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19(작성자; 손진길)
1941년 1월이 되자 손수석의 형인 손수상의 나이가 22살이다. 손수상은 손영주의 차남이다. 동시에 손영주의 친형인 손영한의 양자이다. 손영한은 자신의 아들이 된 손수상을 일본 북해도로 보내고 지금은 부인과 함께 딸 둘을 데리고 농사를 지으며 내남 너븐들에서 살고 있다.
손영한은 1880년생이므로 1941년 1월이 되자 그의 나이가 62세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자신과 부인 이신자와의 사이에 태어난 4딸 가운데 2딸은 이미 시집을 갔다. 이제 남은 두 딸 곧 손영옥이 1923년생으로 금년에 19세이고 막내딸 손자옥이 1926년생이므로 금년에 16세이다.
그러므로 셋째 딸인 손영옥을 금년이나 내년에 시집을 보내는 것이 딱 좋다. 당시 처녀나이 19세나 20세가 결혼 적령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영한 부부는 자신들이 더 늙기 전에 양자인 손수상을 결혼시키고 손자를 보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래서 남편 손영한의 부탁으로 이신자가 동서인 봉천 할매 정애라를 방문하여 손수상의 혼사문제를 거론한다. 정애라도 손수상이 금년에 조선의 나이로 22살이 되었으므로 결혼을 시키는 것이 좋다고 찬성을 한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가 일본 북해도에 가 있으니 어떻게 혼사를 진행시켜야 할지 그것이 걱정이다.
하지만 양어머니가 되는 이신자도 금년에 나이가 56살이나 되므로 양아들 손수상의 혼사를 더 미룰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람들을 통하여 일본에 건너가서 손수상과 함께 살 수 있는 신부감을 널리 구하고 있다. 그때 고령 박씨 집안의 똑똑한 딸 박재순이 신부감으로 나서게 된다. 그녀는 답답한 조선의 시골을 떠나 일본에 가서 마음껏 살고 싶은 것이다;
그야 말로 사진과 편지로 이루어지는 결혼이다. 손수상이 신부감의 사진을 보더니 동생인 손수석과 상의를 한다. 손수석이 사진을 보니 영리해 보인다. 또한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어보니 박재순이 1924년생이고 동네에서는 똑똑한 처자라고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둘째 형인 손수상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좋다고 찬성을 한다.
그 말에 힘을 얻었는지 손수상은 양부모와 친부모에게 그녀와 결혼을 하여 함께 살고 싶다고 답변을 한다;
그래서 손수석이 회사에서 조선으로 출장을 가는 길에 내남에서 박재순을 일본으로 데려 오기로 한다. 그때가 1941년 3월달이다.
손수석이 조선으로 출장을 가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다시 춘궁기가 시작이 되고 있으므로 그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쌀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인근에 있는 다른 석탄회사에서도 똑같은 식량문제가 발생하자 쌀을 구할 방도가 없어서 수소문을 하여 쯔끼모도인 손수석 자신에게 그 일을 부탁한 것이다.
그러므로 쯔끼모도는 후쿠다 부장에게 그 일을 진행하자면 적어도 2주 정도 비밀리에 섭외활동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서 넉넉하게 여비를 받아 출장에 나선다. 그는 그 일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조선의 고향에서 형수감을 데려 오기 위하여 3월 중순에 홋카이도를 출발하는 것이다;
먼저 일본 동경에 들린 손수석이 이번에는 안춘근이 운영하고 있는 ‘쯔끼모도 쌀 상회’ 뿐만 아니라 쳥년학교의 선배인 ‘손철호’를 방문한다. 손철호는 동경의 큰 부동산회사에서 경리로 근무하고 있다. 그런데 손수석이 아무 연락도 없이 직접 회사로 찾아갔더니 그가 깜짝 놀란다.
