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14(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30. 06:57

봉천 할매14(작성자; 손진길)

 

1937년 12월 27일에 손수석이 배인근 및 안춘근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갈 때에 부산에서 탄 선박의 이름이 ‘관부연락선’인 ‘경복마루’이다. 그 배가 당시로서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왕래하고 있는 정기노선의 여객선 가운데 하나이다. ‘관부연락선’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는 시모노세키가 한자로 ‘하관’이므로 그 ‘관’ 자를 따오고 ‘부산’의 ‘부’자를 따왔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가는 여객선을 조선사람들이 이용하자면 무조건 ‘도항증’을 제시해야 한다. 손수석은 ‘부산수상경찰서장’이 발부한 그 ‘도항증’을 사전에 품에 지니고 있었기에 승선이 가능하다;

그러하지 못한 사람들이 일본으로 들어가자면 밀항선을 이용해야 한다. 그것은 밀수 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만 조선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명운을 걸고서 그러한 모험을 자행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시모노세키에서 오사카까지는 열차를 이용하여 이동한다. 손수석이 안춘근과 함께 오사카에 있는 배인근의 집에 도착을 했을 때에 깜짝 놀란 일이 둘 있다; 하나는, 배인근 부부와 그의 부모님들이 큰 저택에 함께 살고 계시는데 그들이 조선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조선사람들이 일본에 살고 있다고 하여 일본말을 집에서도 상용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하고 있는 손수석을 보고서 안춘근이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수석이는 처음 보아서 이상한 모양이구나. 그러나 이곳 일본에서 며칠만 살아보면 그 이유를 금방 알 수가 있다. 집에서 조선사람들이 일본어를 평소에 사용하지 아니하게 되면 사회생활을 할 때에 일본말이 서툴고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조선말이 튀어나와서 일본사회에서 상당한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것이야”. 그 말 그대로임을 며칠 후에 손수석이 이해하게 된다.

또 하나는, 조선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성이나 이름을 대신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배인근이나 그 부친인 배종성이 월성 배씨라는 성 대신에 ‘쯔끼모도’라는 일본식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 어째서 그런가?

그 점에 대하여 손수석이 궁금하여 물었을 때에 배인근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일제가 조선에서도 곧 창씨개명을 강제하겠지만 이곳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사람들은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가지지 아니하면 사회생활 자체가 어려워져. 그렇지만 가급적 자신의 뿌리와 근본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기 위하여 조선사람들은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지. 그래서 우리 집안은 경주 월성 배씨이므로 ‘월성이 본이다’라는 뜻을 담아서 ‘쯔끼모도’라고 하는 성씨를 만든 것이야”;

손수석은 배종성의 집이 대저택이며 방이 상당히 여러 개라고 하는 그 큰 규모에 놀라고 있다. 그렇게 놀라면서 이틀을 오사카의 그 집에서 쉬고 있을 때에 손수석은 배인근과 안춘근에 대하여 호칭을 어떻게 해야만 할지를 몰라서 상당히 어색해 한다.

그것을 보고서 배인근이 조선말로 손수석에게 말한다; “나의 조부모님과 외조부모님 그리고 안춘근의 조부모님과 외조부모님은 모두 서배 할배 부부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와 안춘근이는 서로 호형호제를 하고 있다. 손수석이 너의 조부님이 서배 할배이시니 너는 당연히 우리와 배분이 같다. 따라서 나이가 비록 13살 또는 19살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조상님들의 우정을 생각하면 형과 동생으로 서로 대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를 큰형으로 알고 대해주기 바란다. 손수석 아우야…”.

그 말을 듣자 그날 손수석은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일가친척이 한사람도 없는 일본 땅에서 갑자기 큰형과 둘째형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잘 알겠습니다. 큰형님과 둘째형님, 앞으로 잘 지도 편달해 주십시오.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듣자 옆에서 안춘근이 ‘껄껄’ 웃으면서 조선말로 말한다; “형이 동생을 돌보고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데 무엇이 그리 고맙고 감사하냐? 수석 아우,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알겠느냐?”.

그냥 손수석은 ‘예’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 다음날 손수석은 안춘근과 함께 오사카에서 동경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그날 동경에서 가장 먼저 들린 곳이 ‘쯔끼모도 고메야’라고 되어 있는 ‘쌀가게’이다. 여기서도 안춘근의 가족들은 역시 ‘쯔끼모도’라는 일본식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안춘근이 살고 있는 저택에 들렀더니 그 부인과 부모님들이 모두 일본말을 사용하고 있다.

