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20(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1. 02:27

봉천 할매20(작성자; 손진길)

 

흔히들 ‘춘삼월’에는 꽃바람이 분다고 말한다. 그 말은 일찍이 손수석이 조선에서 자라날 때 경주 월성 지역에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런데 손수석이 ‘쯔끼모도’라고 하는 일본성씨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근무하고 있는 북해도에서는 추운 날씨로 말미암아 4월이 되어야 비로소 ‘춘삼월’ 꽃바람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그 꽃바람이 1941년 4월에 홋카이도 탄광과 삼판에서 조선인 청년들 사이에 거세게 불고 있다. 그 이유는 4월 초순에 22세의 손수상이 조선 내남에서 온 신부감 박재순을 맞이하여 간단하게 혼례식을 올리고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신혼부부가 따로 생활하고 있는 작은 집 옆을 지나칠 때마다 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삼판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인 젊은이들이 놀리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엄청 그 신혼부부가 부러워서 지어내어 하는 이야기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조선인 일꾼이 50명 넘게 일하고 있는 대규모 벌목 현장에서 유독 손수상의 인물이 훤하다. 그는 키가 크고 미남자로 사내답게 생긴 조선인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된 박재순도 여자로서는 키가 크고 당차며 한 인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랑신부가 깨가 쏟아지게 알콩달콩 둘이서 마치 바퀴벌레처럼 꼭 붙어서 살아가고 있으니 그것이 한없이 부러운 것이다. 그들 미혼인 인부들이 부러워하고 있는 사람은 손수상 부부의 경우만이 아니다. 십장인 이도성도 물론 연장자라고는 하지만 떡하니 ‘함바 식당’에서 일하고 있던 인물이 좋은 손해선을 아내로 맞이하여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탄광에서 일하고 있는 내남 출신 조선인 광부들 4명이 비번인 날에는 어김없이 자신들의 젊은 아내가 일하고 있는 삼판의 ‘함바 식당’을 찾아온다. 며칠에 한번씩 만나고 있는 그들은 얼마나 ‘기러기 부부’ 흉내를 내는지 모른다. 멀리 일본 그것도 최북단 북해도까지 와서 며칠씩 떨어져 지내다가 정기적으로 서로 만나고 있으니 그 각별한 부부의 정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그러니 조선에서 온 미혼남성들은 하나같이 자신들도 빨리 신부감을 데려와서 한 살림 차렸으면 좋겠다고 마치 주문처럼 외고 있다. 그 말을 자주 듣게 되자 십장인 이도성이 엄청 미안했는지 처남이 된 손수석에게 말한다; “처남, 금년 4월에는 꽃바람이 유달리 심하게 불고 있어. 그래서 그런지 젊은 노무자들이 모두들 장가를 보내 달라고 나에게 타령조로 말하고 있네. 어떻게 해결방법이 없을까?”.

손수석이 웃으면서 말한다; “매형, 제가 일년에 몇 차례 조선에 출장을 가니 그때그때 그들이 신부감을 결정해 놓으면 일본으로 데려다 주지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 모두들 고향에 편지를 내라고 말씀하세요. 간절하게 결혼하고 싶으니 신부감을 구해달라고 말이예요. 그들이 번 돈을 고향집으로 보낼 때 그 이야기를 빠지지 말고 쓰라고 하고 되도록 빨리 신부감을 구해서 알려 달라고 말하세요. 그러면 제가 모두 인솔하여 한꺼번에 데려다 드릴께요”;

그러자 이도성이 걱정이 되는지 말한다; “처남, 그것은 좋은데 조선의 젊은 사람이 일본으로 들어오자면 반드시 수상경찰서에서 발행하는 ‘도항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이번에도 손수석이 웃으면서 답한다; “매형, 걱정이 태산입니다. 제가 설마 어선에 처녀들을 태워서 불법으로 들어오겠습니까? 하하…”;

 그것은 손수석이 영리하게도 이도성을 은근히 놀리고 있는 말이다. 그렇게 익살스러운 손수석을 하루 이틀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나이가 많은 이도성이 그만 ‘픽’하고 웃어 넘기고 만다.

그 모습을 보고서 손수석이 기분 좋게 말한다; “매형, 일단 신부감이 결정이 되면 그 편지를 제가 일본말로 번역하여 회사에 증거로 제시하고 회사에서 정식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만들어 받습니다. 물론 그 증명서류를 얻자면 조선의 신부감에 대한 상세한 인적사항이 필요하지요. 그러니 매형은 노무자들에게 신부감의 생년월일과 주소 그리고 인물사진을 그동안 서로 왕래한 편지와 함께 반드시 사전에 제출하라고 말씀하세요. 그 정보와 함께 당사자 이름 및 직책을 제게 주시면 제가 차질이 없게끔 그대로 처리를 하겠습니다”.

그때서야 이도성이 ‘아’하고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발한다. 그렇다. 처남이 된 손수석이야 말로 머리가 좋고 매사 업무의 처리에 있어서 빈틈이 없다. 그리고 조선사람들을 진심으로 돕고자 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도 이 먼 일본 북해도에서 그와 더불어 한식구가 되어 안심을 하고 잘 지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최근에는 손수석이 형수 박재순도 그렇게 하여 이곳으로 데리고 오지를 않았는가?

한문에 밝아 고향의 서당에서 훈장일을 했다고 하지만 이도성 자신이야 말로 처남 손수석에 비하면 한참 배울 것이 많다고 하는 사실을 거듭 깨닫고 있다. 그러니 나이가 12살이나 많은 자신이 그 앞에서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난 젊은 인재를 처남으로 두고 있으니 마음 한 구석이 든든하다. 그렇게 나이를 떠나서 이제는 처남과 매부 사이가 되어 그 의리와 우애가 한층 두터워진 이도성과 손수석인 것이다;

비록 북해도의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는 것이 고달프기 그지 없다고 하지만 일본노동자와 같은 임금을 제때에 받고 있으니 그것이 조선에서 온 광부들에게는 큰 보람이다. 그 돈을 고향으로 보내어 전답도 사고 소도 사게 하고 있는 그들이다. 그러니 그 소문이 고향에서 자자하다. 그래서 그런지 신부감을 구한다고 하니 자원하는 처녀들이 있다;

 그 결과 1941년 5월부터 손수석이 조선을 방문할 때마다 이미 결정이 된 신부감을 데리고 온다. 그래서 벌목현장에서 가까운 조선인 마을에서는 계속 신랑신부가 탄생하고 있다;

손수석은 1940년 11월에 고향인 내남에서 30명의 일가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 가운데 21명이 미혼이다. 자신의 누나 손해선과 형 손수상이 벌써 북해도에서 결혼을 하였으므로 이제 미혼 남성은 19명이다. 그들 가운데 손수석 자신의 동생인 손수권을 빼고 나머지 18명이 모두 1941년과 1942년에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된다. 그 일을 손수석은 두 해 동안 열심히 도와준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삼판으로 데리고 온 조선인 인부들이 많이 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도 그런 방법으로 북해도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렇게 함께 웃으며 가정을 꾸리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가운데 거침없이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홋카이도의 매서운 추위와 함께 그들의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