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10(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9. 12:58

봉천 할매10(작성자; 손진길)

 

이채령은 육신이 자꾸만 쇠약해지자 자신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사랑하는 남편 서배 할배 손상훈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으로 그녀가 가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서배 할배가 부탁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서배 할배가 별세를 하기 한달 전에 사랑하는 아내 이채령에게 부탁한 일은 집안을 위하여 자신이 맡기는 논 10마지기의 돈을 요긴하게 사용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당부를 실천하기 위하여 이채령은 1935년말에 며느리인 봉천 아지매 정애라에게 그 돈의 절반을 주었다.

당시 며느리 정애라는 남편 손영주가 곳간의 곡식을 굶고 있는 이웃을 살리겠다고 마구 퍼준 결과 발생한 사태에 대하여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경제관념이 없는 남편 손영주로 말미암아 식구들이 먹을 양식이 사라지고 400석지기의 전답마저 거의 사라진 사실을 확인하고서 그녀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이채령은 먼저 며느리를 구하고 그 다음에는 식구들이 살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야만 했다. 아들 손영주는 그럴 위인이 전혀 못되기 때문에 그 일을 부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채령은 자신이 간수하고 있던 돈의 절반을 며느리 정애라에게 주면서 그녀에게 먼저 논을 사라고 말했다. 그 결과 10마지기의 논을 다시 사들였다. 다행스럽게도 전답의 값이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5년전에 비하여 두배의 농지를 살 수가 있었다;

남아 있는 농토와 새로 산 농지로 일단은 식구들이 입에 풀칠을 할 수는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도 쌀밥이 아니다. 일본제국이 논에서 생산한 쌀을 매년 싼값으로 공출의 형식으로 가져가고 그 대신에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과 옥수수를 대신 쌀값으로 쳐서 주면서 그것으로 조선의 농민들이 먹고 살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러한 변화가 있자 조선의 지주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세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가, 농사를 지어도 적자가 발생하고 있으므로 아예 농지를 팔고서 고향을 떠나 경성으로 가는 방법이다. 이제는 농사가 아니라 차라리 장사를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둘째가, 조선총독부가 부과하는 수세는 물론 비료 등 농자재 값 인상분을 전부 소작인들에게 떠넘기는 수법이다. 그것은 참으로 악랄한 지주들의 횡포이다. 그 결과 조선의 소작농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간도지방으로 계속 야간도주를 하고 있다.

셋째가, 소작제도를 없애고 신종 머슴을 고용하여 일당을 주면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짓게 하는 방법이다. 그때 그때 농번기에 필요한 경우에만 마치 머슴처럼 일꾼들을 임시 고용하여 부리고 있으니 그것이 경제적이고 편리한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은 산미증산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소작을 주었을 때보다는 생산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민들이 소작으로 먹고 살기 힘든 시대가 되었으므로 이제는 농촌에서 소작을 구하기 힘든 시절이다. 그러므로 일용직 머슴을 구해서라도 농토를 놀리지 말고 벼농사를 짓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한 농촌의 실정을 알고서 농정당국도 양해를 하고 있다.

그것이 지주의 손해를 최소화하면서 농촌의 젊은 인력을 활용하는 방안이 된다. 내남에서는 그 옛날 덕천의 천석지기 최사권의 농지를 미망인 손예진이 교리 최부자에게 팔고서 고향을 떠난 적이 있다. 그 전답을 경영하기 위하여 월성 최씨 관리인들은 일용 머슴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서 1936년부터 손영주의 아들인 손수정과 손수상이 덕천으로 매일같이 출근을 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품꾼이고 또 어떻게 보면 머슴살이이다. 하지만 전답 주인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머슴살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매일 출근을 하는 것이니 신종 머슴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년동안 주인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농사일을 하고 추수를 할 때에 정해진 세경을 받는 그러한 전통적인 머슴살이가 아니다. 매주 며칠 출근하여 일을 했느냐에 따라서 주급을 받고 있다. 그것이 편리하면서도 현찰을 챙기는 매력이 있다. 따라서 20살이 된 손수정과 17살의 손수상 형제는 그 신종 머슴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먹을 것은 자신들이 벌고 있는 셈이다.

뒷방 늙은이로 살아가고 있지만 이채령은 그러한 집안의 실정을 정확하게 보고 있다. 따라서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음 몇가지 일을 하고자 한 것이다;

첫째, 큰 손자인 손수정을 빨리 장가 보내고 손부를 보고자 한다. 마침 봉천 아지매 정애라와 아들 손영주가 농사를 짓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신체가 건강한 며느리를 얻어서 함께 일하고자 논의를 한다. 그 점을 알고서 이채령이 은근히 동조를 한다.

