇게 선민의 나라는 이방인들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선민의 나라는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거룩한 백성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사명을 선민들이 외면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한 세상 선민의 기득권을 누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까지 구원하시는 온 세상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오로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사21:17). 또한 이방인의 우상문화를 받아들여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현세적인 부귀영화와 소원성취를 이루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 결과 선민들이 자신들에게 현세적인 복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는 신앙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사39:8). 따라서 선민들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성취하신다고 하는 애초의 계획은 물 건너가 버리게 된 셈입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3) 이사야는 생전에 여호와께서 앗수르에게 짓밟히고 있는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을 기적적으로 구원해주시는 모습을 목격합니다(사37:36). 그리고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자 죽을 병을 고쳐주시고 15년 수명연장까지 해주시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사28:5). 그러나 그 후 히스기야 왕이 보여주고 있는 신앙태도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습니다.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잘못되면 마지막 순간에라도 성전에 나아가서 눈물로 매어 달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신다고 하는 편리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선민의 나라가 망하지 아니하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사39:8) 지극히 현세주의적인 하나님신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이 대변하고 있는 동족인 선민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습니다.
(4)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선민만의 구원사상과 현세구복적인 우상문화를 버리지 아니하게 되면 멀지 아니하여 멸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 그리고 여호와의 능력으로 메시아가 부활하여 이루시는 공의의 나라를 앙망하고 있습니다(사11:1-12, 52:13-53:12). 아울러 선민의 후손들이 메시아를 배척하지 말고 부디 그 가르침을 따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주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사야의 염원이 본문에서 예언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의 사회가 멸망과 환난에 휩싸이기 전에 그 땅 시온에 메시아를 보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男兒, 사내아이)를 낳았으니”(사66:7).
둘째로, “(a)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b)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c)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사66:8); 기이한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은밀하신 오랜 의도와 계획하심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일이 과연 무엇일까요?
(1)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사66:8a); 여기서 ‘이러한 일’은 앞 절의 내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임산부가 산고의 고통을 치르기도 전에 사내아기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1) “산통이 없이 아들을 낳는다”고 하는 일은 꿈과 같은 기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산부인과에서는 이사야의 예언과 같은 일을 실제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무통’(無痛, 통증이 없음) 분만을 위한 제왕절개라는 수술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고통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수술 후에 절개의 부위가 아물 때까지 회복의 고통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산통이 없이 소중한 아들을 낳는다고 하는 것은 태를 여시는 능력과 고통을 다스리시는 치유와 회복의 능력까지 보유하고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본문에서,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사66:8a)고 질문하고 있는 내용은 앞 절인 제7절을 참조하면, 그 답이 다음과 같습니다; “창조주께서 지금까지 없었던 방법으로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그 방법은 선민사회가 엄청난 고통을 당하기 전에 그 땅에 메시아를 사내아기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사7:14, 9:6, 11:1, 66:7-8a).
(2)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사66:8b); 겉으로 보는 것과 그 속을 들여다 보는 것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1) 겉으로 보면, 선민의 사회에서 갑자기 산모가 무통분만을 하듯이 그렇게 아기 메시아를 생산하게 된다고 하는 일이 기적과 같은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순한 기적의 연출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일이 그렇게 기적처럼 이 땅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2) 기존의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기적처럼 나타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끝까지 패역한 길에서 돌아서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모두 돌보시고 그 생명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그 결심이 어렵습니다. 요컨대,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하여 오랜 세월 고심을 하시고 그 준비에 철저를 기하시는 것입니다.
3) 실제로 세상에 민족 하나를 키워내고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게 하는 일에도 엄청난 시간과 준비과정이 있어야 되는데 하물며 온 세상을 심판하고 동시에 실수 없이 하나님 경외자를 전부 구원하여 새로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일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러므로 적어도 주전 25세기 노아의 시대 무지개 언약 때부터(창9:8-17) 주전 1세기 메시아가 태어나실 때까지(마2:1-16) 무려 2,400년의 준비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3)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사66:8c); 그렇지만 그와 같은 고심참담한 여호와 하나님의 속사정을 자기 의와 교만에 빠진 선민들이(롬10:3) 이해를 할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 속사정을 알게 된다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탐하고 손쉽게 자기만 구원을 받으면 그만이라고 하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혹시 고치게 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한번의 기회를 더 주시고 계십니다. 그것이 선민들의 사회가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초토화가 되기 70여년 전에 그들의 사회에 메시아가 일찍 태어나게 하신 일입니다. 겉으로 보면, 마치 기적과 같이 유대인 사회에 임하고 있는 그 일에 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사66:8c).