손수석은 이미 그러한 경우를 오사카 배인근의 집에서 경험한 적이 있으므로 이번에는 다른 것을 안춘근에게 조용히 물어본다; “형님, 어째서 ‘순흥 안씨’인 형님 댁에서도 ‘쯔끼모도’라고 하는 성씨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안춘근이 그러한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즉시 답을 한다; “그것은 ‘월성’이 성씨의 고향이라고 하는 뜻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가 월성 외동에서 태어나 살다가 이곳으로 장가를 오셨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야”.

그때서야 손수석은 그 깊은 뜻을 알게 된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고향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도 일본에서는 그렇게 자신의 성씨를 부르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을 안춘근에 말했더니 심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럼 수석이 너는 일본에서 내 동생이니 당연히 ‘쯔끼모도’라는 새로운 성을 사용하는 것이 맞는 거야”.

그때부터 손수석은 ‘쯔끼모도 수석’으로 불리게 된다. 쌀가게에서 일을 할 때에도 그는 ‘쯔끼모도 상’이었고 청년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에도 그의 이름은 ‘쯔끼모도’였다. 그리고 1939년 12월에 북해도 곧 홋카이도의 ‘미쯔비시 비바이 탄광’에서 서기로 일을 시작한 때에도 손수석은 그 이름이 ‘쯔끼모도 상’이다;

쯔끼모도가 배속이 된 부서는 ‘공무부 생산지원과’이다. 공무부장은 중년인 ‘후쿠다 부쪼상’이고 생산지원과장은 ‘가네야마 가쪼상’이다. 그리고 쯔끼모도의 양 옆에는 ‘스즈끼 상’과 ‘다나까 상’이 근무를 하고 있다. 당시 홋카이도의 탄광은 호황이다. 일본제국의 군대가 중국대륙에서 계속 전쟁 중에 있기 때문에 일종의 전쟁경기를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40년 2월이 되자 회사에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1,000명이나 되는 광부들에게 먹일 양식이 부족한 것이다. 이른바 ‘쌀 파동’이 국방산업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탄광회사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회사의 간부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러한 시기에 후쿠다 부장이 자신의 방으로 조용히 쯔끼모도를 부른다. 나이 50이 가까운 회사의 간부가 신참사원 손수석을 부른 것이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는 손수석에게 후쿠다 부장이 말을 시작한다; “쯔끼모도 상, 나는 군의 경력을 읽어보았네. 그런데 자네는 동경에 있는 청년학교에서 상업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쯔끼모도 쌀 상회’에서 근무를 했더군. 그러한 군의 경력을 보고서 나는 자네에게 한가지 부탁을 하고자 하네. 지금 우리 회사는 쌀 부족이 심각해. 그러므로 자네는 동경으로 출장을 가서 쌀을 구입하여 회사로 보내도록 하게”;

갑작스러운 명령이지만 충분히 이해를 할 수가 있는 내용이다. 일본에서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하면 신참인 자신에게 그러한 지시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손수석이 부장에게 묻는다; “일반 시중가로 쌀을 구입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어려울 것으로 사료됩니다. 보리고개인 춘궁기가 다가오고 있으므로 쌀값이 치솟고 있습니다. 쌀을 선점하자면 부득이 시세보다 더 값을 치르고 쌀을 구입해야 합니다. 얼마를 더 지급하면 될까요? 그리고 어느 정도의 양이 필요합니까?”.

그 말을 듣자 후쿠다 부장이 심각하게 답을 한다; “지금은 돈을 얼마나 많이 주더라도 1,000명의 광부들이 일년간 먹을 수 있는 2,000가마니의 쌀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문제야. 그러므로 구입가는 시중시세보다 15%정도 더 주더라도 그 물량만큼은 반드시 확보해야 해. 지금 전쟁이 대륙에서 한창이므로 갈수록 쌀을 사기가 힘이 들 것이니… 그렇게 알고서 빨리 동경으로 가서 서둘러 쌀을 대규모로 구입해서 열차로 이곳으로 보내어 주게. 알겠나, 쯔끼모도 군?”;

그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그날부터 손수석은 거대한 미쯔비시 탄광이 필요로 하는 쌀을 구입하기 위한 특별작전에 나선다. 그가 급히 찾아간 곳은 물론 동경에 있는 안춘근의 쌀가게이다. 손수석이 안춘근 형에게 쌀 2천 가마니를 좀 구해달라고 했더니 고개를 흔든다. 지금은 그렇게 많은 쌀을 구입할 수가 일본에서는 없다고 한다. 어째서 그런가?