손자인 손수정은 자기보다 신부감이 나이도 많고 안면에 마마 자국이 약간 남아 있다고 하여 그 혼사를 싫어하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당장 인력이 필요하고 또 자손을 보아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모른 척하고 그렇게 혼사가 진행이 되도록 내버려둔 이채령이다.

그렇지만 그 부작용이 심각하다. 손자인 손수정이 별거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비상금의 일부를 손부인 김옥순에게 주면서 부디 참고 살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이다. 그녀의 당부가 나중에 효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젊은 손수정이 은밀하게 아내 김옥순과 합방을 하게 되고  2년 후에 손부의 배가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채령은 자신이 떠나고 없어도 자손들이 번성하여 옛날 시아버지와 남편이 지니고 있던 온 가문의 가주와 천석꾼의 영광을 되찾아 주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 일이 가능하게 되자면 손자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야만 한다.

이채령의 생각으로는 인물이란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명석해야 하고 또한 후천적인 환경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신식 교육을 받아야 하며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쟁을 통하여 돈을 벌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채령은 머리가 좋은 손자 손수석에게 투자를 하기로 한다.

1936년초에 내남 상신에 있는 심상소학교의 교감 최수종을 찾아가서 서당에 다니고 있는 14살짜리 손수석을 5학년에 편입시켜 달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이다. 졸업할 때까지 2년치의 수업료를 미리 납부하는 조건으로 그 일이 성사가 되었다. 그 결과 셋째 손자인 손수석이 형들과는 달리 신식학문을 심상소학교에서 일본어로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최수종 교감은 서당생도가 전혀 일본어와 신학문의 기초가 없이 5학년에 편입이 되어 공부를 한다고 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다. 나이만 들었지 소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중팔구 낙방이다. 그저 소학교가 무엇인지 조금 경험을 해보고 말 것이다. 그렇게 최교감이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며 기우였다. 1936년 한해 동안 심상소학교에서 공부를 한 결과 손수석의 성적이 그 반의 수석이 된 것이다. 그 놀라운 성적을 보고서 최수종 교감은 얼른 가정방문을 하면서 이채령 여사를 찾았다. 그 소식을 최교감으로부터 직접 듣게 되자 이채령은 흐뭇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이채령은 조용히 셋째 손자인 손수석을 자신의 방으로 부른다. 그리고 은밀하게 당부를 한다; “수석아. 너는 이 할미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직도 명심하고 있느냐?”. 손자가 또박또박 대답한다; “할머니가 저를 업어 주시면서 항상 수석아 너는 커서 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잘 알고 있어요”.

이채령이 본론을 이야기한다; “그래 맞다. 그것이 이 할미의 소원이다. 이제 할미는 오래 살지를 못한다. 그래서 너에게 한가지 부탁을 하고자 한다. 내가 돈을 조금 너에게 맡길 것이니 그것으로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 동경으로 들어가거라. 그곳에서 야간을 하더라도 공부를 더하고 돈을 벌어라. 너는 일본에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고향에서 다시  천석꾼의 영광을 되찾아 다오”.

그러면서 이채령은 손주의 손에 돈봉투와 함께 편지를 한장 쥐어 준다. ‘조선은행권인 그 돈은 이제 용도를 알겠는데 그 편지는 누구에게 전하는 것일까?’, 손수석은 그것이 궁금하다. 그때 이채령이 말한다; “수석아. 오래전 내남 덕천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던 장인식 교장의 여식이 일본 오사카로 시집을 가서 살고 있고, 또 외동 서배 마을에서 생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던 안성기 교장의 둘째 아들이 일본 동경으로 장가를 가서 그곳에서 쌀가게를 하면서 살고 있다”.

조금 숨을 쉰 다음에 이채령이 말을 잇는다; “내가 수년전에 그 두 교장을 만났을 때에 그들의 주소와 그들 자녀들의 인적사항과 일본주소를 받아 둔 것이 그 편지이다. 너는 그것을 지니고 있다가 일본으로 들어가게 되면 한번 찾아보아라. 먼저 부산으로 가서 그 부모들을 만나고 그 소개를 받아서 일본에 있는 그들의 자녀를 만나면 될 게야”.

손수석이 그 말을 듣고서야 ‘아, 그것이 편지가 아니고 그들의 주소이구나’라고 깨닫는다. 그때 할머니 이채령의 넋두리와 같은 간절한 말씀이 들려온다; “일가친척이 한사람도 일본에는 없으니, 수석아 너는 일본 땅에서 고아와 같이 외롭겠구나... 그러니 자비로운 지인이라도 만나야 네가 발을 붙일 수가 있을 게야. 아무도 없는 그 먼 땅에서 네가 독립운동을 하듯이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데… 수석아, 이 할미를 위해서 그 일을 할 수가 있겠니?”.

