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12(작성자; 손진길)
1937년 7월 23일 내남 너븐들 손영주의 집에서 초상이 난다. 노마님 이채령이 향년 82세로 별세한 것이다. 부고를 들은 너븐들 사람들이 가장 먼저 문상을 온다. 그 다음에는 안심과 박달에 흩어져 살고 있는 월성 손씨 일가들이 조문을 온다.
비록 바쁜 농번기이지만 그들은 만사를 젖혀 두고 서배 할배 손상훈의 미망인인 이채령의 부고를 듣고 조문을 오지 아니할 수가 없다. 서배 할배 손상훈이 그들의 가주로서 그리고 대지주로서 그들 일가와 소작농들에게 베푼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1930년 1월 16일에 서배 할배가 운명을 하자 상주와 일가들이 그 산소를 너븐들 뒷산 선산에 섰는데 이제 7년반이 지나 1937년 7월 23일이 되자 부인 이채령의 묘소가 그 옆에 생기게 된다. 장례를 삼일장으로 했기 때문에 7월 25일에 일가 젊은이들이 상여를 매고 너븐들 선산으로 올라간다.
7년전에 서배 할배 손상훈의 산소를 만들 때에 그 옆에 부인의 산소를 이미 가묘로 마련해 둔 바가 있다;
그러므로 그곳으로 운구를 하여 부부가 나란히 묘소를 가지게 매관을 하고 장례를 지낸다. 그날 특별히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이 둘 있다;
한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시어머니를 떠나 보내는 외며느리 정애라이다. 봉천 아지매로 불리고 있는 47세의 정애라는 중년의 나이에 자상한 시어머니 이채령을 여윈 것이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2년전에 400석지기의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무능한 아들을 대신하여 시어머니 이채령이 며느리인 자신에게 사과를 하면서 논 10마지기를 살 수 있는 거금을 내놓았다. 그 돈으로 지금까지 그녀가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어 그래도 식구들이 배를 굶지않고 살아들 오고 있다. 그러한 형편이니 어떻게 시어머니 이채령의 은혜를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또 한사람은 셋째 손자인 손수석이다. 그는 할머니 이채령의 품이 참으로 그립다.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준 조모님인지 모른다. 그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과 같다. 손수석 자신의 장래를 열어주고자 노고를 아끼지 아니하신 할머니 이채령의 은혜는 모친의 사랑보다 더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손수석은 할아버지의 묘소 옆에 새로 생긴 할머니의 묘소를 바라보고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이제 할머니가 아니 계시니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 내 앞날을 위하여 금년말에 소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일본으로 떠나가야만 하는데 이제는 상의할 할머니가 아니 계신다. 나는 할머니의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마음을 굳건하게 먹고 눈물을 삼키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다”.
15세의 소년으로서는 보기가 드물게 당차고 영리한 손수석이다. 장차 그가 집안과 지역사회에 어떤 파란을 일으킬 것인가?
그렇게 7월 25일에 초상을 치르고 9월 12일에는 다시 고 이채령의 산소를 방문하여 상석에 음식을 차리고 49제를 드린다. 그날은 더 바쁜 농번기라 손영주의 가족과 손영한의 가족만이 49제 행사에 참여를 한다. 그리고 나서 손영주 가족과 손영한의 가족은 가을 추수를 위하여 바쁜 일정에 쫓기게 된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니 10월 중순이 되고 이내 11월달이 된다. 농한기이다. 그 기간에 시골에서는 각종 혼례를 치르게 된다. 금년에는 손영주의 집안과 손영한의 집안에서는 혼사가 없다. 그 대신에 너븐들 일가들의 집에 혼사가 있어 축의금조로 잔치음식을 준비하여 부조를 한다.
예를 들면, 감주 한 동이, 또는 유과 한 상자, 아니면 집에서 담근 술 한 동이 등이다. 그 부조의 내용을 잔칫집에서는 빠지지 않게 잘 적어 둔다. 나중에 다른 일가들이 혼사가 있으면 그만큼 동일하게 부조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통적인 시골의 풍습인 것이다.
