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325강(사66:15-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4월 30일(토)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과 종말심판이 불신자와 외식하는 신앙인에게 임하다(사66:15-17).
본문에서 이사야는 미래에 여호와의 불 심판과 성령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그 옛날 유월절 사건과 엘리야의 승천 기록을 되돌아보게 합니다(출12:21-23, 왕하2:11). 그리고 그 예언은 훗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눅12:49-50).
그와 같은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그 깊은 내용과 메시지를 도출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b)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 (c)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사66:15); 놀랍게도 이사야가 불 심판과 수레구원에 대하여 한꺼번에 예언하고 있습니다;
(1)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사66:15a); 이사야의 이 대목 예언은 그 옛날 모세의 기록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1) 여호와의 강림에 대하여 최초로 묘사하고 있는 출애굽기 제19장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가마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19:18). 여호와께서 이 세상에 진면목으로 강림하실 때에 어째서 불 가운데 그리고 불에 둘러싸여서 강림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얼굴과 보좌에서 영광의 빛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태양보다도 더 찬란하며 매우 뜨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계21:23-24, 22:5). 따라서 그 빛과 열기로 말미암아 속된 자나 가증한 자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계21:27). 그리고 이 세상의 물질이 녹아 내리게 됩니다(벧후3:12).
2) 그와 비슷하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창조주의 불은 심판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 등의 성읍에 떨어진 유황불의 심판이 그러합니다(창19:24-25). 그리고 훗날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이 세상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눅12:29).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아직 종말적인 불 심판이 임하지 아니했기에 부디 세상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전하고 있는 만민구원의 복음을 듣고서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오기를 예수님이 소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2)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사66:15b); 불과 수레는 반대의 개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불이 심판의 도구라면 수레는 휴거나 승천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회오리바람은 수레를 하늘로 승천시키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1) 그와 같은 이치는 그 옛날 선지자 엘리야를 승천시킬 때에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니”(왕하2:11). 그러므로 본문에서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면 종말심판과 성도들의 구원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예언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종말심판이 불 심판이라면 성도들의 구원은 성령님의 임재와 동행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미 소개한 메시아의 말씀 그 뒷부분을 보면 그러합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49-50).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시는 메시아이십니다. 그 대속의 피를 믿는 자에게 성령님이 오셔서 영적으로 보혈을 발라주십니다. 그리하면 죽음의 심판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3)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사66:15c); 여호와 하나님의 노여움과 책망은 선민사회에 있어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외침을 통하여 오랜 세월 있어온 것입니다;
1) 그런데 여호와의 노여움과 책망이 바로 선민의 멸망으로 이어지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호와께서 처벌보다는 선민들의 회개를 더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이 이기적인 선민사상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에 나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현세구복적인 우상문화를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천국으로 이방인들과 함께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그렇지만 선민들의 신앙태도가 문제입니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외침에 대하여 매우 둔감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20세기 중반 1953년에 휴전을 하고 지금까지 남북대치상황에 있는 한반도의 정세와 같습니다. 개념상 ‘휴전’(休戰, to pause war)이라고 하는 용어는 잠시 전투를 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전투의 개시가 가능합니다. 그것도 사전에 선전포고를 하지 아니하고 일방적으로 전투를 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휴전’은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민족은 태연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마치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이 가장 안전하며 자신들이 영구적인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선민들이 꼭 그러합니다.
3) 그런데 이사야는 선민들이 그렇게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여호와)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66:15c). 어째서 그렇게 하나님의 노여움과 책망이 갑자기 불 심판으로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메시아의 오심으로부터 종말이 이미 시작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참고로, 훗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12:31-33). 요컨대, 자신의 인생 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난다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종말이 시작되고 이제는 최종적으로 심판이냐 구원이냐를 그 인생 가운데 선택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a)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b) 여호와께 죽임 당할 자가 많으리니”(사66:16);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위적인 불 심판에 인위적인 전쟁의 재앙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자가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어느 정도로 많아지는 것일까요?
(1)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사66:16a); 세상의 생물을 전부 몰살시켜버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두 가지 종류입니다. ‘불’과 ‘칼’입니다. ‘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유황불일 수도 있지만 핵폭탄일 수도 있습니다. 원폭이 엄청난 빛과 열을 동시에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칼’은 순수하게 전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종말심판은 신위적으로 그리고 인위적으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여호와께 죽임 당할 자가 많으리니”(사66:16b); 천재지변과 전쟁의 재앙으로 어느 정도의 인류가 죽임을 당하게 될까요? 훗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십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39-42). 한 마디로, 절반이 죽임을 당하게 됨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 요한의 계시록도 그러합니다;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니라”(계9:18). 심판의 초기에 벌써 인류의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끝나게 되면 절반 이상의 인류가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로, “(a)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b)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c)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d)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66:17); 외모를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그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사66:17a); 겉으로 보면, 거룩한 선민이거나 성도입니다.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따라 제사를 드립니다. 이웃이 보기에 율법도 잘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속과 이중성입니다.
(2)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사66:17b); 선민이 성전과 회당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동산에 올라가서는 이방 신과 우상에게 또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겸하여 섬기고 있는 종교행위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이중적인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선민들이 조상들의 하나님, 출애굽의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또한 이방 신과 우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으로 믿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완적인 방법으로 이방 신과 우상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계명의 첫째부터 어기고 있는 엉터리 신앙입니다.
(3)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사66:17c);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 신을 겸하여 섬기는 자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자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보는 데서는 율법이 정한 바대로 생활을 하지만 보지 아니하는 곳에서는 율법과 상관없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취지를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외식적인 신앙이며 이중적인 신앙행태입니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잘못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십니다;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사66:17c). 요컨대,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66:17d); 이사야가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시간의 흐름과 상관이 없이 영원히 적용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원칙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경청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 옛날 모세의 시대에 애굽에서 유월절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날 밤 유월절 양의 피가 문인방과 좌우 문 기둥에 뿌려져 있지 아니한 집에서는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앙이 한꺼번에 임하고 있습니다(출12:30). 반면에 그 피가 뿌려져 있는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고 있습니다(출12:21-23). 그것은 심판과 구원이 같은 날 밤에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마음으로 믿고 그 제자로 살아가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겠다고 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과 유일한 구원의 방법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하나님의 방법대로 믿고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감으로써 여러 성도님들이 모두 새 예루살렘 성에서 영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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