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1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30. 05:14

봉천 할매11(작성자; 손진길)

 

이채령은 기력이 많이 쇠하여 나들이를 자제하고 있다. 1937년에 들어와서는 주로 방에서 지낸다. 하지만 그해 6월이 되자 모내기가 한창인 들녘을 보고 싶어서 근력이 약해진 몸을 겨우 일으켜서 바깥나들이를 한다. 조선나이로 82세이므로 당시로서는 상노인 중의 상늙은이이다.

너븐들 앞산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면서 그곳까지 넓게 펼쳐져 있는 농경지를 주시한다. 물이 들어와서 논이 되어 있는 그 전답에서는 동네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내기를 하느라고 한창이다;

 그 모습을 보니 자신이 건강하다면 그 논에 발을 담그고 함께 모내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의 노쇠한 육신은 이미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채령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탄식을 한다; “오, 하늘에 계시는 옥황상제님, 이 몸은 이제 저 들녘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이제 쓸모가 없습니다. 하늘로 돌아가면 그곳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곳 하늘로 먼저간 제 남편을 과연 만날 수가 있을까요? 저는 남편을 다시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부디 이곳에 남아 있는 저의 자식과 자손들을 잘 돌보아 주세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노인 이채령은 너븐들의 들녘에서 눈을 들어 서쪽을 멀리 바라본다. 침침한 그녀의 눈에도 안심지역과 더 먼 박달지역이 한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끝없이 펼쳐진 전답이 참으로 보기가 좋다. 그곳 논에도 지금 모내기가 한창일 것이다. 그 드넓은 들판이 한때는 자신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소유한 천 마지기의 전답이었다고 생각을 하니 그 옛날의 영광이 아직도 살아 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는 빙그레 웃는다.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가 있지만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나중에 셋째 손자가 그 땅을 되찾아 자신의 가문에 선사할 것으로 그녀는 믿고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서 너븐들 뒤쪽 들녘도 한번 보고자 한다. 상신 너븐들 동네의 남쪽 앞산이 있는 그 들녘에만 전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큰 거랑이 있는 북쪽에도 논과 밭이 있는 것이다.

그곳이 보고 싶어서 조금씩 걸음을 옮기다 보니 멀리 광석의 심상소학교가 눈에 들어온다. 그때서야 이채령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일이 하나 그곳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 심상소학교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셋째 손자인 손수석이 6학년 어느 반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몰라서 그냥 교무실로 들어가본다. 그러자 마침 최수종 교감이 그녀를 발견하고서 놀란 눈으로 마중을 나온다.

최교감은 자신의 방으로 이채령을 안내한다. 그 방안에는 앉는 의자 몇 개가 큰 책상 앞에 놓여 있다. 이채령은 다리가 아파서 먼저 그 의자 하나에 앉는다. 그것을 보고서 최교감이 말한다; “손수석의 조모께서는 참으로 힘드신 걸음을 하셨습니다. 손주가 공부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손수 찾아오신 것입니까?”.

그 말을 듣더니 이채령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하지만 오늘은 최교감을 좀 만났으면 하여 이렇게 뒷방 늙은이가 걸음을 했습니다…”. 최교감이 깜짝 놀라면서 묻는다; “저를 말씀이십니까? 어쩐 용무이십니까? 말씀을 하십시오”. 그러자 이채령이 천천히 말을 시작한다; “교감선생님. 작년 초에 제가 손자 놈이 똑똑하여 5학년에 편입을 하더라도 공부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을 했지요? 기억이 나십니까?”.

최교감이 ‘허허’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네, 할머니, 제가 기억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이채령이 말한다; “작년말에 제 손자 손수석은 벌써 반에서 일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금년말에는 6학년 전체에서 일등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가지 특별한 상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오늘 최교감 선생님을 직접 찾아 뵙고자 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자 최교감이 기분이 좋게 답을 한다; “물론입니다. 전교 일등을 하게 되면 우등상이 큼지막하게 나가고 또한 상품이 있지요. 그것이라면 벌써 제도화가 되어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제가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이채령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 흔들며 말한다; “그것이 아닙니다. 교감선생님. 제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은 특별한 상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최교감이 이채령 여사의 눈과 입을 쳐다본다. 그때 이채령이 또박또박 말한다; “저는 제 손자에게 이 학교가 생기고 나서 최고의 성적을 내라고 주문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감선생님께서는 일본인 교장에게 청을 하여 제 손자 손수석을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학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십시오. 제가 알기로는 조선사람들이 내지인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오늘날 무슨 증명서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최교감이 무슨 말씀인지 이제는 알아 들었다고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한다; “잘 알겠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힘든 걸음을 하셨군요. 손주 손수석의 장래를 열어주고자 하시는 할머니의 그 마음을 제가 알 것만 같습니다. 그 마음은 제 선친의 마음과 같은 것이군요. 덕천 소학교의 교장이셨던 제 아버지는 평소에 저보고 대를 이어 반드시 교육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손수석 학생이 전교 일등만 한다면 제가 책임을 지고 그 ‘도항증’을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지서장으로부터 받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마시고 조심하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말을 듣자 이채령이 참으로 행복하게 웃으면서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최교감에게 깍듯이 허리까지 숙여서 절을 하고자 한다. 그 모습을 보고서 최교감이 급히 만류를 한다; “할머니, 아닙니다. 그것은 마땅히 제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장래가 촉망이 되는 똑똑한 인재는 저도 잘 키우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허리를 숙이면서 부탁을 아니하셔도 됩니다. 제가 책임을 지고 그렇게 하도록 하겠으니 아무 염려를 마십시오”.