셋째로, “(a)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b)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사66:9); 그 옛날 라헬의 소원도, 선지자 이사야의 열망도, 선민사회에서 진실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는 자들의 소망도 모두 이루어주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사66:9a); 이 대목의 내용은 ①첫째, 하나님께서 아이를 임신하게 하시고 ②둘째, 임신한 아기를 반드시 해산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본문 전체를 통해서 살펴보면, “이 대목은 메시아를 선민사회에 보내어주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목적하신 바를 성취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메시아를 보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1) 메시아를 선민사회에 보내어주시는 여호와의 목적은 크게 보아 두 가지입니다; ①첫째, 메시아의 교훈을 듣고 동시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메시아의 일생을 눈으로 봄으로써 선민들이 하나님말씀의 본뜻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②둘째, 만민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때문에 메시아가 무덤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민들도 부활과 영생의 하나님을 믿고서 그리스도처럼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2) 메시아의 공생애를 바라보고서 과연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말씀의 본 뜻을 정확하게 깨닫게 될까요? 실제로는 깨달음을 얻은 자의 수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나아가서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의 말을 유대인들이 많이 믿게 될까요? 그 역시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훗날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형성이 되지만 몇 만 명만이 참여하게 되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부활의 역사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유대인 110만명이 학살을 당하고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3) 그렇다면, 메시아가 선민의 사회에 오심으로 진짜 이 세상에 전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먼저 창세기 제30장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제30장을 보면, 불임인 라헬을 고치시고 아들을 낳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에 대하여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30:22-24).
4) 풀이를 해보자면, ①첫째, 하나님이 라헬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아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③셋째, 아들을 더 달라고 하는 라헬의 요구를 검토하신다는 것입니다. 위의 풀이를 가지고 이사야의 본문말씀에 대입을 해봅니다. 그러면 알 수 있게 됩니다; ①첫째, 메시아를 아들로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기신다는 뜻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②둘째, 메시아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부끄럽지 아니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아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아 다음에 더하여 주시는 아들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2)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사66:9b); 이사야는 이 대목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태를 닫지 아니하고 계속 해산하게 하는 창조주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이 색다른 의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로 말미암아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들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이 되고 있다는 풀이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1) 창세기 제35장을 보면, 라헬에게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나게 됩니다(창35:17). 베냐민의 탄생입니다(창35:18). 라헬이 길가에서 목숨을 희생하면서 낳은 아기 베냐민이 나중에 12지파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그리고 동생 베냐민을 사랑하는 친형 요셉에 의하여 야곱 집안 전체가 7년 연속 흉년으로부터 구원함을 얻게 됩니다(창45:5-11, 47:12). 그러므로 흔히 ‘요셉’을 메시아의 예표라고 말하고(창50:20-21), ‘베냐민’은 그 사랑을 받는 ‘작은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25:40).
2) 메시아의 뒤를 이어 태어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부활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그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15:22-24),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6-7).
결론적으로, 이기주의와 현세주의를 뛰어 넘어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선민의 땅에 메시아가 오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는 마치 그 옛날 야곱의 애처 라헬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을 더 많이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십시오. 부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선민들에게 주십시오. 구속자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그들이 깨닫도록 역사해주십시오”. 그와 같은 이사야의 뜨거운 소망과 간구가 본문 가운데 고스란히 담기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환난 전에 메시아를 주시고 만민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태를 닫지 아니하시고 많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이고 메시아적인 삶을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이 탄생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같은 이방인출신 성도들도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간구합니다; “부디 우리 한민족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온 세상을 복음화하는데 크게 사용하여 주십시오. 그 일을 위하여 한반도의 통일도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아무쪼록 그와 같이 간구하는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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