손철호는 작년 10월말에 부산에서 우연히 손수석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손수석이 갑자기 자신의 회사로 찾아온 것이다. 무슨 급한 일일까? 궁금하여 손철호가 급히 물어본다; “수석이 자네가 어쩐 일인가? 해가 바뀌니 이 별볼일 없는 선배에게 늦게 세배라도 하려고 일부러 방문을 하고 있는가?”.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이 ‘하하’라고 웃으면서 답한다; “원 참, 선배님도 후배에게 별 짓궂은 농담을 다하십니다. 오늘 선배님은 제게 참으로 볼일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찾아온 것이고요…”. 손철호가 손수석의 그 말에 정색을 하면서 묻는다; “그래, 그 볼일이라고 하는 것이 무언가?”.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면서 뜸을 들인다; “참, 선배님, 그 유촌 아가씨와는 혼례를 잘 치루었습니까?”. 손철호가 후배인 손수석이 화제를 바꾸는 것을 보고서 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찾아 왔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여럿이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을 피하여 조용한 방으로 가자고 한다.
부동산 경리실 옆에 별실이 있는 것을 보니 그 방에서는 밀담을 나누어도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손수석이 그 방에서 조용히 말한다; “선배님, 제가 알기로는 우리 청년학교 선배 중에 한 분이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어 부산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어느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손철호가 빙그레 웃는다. 그러면서 기분 좋게 대답한다; “오늘 수석이 자네가 나를 참 잘 찾아온 것 같아. 부산에서 조선총독부 일을 하고 있는 그 일본인 동창이 바로 나와 친한 모리 상이야. 그는 부산에서 미곡을 배분하고 수송하는 일을 전담하고 있지. 작년 11월 나의 혼사 때에도 일부러 참석을 했더군”.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은 오늘 손철호 선배를 찾아온 것이 참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리 상을 만나야 할 일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철호 선배에게 각별하게 부탁을 한다; “선배님, 사실은 저희 홋카이도 석탄회사에서 광부들이 많이 일을 하고 있는데 양식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쌀을 구하기 위하여 이렇게 신참인 저까지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니 좀 도와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 손철호가 말한다; “나야, 같은 월성 사람인 자네를 도와주고 싶지. 특히 자네와 나는 같은 뿌리가 아닌가? 월성 손씨인 자네나 밀양 손씨인 나나 모두 시조가 신라시대 월성의 문효공 손순 할아버지이시지. 그러니 말해 보게.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나?”.
역시 판단이 빠르고 화끈한 성격의 손철호 선배이다. 그래서 손수석이 부탁한다; “그 모리 상에게 보내는 당부말씀을 선배님 명함 이면에 간단하게 써주십시오. 북해도 탄광에서 양식이 부족하니 쌀을 좀 배분해 달라고 후배가 일부러 찾아왔다고 하면서 아무쪼록 도와 달라고 적으시면 됩니다. 저를 그렇게 소개해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부산에 가서 그 모리 선배를 만나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손철호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간단하게 그러한 내용의 추천명함을 써준다. 손수석은 그 명함편지를 고이 품에 간직하면서 묻는다; “참, 그런데 그때의 형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 말에 손철호가 답한다; “허, 이제 급한 용무가 끝났으니까 내 신상이야기를 묻는가? 알겠네. 내가 얘기를 해줌세. 내 고향 천북에는 부모님과 여동생들이 농사를 짓고 있어. 내가 여기서 돈을 벌어 고향으로 보내고 있지. 그래서 내 집사람은 결혼을 하고 아예 시집에 들어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또 시누들을 돌보면서 살고있어. 착한 사람이지…”.
그 말에 손수석이 동의를 한다; “그날 잠깐 뵙고 말씀을 나누었지만 참으로 선량한 사람으로 보이더군요. 선배님께서 결혼을 잘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부산에 들렀다가 돌아와서 다시 한번 들르겠습니다”. 손철호가 고개를 끄떡인다. 그날 그들은 그렇게 헤어진다. 급한 업무의 처리가 우선인 그들이다.