안춘근의 말이 다음과 같다; “조선에서 생산이 된 쌀을 조선총독보가 공출로 거두어 최우선적으로 중국대륙에서 전쟁을 치고 있는 관동군에게 군량미로 보내고 있어. 그때문에 일본에서 쌀값이 폭등하고 그나마 미곡의 절대량이 부족해.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이곳에서도 쌀이 없어서 다 못 팔고 있다. 수석아”. 그 말을 듣고 손수석이 빙긋 웃으면서 말한다; “형님, 언제 제가 여기 쯔끼모도 상회의 쌀을 사겠다고 했습니까? 조선에 있는 쌀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형님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안춘근이 손수석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를 못해서 어리둥절해 한다. 그때 손수석이 말한다; “형님, 부산에 가면 김해평야에서 생산하는 쌀이 부산항 미곡창고에 쌓여 있습니다. 그것을 조선총독부의 관리가 배분계획을 세워서 관동군에게 보내거나 일본내지로 수송을 하지요. 그런데 그 계획 가운데 홋카이도의 탄광으로 보내는 미곡이 빠져 있습니다...”.

손수석이 궁금해하는 안춘근의 안색을 살피면서 추가설명을 한다; “그것을 제가 이번에 부산으로 들어가서 관리를 만나 그 배분계획에 추가로 반영을 시켜 놓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쌀을 이곳 ‘쯔끼모도 쌀상회’로 일단 보내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러면 형님께서는 반드시 ‘쯔끼모도 쌀상회’의 이름으로 제가 일하고 있는 ‘미쯔비시 탄광회사’로 그 쌀을 열차편으로 보내어 주십시오”;

안춘근은 그렇게만 된다면야 쌀을 자기 쌀 상회의 이름으로 하여 탄광으로 보내는 것은 쉬운 문제라고 판단한다. 그러자 손수석의 말이 계속이 된다; “그리고 미곡의 값은 시중가보다 항상 15% 높게 탄광에 청구하십시오. 물론 열차편으로 보내는 수송비도 탄광회사의 부담으로 매매계약에 반영을 하시고요. 그것이 형님과 제가 수고한 대가입니다”.

그 말을 듣고 안춘근은 아우 손수석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배포와 계획이 보통사람의 기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어떻게 겨우 18살의 조선청년이 일본에 와서 2년 남짓 고학을 한 후에 탄광에 경리서기로 들어가서 그러한 거창한 계획을 꾸미고 또한 겁도 없이 실행하고자 하는가? 그리고 정말 손수석이 부산에 가서 조선총독부 관리를 만나 그 배급계획을 수정하게 할 수가 있을까? 안춘근은 반신반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 후에 부산을 방문하고 동경으로 돌아온 손수석에게서 그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말을 듣게 된다. 그 말이 사실일까?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안춘근의 쌀가게로 열흘 후에 동경항에서 연락이 온다. 조선에서 배로 실어 보낸 쌀 1,000가마니가 도착해 있으니 직접 와서 수령을 하라는 것이다;

안춘근은 부친 안용운에게 그동안의 경과를 말씀드린다. 그랬더니 안용운이 말한다; “허허, 서배 숙부께서는 참으로 영특한 손자를 두셨구만. 그 녀석이 이곳 일본에서 돈을 많이 벌겠어. 그래 좋은 일이지. 춘근아, 수석의 말 그대로 차질이 없이 잘 처리를 해주도록 해라. 우리도 그 덕을 볼 수가 있게 되었구나…”.

그 결과 1940년 4월부터 손수석이 고향 내남 너븐들 집으로 송금하는 금액이 획기적으로 증가한다. 그 엄청난 돈을 받고서 봉천 아지매 정애라는 농지를 구입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녀는 신이 난다. 남들은 살기가 어려워서 서로 전답을 팔려고 하는데 자신은 그 반대로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몇 년만 계속 농지를 사들이면 그 옛날 천석꾼의 토지를 다시 확보할 수가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