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13(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30. 06:48

봉천 할매13(작성자; 손진길)

 

봉천 아지매 정애라의 셋째 아들인 손수석은 1937년 12월 26일 오후 2시경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별세하신 할머니 이채령이 자신에게 준 편지에는 부산항 근처에 살고 있는 장인식 교장과 안성기 교장의 주소가 적혀져 있다. 주소를 보니 그들은 같은 지역에 서로 이웃하여 살고 있다.

어느 집을 먼저 방문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눈앞에 장인식 교장의 집이 먼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집 대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손수석이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집안의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안채와 사랑채에 어른들의 신발이 많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대충 세어보아도 양쪽을 합하면 12명 정도가 되는 것 같다.

무슨 날인가 싶어서 손수석은 사랑채 가까이 다가가서 큰 소리로 외친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 저는 월성 내남에서 장인식 교장 선생님을 뵙고자 찾아 왔습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방문이 왈칵 열리는데 언뜻 보아도 머리가 하얀 노인이다. 80줄이 되어 보이는 상늙은이이다. 그가 급히 묻는다; “내남에서 왔다고 하면 서배 할배의 집안 사람인가?”.

손수석은 조부의 택호가 그 노인의 입에서 나오자 반갑기가 그지 없다. 그래서 얼른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네, 어르신, 저는 서배 할배의 친손자인 손수석이라고 합니다. 장인식 교장 선생님이 되십니까?”. 그 말을 듣자 그 노인이 ‘허어’라고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조금 늦으셨구만, 젊은이… 하루만 일찍 찾아 왔어도 발인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을 터인데... 날씨가 추우니 방안으로 들어와서 일단 몸을 녹이고 옆방으로 건너가서 나와 함께 고 장인식 교장의 영정을 뵙도록 하세…”.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이 깜짝 놀란다. 장인식 교장께서 별세를 하시고 어제 장례를 마쳤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랑방의 옆방에 영정을 모셔 두었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악을 한 손수석은 사랑방으로 들어가지를 아니하고 그 옆방 앞으로 가서 디딤돌 위에 먼저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경건하게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서 영정이 놓여 있는 상을 보고서 그 앞에서 재배를 올린다;

그 모습을 사랑방문을 통하여 지켜보고 있는 눈이 많다. 먼저 그 노인이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듯이 말한다; “허허, 서배 형님께서는 똑똑한 손자를 두셨구만. 먼저 영정을 보고 재배를 올리는 것을 보니 상황판단이 빨라…”. 대견하게 생각했는지 친절하게 손수석에게 사랑방으로 건너오라고 말한다. 사랑방과 그 옆방에는 사이문이 있어서 쉽게 건너갈 수가 있다.

손수석은 사랑방에 들어가서 그 노인에게 먼저 절을 한다. 이어서 그 노인 옆에 앉아 있는 6사람에게도 절을 하고자 한다. 그때 그 노인이 급히 손수석의 행동을 말리면서 말한다; “여보게 서배 형님의 손자,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알고 또 지금 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서 절부터 하고자 하는가? 먼저 내 이야기를 듣고서 절을 하도록 하시게. 그것이 바른 순서야…”.

그 노인이 먼저 자신의 정체를 말한다; “나는 고 장인식 교장과 함께 서당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던 안성기 선생이야. 나중에는 외동의 소학교에서 교장을 했지. 그리고 이쪽의 4사람은 고 장인식 교장의 상주들이지. 이쪽부터 아들인 장철민, 손자인 장호성, 증손자인 장경국 그리고 오사카에서 온 외손자 배인근의 순서일세. 그 다음 저쪽에 있는 두사람은 내 아들인 안용환과 동경에서 온 내 손자 안춘근이야. 이제 서로 인사를 해도 좋아”.

손수석은 그들의 연배에 맞게 절을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의 생년이 다음과 같다; 고 장인식 교장의 아들 장철민이 1879년생, 손자 장호성이 1903년생, 증손자인 장경국이 1924년생이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온 외손자 배인근이 1904년생이다. 안성기 교장의 아들인 안용환이 1880년생이고 동경에서 온 손자 안춘근이 1910년생이다.

손수석 자신과 비슷한 연령은 장경국인데 그는1살 연하이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온 배인근이 손수석 자신보다 19살이나 위이다. 또한 동경에서 온 안춘근은 13살 연상이다. 그 가운데 손수석이 당장 기억을 해야만 하는 사람은 오사카 출신인 ‘배인근’과 동경 출신인 ‘안춘근’이다. 그들과 함께 일본으로 손수석 자신이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침 내일 떠나는 배로 그 두사람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귀국을 한다고 하므로 손수석도 그들과 동행하기로 한다. 그렇게 하도록 안성기 교장이 참으로 열심히 도와준다. 그는 손수석이 심상소학교를 금년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학을 한 후에 돈을 벌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서배 할배를 보듯이 그렇게 자기 일처럼 도와주려고 한다. 고마운 분이다.