최교감이 재차 확인을 해주고 있는지라 그날 이채령은 참으로 행복하게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이 모두 끝난 것으로 보인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너븐들 북쪽 선산을 눈여겨 본다. 그곳에 이채령이 사랑하는 남편 서배 할배 손상훈이 고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산소의 옆에는 자신이 들어가서 묻힐 가묘가 벌써 조성이 되어 있다;

    

                                   

이틀이 지나자 이채령의 방으로 아들 손영주 내외와 둘째 손자 손수상이 들어온다.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는 이채령에게 갑자기 손수상이 큰 절을 한다. 그리고 말한다; “할머니, 저는 내일부터 큰아버지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 집에는 사촌 누이가 둘이나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그 집에 양자로 들어가니 제 바로 누이동생들이 되지요. 앞으로 자주 할머니를 찾아 오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절을 올립니다”;

그 말을 듣자 이채령이 문갑에서 조그만 봉투 하나를 꺼내서 손수상의 손에 쥐어 준다. 그리고서 말한다; “수상아, 네가 큰 일을 하는구나. 네 큰아버지는 딸만 4이고 아들이 없으니 네가 그 집의 대를 이어 주어라. 나중에 결혼을 하고 아들을 많이 낳아서 그 집의 소원을 풀어주도록 해라. 이것은 이 할미가 마지막으로 지니고 있던 비상금이다. 너에게 주고 싶어서 진작에 이렇게 봉투에 넣어 두었다. 같은 너븐들이니 자주 찾아 오너라, 내 사랑하는 손자야…”.

손영주와 그의 아내인 봉천 아지매 정애라는 모친에게 ‘편히 쉬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손수상과 함께 방문을 조용히 닫고 나가고자 한다. 그때 이채령이 갑자기 아들 손영주에게 부탁을 한다; “애비야, 이따 수석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 방에 좀 건너 오라고 전해 다오”.

이채령은 혼자가 되자 곰곰이 생각을 한다; ‘내가 아직 미진한 일이 무엇인가? 손수석에게 그 말을 전해주면 모두 끝나는 것인가? 그렇다. 이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역사가 되겠구나. 그들이 잘하면 좋은 미래를 열어갈 것이고, 잘못하면 어려운 미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몫이겠지. 나는 그 미래를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지만 내 자식과 내 손자들이 잘 되기만을 그곳에서도 옥황상제에게 빌어야지…”.

그날 오후 늦게 학교에서 돌아온 손수석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할머니 이채령의 방을 찾았다. 그때 이채령이 기쁜 낯빛으로 그를 맞으면서 말한다; “수석아, 내가 그저께 최교감을 만나보았다. 그리고 한가지 다짐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러자 손수석이 말한다; “할머니,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말씀을 해주시면 금방 알게 되겠지요…”. 그 말을 듣자 참으로 오래간만에 이채령이 ‘호호’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이 녀석, 할미를 놀리는구나. 무슨 말인지 너는 벌써 짐작을 하고 있을게야…”.

이채령이 말을 끊고 셋째 손자인 손수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 녀석 어떻게 저렇게 제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을 빼 닮아 있는고. 서배 할배를 닮았으면 끈기도 있고 영리할 것이야. 그래 수석이는 충분히 그 일을 해낼 것이야. 아무렴 그렇고 말고…”.

그 모습을 보고서 손수석이 말한다; “할머니, 혹시 제가 금년말에 졸업을 하게 되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는 그 문제 때문에 일부러 학교에 오셔서 최교감 선생님을 만나신 거예요?...”. 그러자 이채령이 말한다; “그래 너는 벌써 짐작을 하고 있구나. 그렇다. 수석아, 네가 만약 학교가 생기고나서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을 하게 되면 너에게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는 ‘도항증’을 발부해주기로 했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할머니의 그 말씀을 듣자 손수석이 명확하게 말한다; “할머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께요. 최고성적도 낼 것이고요,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학도 할거예요. 그리고 돈도 많이 벌 거예요. 그래서 조상님들이 일구어 놓은 전답을 모두 되찾을 거예요. 그리고 경주 월성 지역 일가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을 서는 그러한 가주가 될 거예요. 그러니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듣자 이채령의 늙은 눈에 갑자기 눈물이 고인다. 그리고 말한다; “수석아, 내 사랑하는 손자 수석아, 참으로 고맙다. 너의 그 말을 들으니 그래도 이 할미가 이 나이가 되도록 버티고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내가 나중에 수석이 네가 이룩하는 그 멋진 시대를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너의 그 든든한 장부의 약속만으로 여한이 없다. 부디 그러한 시대를 만들어서 너의 자손들에게 선물을 하도록 하려무나. 고맙다. 내 손자 수석아…”;

할머니 이채령의 그 말씀을 들으면서 손수석은 어찌하여 자신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그저 할머니의 늙으신 모습을 바라보면서 굵은 눈물 만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달 후에 이채령은 이 세상에서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한 가족의 품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먼저간 사랑하는 남편 서배 할배 손상훈을 만나고자 기어코 그 먼 길을 혼자서 떠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