일본인 동창 모리 상이 손철호와 참으로 친한 모양이다. 그 명함편지를 부산에 가서 그에게 보여 주었더니 쯔끼모도에게 얼마나 친절한지 모른다;
그 덕분에 손수석은 회사의 애로사항을 거뜬하게 해결하고 또한 이웃 회사에도 쌀을 공급할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사실 손수석은 작년 봄에 운이 좋게도 부산에서 그 일을 담당하는 일본인 관리를 만나 그를 잘 설득하여 자신의 회사에 쌀을 공급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일년 사이에 담당자가 바뀌어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하지만 천우신조로 새로운 담당자가 선배 손철호의 절친인 모리 상이었기에 이번에도 쌀 문제를 해결하였다. 더구나 이웃 회사의 건도 함께 처리를 하였으므로 이제 손수석의 수수료 몫이 더 커진 것이다.
그 일을 마치고 손수석은 고향을 방문한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숙모인 이신자와 함께 처자의 집을 방문한다. 미리 연락을 해두어서 그런지 형수감인 박재순이 부모님께 절을 드린 다음에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온다. 손수석이 보기에 형수감 박재순은 보통 처녀가 아니다. 정처모를 먼 길을 혼자서도 능히 떠날 수 있는 그러한 당찬 여인으로 보인다;
손수석은 형수감 박재순과 함께 일본 동경으로 온다. 그 다음에 박재순을 안춘근의 집에 이틀간 묵게 한다. 그 사이에 손수석은 동경에서 처리해야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 먼저 손수석은 안춘근에게 이번에는 미쯔비시 뿐만 아니라 미쯔이 회사에도 쌀을 동일한 방법으로 보내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선배인 손철호를 찾아간다. 그에게 진 신세를 어떤 방법으로라도 갚아야 한다. 그래서 우선 크게 한턱을 낸다. 그들은 1박 2일 동경의 술집을 전전하면서 술을 마시고 회포를 푼다. 물론 그 모든 비용은 손수석이 감당한다. 그러자 취중에 손철호가 한마디를 한다; “수석아, 나도 일본 땅에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문득 손수석보다 5살이나 연상인 손철호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하지만 그는 말을 이어간다; “너나 나나 모두 조선이 가난하여 이곳 일본으로 건너와 고학을 하면서 야간 직업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먹고 살 수가 있어. 그러니 수석아 너도 돈을 많이 벌어라, 나도 많이 벌고…우리 그렇게 가족과 고향을 위해서 함께 일을 해보자고...”.
손철호가 입으로 ‘후우’하고 술기운을 내품으면서 말을 계속한다; “나는 수석이 너를 보고 있으면 나를 보고 있는 것과 같아. 그러니 나를 형으로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동경으로 나를 찾아와. 내가 근무하고 있는 부동산회사에는 돈이 많은 일본사람들이 출입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 상당수가 사실은 내 고객이야”;
손수석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당사자의 입에서는 처음으로 듣고 있는 구체적인 신상이야기이다. 그래서 귀를 기울인다. 선배 손철호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나는 부자인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의 돈을 늘려주면서 그렇게 살고 있어. 그 덕분에 나도 돈을 좀 만지고 있지. 그러니 수석아, 급히 돈이 필요하면 내게 찾아와. 내가 얼마든지 융통을 해줄께…”.
취중에 진담을 하고 있는 손철호 선배이다. 그 취한 모습을 보고서 손수석은 그의 말처럼 자신의 처지나 선배의 처지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다같이 가난한 조선의 양반집에서 태어나 개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작금의 조선의 농촌은 침략전쟁을 지원하고 있는 조선총독부의 착취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다. 그곳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자면 일본에서 고학을 한 자신들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숙명인가 보다…
동경시내에서 술에 취해 어깨동무를 하고서 걷고 있는 그 두 조선청년의 머리 위에 무심한 거리의 가로등만이 밝은 빛을 간헐적으로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두사람이 동경시내를 걷고 있는 사이에 1941년 3월이 소리도 없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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