그날 안성기 교장은 손수석을 안채 안방으로 데리고 가서 고 장인식 교장의 미망인인 최순옥 여사에게 인사를 시킨다. 손수석이 최여사에게 절을 하였더니 그렇게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남 덕천의 지주 최사권의 일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에서 함께 손수석의 절을 받은 안성기 교장의 부인인 이다연은 손수석의 할머니 이채령의 안부를 묻는다.

이다연은 개인적으로 이채령의 절친인 이가연의 여동생이다. 손수석이 할머니 이채령 여사가 금년 7월에 별세를 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이다연이 그렇게 슬퍼한다. 자신보다 3살 연상인 이채령 여사가 별세를 하였으니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3년후에는 자신도 그 나이가 되기 때문이다.

손수석은 할머니 이채령 여사의 오랜 지인들을 만나 그날 하루를 장인식 교장의 집에서 푹 쉬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1937년 12월 27일 오전 10시에 일본으로 가는 배를 부산항에서 타게 된다. 그 배에는 오사카로 가는 배인근과 동경으로 가는 안춘근이 함께 타고 있어서 참으로 든든하다;

그들 3사람은 모두 오사카에 있는 배인근의 집에 먼저 들린다. 그 집은 사실 우동장사를 하고 있는 배종성과 장화옥 부부의 집이다. 그 집에 배인근이 아내와 함께 살면서 그 우동가게를 같이 경영하고 있다. 배종성의 부친 배설과 모친 오경자는 벌써 고인이 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배설이 1848년생이고 그의 아내 오경자가 1856년생이기 때문이다.

배종성은 1901년에 오사카 자신의 집을 서배 할배 부부가 방문한 적이 있기에 그 손자인 손수석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배종성의 아내인 장화옥은 덕천에서 선생을 한 장인식 교장의 딸이기 때문에 고향사람들의 안부를 손수석에게 물으며 굉장히 친절하다.

그 집에서 이틀을 머문 다음에 손수석은 안춘근을 따라 동경으로 간다. 손수석이 오사카가 아니라 동경으로 간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고학을 하면서 돈을 벌기에 역시 일본의 수도인 동경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하나는, 오사카의 배종성의 집에서는 우동가게를 경영하고 있으므로 손수석이 크게 도우면서 배울 것이 없다. 그 대신에 동경에 살고 있는 안용운 부부는 쌀가게를 경영하고 있으므로 손수석이 배울 것도 많고 사환으로 일할 구석이 많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손수석의 판단이 정확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경 안용운의 쌀가게 일을 도와주면서 그가 야간직업학교인 ‘청년학교’에서 상업과 부기 등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용운의 저택이 넓어서 손수석이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가 있게 된다. 동경생활이 처음인 손수석을 안춘근이 큰형처럼 얼마나 잘 챙겨주는지 모른다.

손수석이 안용운의 쌀가게에서 사환으로 일을 하면서 2년간 야간 청년학교에서 직업교육을 받고 있을 때에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1939년에 들어서자 일본제국이 중국에서의 전투가 치열하여 많은 청년들을 군대로 끌어간다;

젊은 인력이 부족한 일본의 산업현장에서는 일손을 구하느라고 야단이다. 그러므로 손수석에게 마땅한 취업의 기회가 일찍 찾아온 것이다.

1939년 11월말에 손수석은 청년학교에서 2년간 상업을 배워서 훌륭한 회계와 서기의 역할을 할 수가 있게 된다. 따라서 그는 가장 급료를 많이 준다고 하는 홋카이도의 탄광에서 경리로 일하고자 지원한다;

 일본의 청년들은 홋카이도가 너무 추운 곳이라 감히 그곳에서 일하고자 지원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손수석은 조선에서 온 청년이므로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못 갈 곳이 없다. 그래서 1939년 12월부터 홋카이도의 탄광에서 경리업무를 보는 서기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돈을 벌 수 있게 되자 비로소 조선의 내남 너븐들에 있는 부모님께 편지로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월급을 송금한다. 그것으로 당장 필요한 곳에 사용을 하시라는 것이다.

그 편지와 돈을 받고서 봉천 아지매 정애라는 얼마나 뒷방에서 홀로 울었는지 모른다. 그 만주보다도 더 추운 곳에서 서기로 일하면서 아들 손수석이 벌어서 보내온 귀한 돈이다. 그것을 그냥 헐어서 사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 돈을 차곡차곡 모아 전답을 사려고 한다;

반년치 월급이 송금이 되어 왔기에 1940년 7월에 정애라는 엄청 많은 전답을 살 수가 있다. 그만큼 조선의 농지 값이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 손수석이 보내오는 돈이 달이 갈수록 굉장히 많아지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그것은 도저히 정상적인 급료가 아니다. 손수석이 무슨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