그리고 정월 설날이 지나고 보름이 되기 전에 시집을 간 너븐들의 딸들이 친정 나들이를 온다;
그때 사위들이 함께 처가로 와서 어른들께 세배를 드린다. 그리고 나서는 너븐들에 온 사위들이 함께 큰 사랑방에 모여서 처가의 남자들과 술판을 벌리고 이야기를 즐긴다. 그때 사위들은 돌아가면서 닭 한두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쾌척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기나긴 겨울 밤을 지새우기 위해서는 닭죽을 쑤어야 하는데 그 값을 사위들 곧 최각들이 차례로 부담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풍습이 있으므로 너븐들에서는 금년 정월에 누구네 씨암탉을 잡을 것인지 그 순서를 미리 정한다. 그래야 서로 의가 상하는 일이 예방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에 닭죽을 쑤기 위해서는 동네의 여인네들이 동원이 된다. 몇 사람이 도마를 가지고 와서 덩치가 큰 씨암탉을 먼저 여러 조각으로 토막을 낸다.
그 다음에는 닭 뼈와 함께 닭고기를 모조리 식칼로 쪼지고 빻는다. 그것을 큰 가마솥 끓고 있는 물에 넣은 다음에는 미리 불려 놓은 쌀을 함께 넣고서 소금 간을 하여 묽게 죽을 쑨다. 40명이 넘는 마을 어른들이 밤참으로 먹고 밤새 이야기를 하면서 놀자면 씨 암탉 두 마리를 가지고 멀겋게 죽은 쑤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방에서는 남자들이 밤새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안방에서는 여자들이 모여서 이야기 꽃을 피운다. 그 자리에서는 외지의 이야기가 단연 화제거리가 된다. 예를 들면, 딸네들이 시집을 가서 살고 있는 동네의 처녀 총각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화제거리가 된다. 그 이유는 너븐들에 있는 처녀 총각과 짝을 맞추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랑방에서는 최각들이 자신들이 요즈음 경영하고 있는 사업의 이야기를 자랑삼아 화제거리로 삼고 있다. 도시로 진출하여 자전거포를 한다거나 양복점이나 이발소를 경영한다거나 또는 자동차를 모는 운전을 한다거나 하면 시골사람들은 매우 부러워한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자신들의 아들들을 그곳에 보내어 기술을 배우게 할 수가 없는지를 앞다투어 묻는다. 그렇게 하여 시골 출신들은 하나같이 같은 값이면 고향사람이나 처가동네의 사람들을 조수로 데려다 쓴다.
그렇게 1938년 정월달에 너븐들 사람들이 모여서 최각들과 함께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밤새 놀고 있는데 봉천 아지매의 셋째 아들인 손수석은 그 자리에 없다. 그는 이미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서 16세의 어린 나이에 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37년 12월 중순에 광석의 심상소학교가 졸업식을 했다. 그때 손영주와 정애라가 학부모 자격으로 참석을 했다. 그 자리에서 졸업생을 대표하여 최고 우등상을 받은 자랑스러운 학생이 바로 손수석이다. 그리고 일본인 교장 나카소네가 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을 교감 최수종이 학부형들을 위하여 조선말로 통역을 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제군들의 졸업을 축하한다. 이제는 내선일체를 위하여 그리고 위대한 조국 일본제국의 앞날을 위하여 제군들이 사회에 나가서 진력을 해야만 한다. 우리 일본제국의 위대한 군대는 현재 대륙에서 전쟁이 한창이다. 반드시 승리하여 중국을 일본제국에 편입할 것이다. 그 대업에 여러 졸업생들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그러한 딱딱한 연설이 있은 다음에 나카소네 교장은 웃음을 띠면서 기쁜 소식을 전한다; “오늘 우리 심상소학교는 개교 이래로 가장 우수한 졸업생을 사회로 내보내게 된다. 손수석 학생의 성적이 내가 교장으로 부임한 이래 최고이다. 나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조국 일본을 위하여 앞으로 크게 일하는 인재가 될 것이다. 여러 졸업생들도 사회로 나가게 되면 손수석 학생처럼 노력하기를 바란다. 이상”;
그 말을 들은 손영주와 정애라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최교감과 여러 선생님들의 축하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그들 부부는 며느리와 함께 열 몇 마지기의 농사를 짓는 일에 힘이 들고 고단하여 내년부터는 손수석을 일꾼으로 부리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산이다.
