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16(작성자; 손진길)
3. 봉천 아지매가 봉천 할매가 되다.
1938년 가을걷이를 앞두고 봉천 아지매 정애라는 한가지 걱정이 앞선다. 그것은 며느리 김옥순의 배가 불러오기 때문이다. 김옥순은 추수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므로 불러오는 배를 천으로 칭칭 동여매고서 논으로 나오고자 한다. 그만큼 그녀는 농사일을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시아버지 손영주와 시어머니 정애라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다. 귀한 손주를 임신한 며느리를 일꾼으로 계속 부리다가 유산이라고 하게 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느리 김옥순에게 간단한 집안일만 하고 뱃속의 애기를 잘 돌보라고 지시한다;
그 대신에 추수를 앞두고서는 아직 어리지만 넷째 아들 손수권과 막내 아들 손수태로 하여금 논으로 나와서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라고 말한다. 그러나 1938년 여름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나이가 13살과 8살에 불과하다. 그러니 제대로 농사일을 도울 수가 있는 나이가 아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벼 베기가 시작이 되면 10마지기가 훨씬 넘는 논에서 추수를 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다. 그래서 봉천 아지매가 가장 걱정을 많이 하고 있을 때에 생각지도 못한 일꾼이 한사람 나타난다. 1934년 1월에 시집살이를 하기 위하여 집을 떠난 봉천 아지매 정애라의 맏딸 손해선이 5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보따리를 싸가지고 친정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정애라와 손영주가 깜짝 놀라서 딸에게 물어본다. 그랬더니 그 대답이 두가지 점에서 걸작이다; 첫째, 손해선이 마치 남의 말을 하듯이 천연덕스럽게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이 개화가 된 지 6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불임을 이유로 며느리를 내쫓는 일이 버젓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해선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가 남편과 합방한지 5년이 지나도 아기를 임신하지 못하니까 시어머니가 불임 며느리를 자기 집에 둘 수가 없으니 보따리를 싸가지고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시어머니는 손자를 얻기 위하여 며느리를 본 것이므로 불임 며느리는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구박을 하니 제가 더 이상 시집살이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남편도 자신은 독자이기 때문에 모친의 말씀 그대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딴 여자를 아내로 얻어야만 한다고 제게 말했어요…”;
봉천 아지매 정애라가 말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기를 못 낳는다는 핑계로 며느리를 쫓아내고 있나? 조선이 망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칠거지악’을 거들먹거리고 있는가? 그리고 부부 가운데 누가 불임인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만약 새로 며느리를 얻어서 그때도 손주를 얻지 못하면 그때는 어찌할 것인가?”.
정애라가 얼마나 억울하고 속이 상했으면 그런 말을 딸 앞에서 했을까? 그렇지만 참으로 요상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한편으로는 시집에서 보따리를 싸서 친정으로 돌아온 딸을 보면 속이 상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살림 밑천’이라고 하는 맏딸이 집에 와 있으니 봉천 아지매의 마음이 그렇게 편한 것이다;
사실 그렇다. 그해 추수는 딸 해선이가 도와주자 별로 힘이 들지가 않는다. 그 덕분에 며느리 김옥순은 아기를 얼마나 잘 배술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 결과 다음해 1939년 4월 4일에 김옥순이 아주 건강한 아들을 생산한다;
그날 손영주와 봉천 아지매 정애라는 비로소 할아버지와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들 부부는 첫 손자에게 ‘손진화’라는 이름을 선사한다. 집안을 화려하게 꽃피우는 장손이 되라는 의미이다.
그때 손영주가 56살이고 정애라가 49살이다. 당시로서는 첫 손주를 보기에는 상당히 늦은 나이이다. 그렇지만 정애라는 그때부터 ‘봉천 아지매’가 아니라 ‘봉천 할매’로 불려지게 된다.
봉천 할매가 된 그녀는 남편과 함께 4월 27일에 경주 오일장을 보러 가면서 교리에 살고 있는 친정 집을 방문한다. 며느리 김옥순이 아기를 낳은지 3칠이 지나자 벌써 부엌일을 도맡아서 하는 것을 보고서 집을 나섰기에 그녀는 마음이 가볍다.
경주 남천내 교리에 살고 계시는 친정 아버지 정진평과 어머니 김경화가 이제는 고령이다. 각각 연세가 85세와 83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 정한욱 내외가 교리 집으로 들어와서 함께 기거하고 있다. 경주 성동 웃시장에 나가서 식당을 경영해야 하지만 노쇠한 부모님도 동시에 보살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날 친정아버지 정진평이 사위 손영주와 딸 정애라의 손을 잡으면서 따뜻하게 한마디를 한다; “너희들도 이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되었구나. 나도 증조할아버지 소리를 듣게 되고…내가 참으로 오래 산 것이야. 나는 고향이 본래 동래 봉천마을이지만 이제는 경주에서 산 세월이 훨씬 길어. 그러니 벌써 아들 한욱이에게도 말했지만 내가 죽으면 처가의 선산이 있는 외동 서배 마을 뒷산에 묻어 다오. 그래야 내자와 함께 편히 그곳에서 안식할 수가 있을 것이야. 알겠나, 손서방?”.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정애라의 친정어머니 김경화가 한마디를 한다; “여보, 그러면 당신은 딴데 가서 묻히려고 생각했어요? 죽어서도 내 곁이 가장 좋을 거예요. 여보, 우리 이만큼 오래 백년해로를 했으니 이제 함께 그 따뜻한 서배 마을 선산에 올라가서 좋은 햇살을 받으며 그렇게 지내요. 그래야 자식들이 덜 힘들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있는 손영주와 정애라의 마음이 어찌 그리 서글픈지 모른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선산으로 올라가서 그 땅밑에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인가? 몸은 그렇게 땅에 묻히고 넋이 남아서 자손들의 집터를 떠돌면서 그들이 잘 되기만을 소원하고 비는 그러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인가? 결론이 모두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허무하다.