손수석이 고개를 끄떡인다. 이곳 조선의 땅 내남 너븐들에서는 더 이상 천석꾼의 영광을 되찾을 방법이 없으므로 자신을 그 먼 일본땅으로 떠나 보내고자 하시는 할머니이시다. 그 일을 은밀하게 자신을 불러서 당부하신다. 그 말씀이 마치 유언과도 같다. 그래서 손수석은 눈에서 눈물이 난다. 그때 할머니 이채령의 늙은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손수석은 똑똑하게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시던 할머니의 말씀이 귀에 생생하다; “수석아, 네가 그것이 이 할미의 소원이라고 나중에 부모님께 말씀을 드려도 그들은 너를 그곳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하실 게야. 당장 먹고 사는 일이 바빠서 일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그들이다. 그러니 사전에 상의를 하지 말고 떠나기 직전에 통보만 하고 너의 길을 가도록 해라. 인정에 이끌려서 그 사실을 미리 알리게 되면 만사 허사가 된다. 반드시 명심을 하도록 해라. 수석아…”.

셋째, 이채령은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하나의 조치를 더해 놓고자 한다. 그래서 1937년초에 아들 손영주와 며느리 정애라를 자신의 방으로 부른다. 그 방에서 함께 식사를 한번 하자고 말한 것이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채령이 두사람에게 말을 시작한다; “애비야, 에미야, 오늘은 너희들에게 할말이 있다. 애비야 너는 친형인 손영한이 딸 둘을 시집보내고 이제는 나머지 두 딸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냥 보고만 있을 작정이냐? 아들이 없어서 손영한과 너희 형수 이신자가 너희 내외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이제는 그 마음을 편하게 해주도록 하려무나”;

손영주 부부가 얼른 모친의 뜻을 알아 들었다. 자신들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형 집에 양자로 빨리 주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먹는 입을 하나라도 덜게 될 것이 아니냐는 말씀이다. 물론 그럴 것이다. 아들을 하나 장가를 보내는 비용도 상당한데 형 집에 양자로 주면 그 비용을 전부 형이 부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아들을 양자로 형 집에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영주가 모친에게 물어 본다; “어머니 생각에는 누구를 형 집에 양자로 주는 것이 좋을까요?”. 정애라도 그것이 궁금한지 시어머니의 입을 쳐다본다. 그때 이채령이 단호하게 말한다; “맏이는 줄 수가 없으니 차남 손수상을 형 집에 주는 것이 옳다. 수상이는 요즈음 덕천으로 출근을 하면서 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당장 형 집에 양자로 주더라도 그 집에서는 큰 부담이 없을거야. 그렇게 하도록 해라”;

손영주와 정애라의 생각은 애초에 막내아들이나 그 바로 위의 아들로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제 밥벌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차남은 벌써 일용직 머슴살이를 하고 있으니 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삼남인 손수석도 금년말에 심상소학교를 마치면 15살이 되고 내년이면 16살이 되니 그때에는 덕천으로 보내어 머슴살이를 형과 함께 시키면 생계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돈을 벌고 있는 차남 손수상을 형 집에 양자로 주라고 말씀하시니 그것이 조금 마음에 와닿지를 않는다.

아들 내외가 자신의 말을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서 이채령이 설명을 한다; “너희들은 조상들의 선례를 전혀 모르고 있구나. 영주 너의 증조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형 집에 아들이 없자 자신의 장남을 양자로 주었다. 그러니 증조부의 예를 따르자면, 영주 너는 장남을 형 집에 주는 것이 맞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차남이라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막내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이왕 형 집에 줄려면 도움이 되는 쪽으로 장성한 아들을 양자로 주어야 한다. 그것이 동생이 된 도리이다. 알겠느냐?”. 

그 단호한 말씀 앞에 손영주와 정애라는 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네, 그렇게 조치를 하겠습니다”라고 순종을 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채령은 그렇게 결정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그 이유는 그 불똥이 자신이 일본으로 보내려고 하는 셋째 손자 손수석에게 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다. 집안의 유일한 희망을 손수석에게 걸고 있는 이채령인데 그를 차남 대신에 손영한의 집으로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이채령은 사랑하는 남편 서배 할배 손상훈에게로 갈 수 있는 준비를 이생에서 모두 마친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1937년 남은 세월을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는 뒷방 늙은이 이채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