그해 1937년 12월 하순이 되자 저녁식사를 마친 손수석이 부모님께 갑자기 숙연하게 말을 꺼낸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한가지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저는 내일 아침에 부산으로 가서 모래는 일본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도록 되어 있어요. 일본 동경으로 가서 고학을 하려고 해요. 이미 그렇게 주선이 되어 있어요. 일본인 교장선생님과 일본인 순사 다나카 지서장이 그렇게 하라고 제게 지시를 했어요. 너무 늦게 말씀을 드려서 죄송해요…”;
손영주와 정애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은 것이다. 내일 당장 집을 떠나서 일본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 갑자기 세상이 멍하게 보이고 어안이 벙벙하다. 내년 봄부터 부모의 농사일을 도와야만 할 일꾼이 고향을 떠난다고 하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부모와 가족을 버리고 멀리 떠난다고 하니 그것이 될 법이나 한 말인가?...
그래서 손영주와 봉천 아지매 정애라는 아들 손수석에게 묻는다; “일본인 교장과 지서장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라도 수석이 네가 가정형편상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될 것이 아니냐?”.
그러자 손수석이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은 안되어요. 그들 일본인들이 이미 그렇게 하도록 조치를 취했고요, 또한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이곳 고향에서는 제가 평범한 농사꾼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곳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예요. 옛날부터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한양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공부를 하고 돈을 벌자면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으로 가야만 해요. 저는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할머니와 벌써 그렇게 약속을 했는 걸요. 그러니 부디 저를 그곳으로 보내 주세요”.
그제서야 봉천 아지매 정애라는 그 의미를 알 것만 같다. 그 일은 어제 오늘 발생한 일이 아니다. 벌써 시어머니 이채령이 살아 있을 때부터 계획이 되고 추진이 된 일이다. 그것이 시어머니의 지혜이며 배려이다. 5손자가 전부 시골 무지랭이로 자라게 되면 조상들의 영광을 되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사전에 손을 쓰신 것이다. 그 점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말릴 수가 없다.
그래서 정애라가 손수석에게 말한다; “알겠다. 내 아들 수석아. 이 에미는 이제 너의 편이 되어 주마. 나는 그동안 농사일이 바빠서 몰랐지만 그것이 너희 할머니의 뜻인 것을 이제서야 잘 알겠다. 그러니 걱정을 하지 말아라. 내 아들이 자랑스럽게도 집안을 다시 살리겠다고 그 먼 길을 떠나겠다고 하는데 장부의 가는 길을 이 에미는 막지 않으마. 그런데 여비는 있는 것이냐?”.
손수석이 울먹이면서 말한다; “어머니, 아버지, 진작에 말씀을 못 드려서 참으로 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건강하고 그렇게 할 자신이 있어요. 그리고 생전에 할머니께서 제게 일본 동경으로 갈 수 있는 여비를 진작에 주셨어요”. 그 말을 하고 나서 손수석은 아버지 손영주와 어머니 정애라에게 큰절을 한다. 그것이 하직인사이다;
그 절을 받으면서 부모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다. 그 다음날 아침밥을 정애라가 일찍 지어준다. 정말 아끼고 아껴 두었던 쌀 한 홉으로 지은 맨자지기 흰 쌀밥이다. 한 사발 가득 고봉으로 담겨 있는 그 이밥을 보더니 손수석이 절반을 들어서 그 반은 아버지의 밥그릇에 그리고 또 반은 어머니의 밥그릇에 얹어 준다. 그리고 말한다; “제가 일본에 가서 반드시 성공을 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평생 이 흰밥을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먹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분골쇄신할게요”;
그 말을 듣고 있는 손영주와 정애라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만다. 가난이 무엇인가? 그 많은 재산을 어찌하여 지키지를 못하였는가? 시대가 일본의 침략전쟁의 시절이라 조선의 백성들이 쌀밥을 구경하기가 참으로 힘이 드는 고달픈 시대이다. 그 시대를 한번 뛰어넘어 보고자 이제 셋째아들 손수석이 일본 땅으로 떠나고자 한다. 그러니 어떻게 그 장도를 말릴 수가 있겠는가?
봉천 아지매 정애라는 해가 바뀌어 1938년 정월이 되었지만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또다시 눈물이 나려고 한다. 아들 손수석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이국 땅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무정하게도 해가 바뀌어도 소식 한자가 없다. 그 무소식이 희소식인 것일까? 그저 정화수 한 그릇을 장독대 위에 떠다 놓고 하늘에 빌어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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