그렇게 마음이 울적해져서 그런지 그날 손영주와 정애라는 경주 아래시장에 들렀다가 오래간만에 사정리에 있는 ‘회생의원’을 찾았다. 봉천 할매 정애라의 소꿉친구인 간호사 오예은이가 여전히 근무를 하고 있다.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서 그런지 오예은은 급한 일만을 처리하고 정애라 부부를 만난다.
그날 따라 오예은은 귀한 커피를 타서 정애라 부부에게 내놓는다. 조선사람의 입맛에 맞추려고 그랬는지 설탕을 많이 넣어서 꽤 달달하다. 그리고 그녀는 커피와 함께 맛을 보도록 서양 케익을 두 조각 내놓는다. 그것을 보니 오예은의 부친이 미국 선교사이며 의사인 ‘오하원’이라는 생각이 다시 난다;
그날 간호사 오예은과 의사 오예준은 정애라가 할머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축하를 한다. 자기 일같이 동무의 좋은 소식을 기뻐하는 그들이 참으로 보기가 좋다. 그래서 그날 손영주도 그들을 보고 앉아서 얼마나 마음이 푸근하고 좋은지 모른다.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손영주와 정애라는 내남 너븐들 집으로 돌아온다.
30리길을 부부가 걸어오면서 보니까 벌써 4월하순이라서 그런지 봄의 기운이 제법 느껴진다. 새싹들이 움트고 이제는 나무에 연두색이 입혀지고 있다. 이렇게 조선 고향 땅에는 봄이 또다시 찾아오고 있는데 재작년말에 일본 동경으로 들어간 셋째 아들 손수석은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낯설고 물이 선 그곳에서 홀로 지내면서 어째서 1년반이 되도록 아직 소식 한 자가 없을까?
손영주와 정애라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셋째 아들 손수석이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여유가 없을까? 할머니 이채령의 말은 그렇게 잘 듣고 어째서 부모인 자신들의 말은 듣지를 않는가? 하지만 단신으로 일본 동경으로 들어가서 고학을 하고 꼭 성공을 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떠난 아들 손수석을 생각하면 그들 부부도 가슴이 먹먹하고 아프다.
그래서 그날 용장을 지나 이조 가까이 오면서 다리목에서 남편 손영주가 아내 정애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보, 내가 무능하고 못나서 우리 똑똑한 아들 수석이 마음이 많이 상했을 거예요. 내가 애비 노릇을 제대로 못한 거지요. 400석지기 재산이라도 제대로 지켰더라면 그 녀석이 홀로 일본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내가 당신에게도 미안해요. 너무 무거운 짐을 당신에게 지운 것만 같아서…”.
그 말을 듣자 봉천 할매 정애라가 남편 손영주의 얼굴을 한참 쳐다본다. 그러면서 다정하게 남편의 손을 잡으면서 말한다; “그 말은 반만 맞아요. 왜냐하면, 가난한 이웃에게 양식을 퍼주기 좋아한 당신이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니 그것이 미워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는 당신이 밉지가 않아요. 당신같이 그렇게 생계가 어려운 이웃을 천심으로 도와준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 복을 자식들과 자손들이 훗날 반드시 받게 될 거예요”.
그 말을 듣자 손영주가 아내 봉천 할매의 손을 꼭 쥔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결혼을 참 잘한 모양입니다. 자식을 당신에게서 여섯이나 얻었을 뿐만 아니라 집안재산을 전부 날리고서도 아내로부터 그렇게 좋은 칭찬을 듣고 있으니 말예요. 참으로 고맙소, 여보…”;
그렇게 좋은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손영주와 정애라이다. 그러한 부부화합의 장이 있고 나서 일년 남짓 지나자 1940년 6월에 아들 손수석의 편지가 그들 부부에게 도착한다. 손수석이 1939년 12월에 일본의 최북단인 북해도의 탄광회사에 경리로 취직을 하였으며 날씨가 추운 대신에 급료가 높아 그 동안 모은 돈을 집으로 보낸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동봉한 수표를 들고서 시내에 있는 은행을 찾아갔더니 참으로 많은 돈을 지불한다.
손영주와 정애라가 지닌 재산보다 더 큰 액수이다. 어떻게 반년 사이에 그러한 큰 돈을 번 것일까? 그들 부부는 그것이 궁금하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지 아니하여 그해 1940년 10월달이 되자 손수석이 멋진 옷을 입고서 고향에 나타난다. 그의 가방속에서 꺼낸 돈이 부모님을 또다시 놀라게 한다. 그 액수가 엄청난 것이다. 그야말로 아들 손수석의 ‘금의환향’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놀라운 일이 내남 너븐들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 땅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손수석은 일본 탄광에서 일할 인부와 북해도 삼판에서 일할 노동자를 구하기 위하여 고향에 온 것이다.
고향사람들 가운데 젊은 청년들이 손수석을 따라 일본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급료가 일본인 노동자와 같은 액수이다. 1941년과 1942년에는 분명히 그러하다. 강제징용이 적극적으로 실시가 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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