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22(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1. 05:11

봉천 할매22(작성자; 손진길)

 

1942년 3월에 고향인 내남 너븐들에 들린 손수석은 맏형수 김옥순이 둘째 아기를 임신하여 배가 많이 불러 있는 것을 보았다. 여전히 사랑채 옆방에서 기거를 하고 있다는 큰형 손수정이 언제 안채 옆방에 있는 아내에게로 건너가서 아기를 가지게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손수석이 사랑채 사랑방에 가서 부친 손영주에게 문안인사를 드린 다음에 그 옆방으로 건너가서 큰형 손수정에게 말한다; “큰형, 형수님 배가 많이 불러 있습니다. 출산예정일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손수정이 동생 앞에서 여전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한다; “다음달 20일경이라고 의원이 말한 것 같은데… 글쎄, 몸조심을 하지 아니하고 그 만삭의 몸으로 여전히 부엌일이며 빨래며 집안일을 혼자서 다하겠다고 나서니 그것이 걱정이지. 내 말을 도통 듣지를 않아…”.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은 괜히 마음이 즐겁다. 겉으로는 신부가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마마 자국이 있다고 그렇게 싫어하더니 지금은 금슬이 좋은 모양이다. 모친의 말을 들어보면 확실히 그런 것이다; “글쎄, 너의 큰형이 밤에 살그머니 도둑고양이처럼 베개를 가지고 자기 마누라가 자고 있는 방으로 곧잘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 3년전에는 아들이 생기고 이번에는 둘째가 곧 태어날 예정이지. 아예 마누라 방에서 살지 무엇하러 각방을 쓰는 것처럼 하고 있는지 몰라. 그야말로 눈감고 아웅이 아니냐?...”.

그 말을 하면서도 봉천 할매 정애라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장남 내외가 금슬이 좋은 것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손수석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손수석은 자기 위로 누나와 형들이 모두 결혼을 했으니 이제는 자신이 결혼할 차례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순서가 그렇다는 것이지 손수석은 아직 결혼할 마음을 먹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나이가 아직 20살에 불과하니 결혼은 먼 훗날의 일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의 조부가 24살에 결혼을 했고, 부친이 26살에 결혼을 하여서 그런 모양이다. 또 하나는, 손수석은 자신이 결혼을 하기 전에 조모 이채령의 당부 그대로 돈을 많이 벌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서배 할배가 가지고 있던 내남 월성 손씨의 가주의 명예와 천석지기의 영광을 되찾아야만 한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는 것이다.

손수석이 4월달에 일본 북해도에 되돌아 와서 보니 참으로 기쁜 소식이 하나 그를 기다리고 있다. 삼판에서 십장으로 일하고 있는 매형 이도성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남, 놀라지 말게. 자네 누나가 임신을 했다네. 지난달부터 눈에 띄게 배가 불러와서 혹시 무슨 병인가 하여 의사에게 데려갔더니 벌써 아기를 가진지 3개월이나 되었다고 하는 거야. 이제 10월달이 되면 자네 조카가 태어나게 되지. 참으로 기쁜 일이야”;

손수석은 누나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엄청 기쁘다. 아기를 낳지 못한다고 시집에서 쫓겨난 누나 손해선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멀쩡하게 임신을 할 수가 있는데 참으로 억울하게 쫓겨난 것이다. 이곳 일본 북해도에 와서 선량하고 믿음직스러운 남편도 새로 만나고 아기도 얻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갑절로 축하를 받아야 할 일이다. 그래서 손수석은 자신이 누나를 일본으로 데리고 오기를 참으로 잘했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큰 근심이 있다. 그것은 고향에서 모친으로부터 은밀하게 전해 들은 국제정세에 관한 정보 때문이다. 작년 12월에 일본의 비행기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의 전함을 박살내었기에 금년 1942년은 일본제국의 의도대로 태평양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년은 전황이 달라질 것으로 전망이 된다.

미국이 새로운 전함을 건조하여 다시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날에는 본래 바다에서 열세인 일본이 제해권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전쟁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가? 중동에서 태평양으로 석유를 가져와야만 전쟁을 계속할 수가 있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패전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일본이 패전을 한다면 미국은 일본제국에 편입이 되어 있는 조선반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해방을 시켜줄 것인가? 아니면 일본제국의 앞잡이라고 하여 강력하게 군정으로 다스릴 것인가? 전자가 아니라 아무래도 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하여 조선사람인 자신과 고향사람들이 일본이 패전한 상황에서 계속 일본에 남아 있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에는 이중의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패전한 일본의 현실이 비참하기에 조선인들의 처지도 비참해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전승국인 미국도 패전한 일본도 모두 조선인들을 우습게 여기고 차별할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나라가 없는 민족은 어디를 가나 찬밥 신세이다.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것은 돈의 힘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돈을 많이 벌어서 자립할 수 있는 실력을 키우는 도리밖에 없다. 달리 대안이 없다. 그것이 일본에서 ‘쯔끼모도’로 불리고 있는 손수석의 결론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일본제국의 동향을 보면서 순발력 있게 대처를 하고자 작심하고 있다.

그렇지만 손수석은 그러한 정보와 자신의 속셈을 다른 사람들에게 일체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의 동기들과 매형이라고 하더라도 그 앞에서 발설할 수가 없다. 그래서 굳게 입을 다물고 전세의 흐름과 조선인부들의 생활상만을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내심을 완전히 숨길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는 매형 이도성이 묻는다; “처남, 무슨 근심이 있는가? 요 몇달 사이 통 말이 없고 분위기가 침울해…”.

아차 싶어서 손수석이 급히 화제를 돌린다; “원, 매형도, 제가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아마 저도 스무살이 되니 이제 처녀생각이 나는 모양입니다. 하하하... 그런데 매형은 50명이나 되는 삼판의 조선인 인부들을 어떻게 통솔하십니까? 무슨 비결이 있습니까?”. 이도성은 처남이 말을 바꾸는 것을 보니 그 속을 털어놓지 아니할 것임을 눈치 챈다. 한편으로는 섭섭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입이 무거운 처남이 믿음직스럽다;

그래서 이도성이 손수석의 궁금증을 풀어주고자 한다; “처남의 말 그대로 내가 통솔하는 조선인 인부가 50명이 맞아. 그런데 나는 그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네. 첫째가 내가 직접 통솔하는 경상도 출신인데 그 수가 23명이야. 둘째가 부산 출신들인데 그 수가 12명이야. 그 가운데에는 말이 부산 출신이지 사실은 전라도에서 온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모두 그들의 말을 따라 그냥 부산사람으로 보고 있지. 셋째가 충청도 출신인데 그 수가 15명이야. 그런데 놀랍게도 충청도 음성과 괴산에서 온 제주 고씨가 8명이나 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충청도 대표를 제주 고씨인 고민달로 선택하고 있지”.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이 질문을 한다; “그러면 부산 출신들은 누가 통솔하나요?”. 이도성이 즉시 답을 한다; “아, 그것은 부산에서 온 고참 정동수이지. 그도 역시 동래 정씨야. 아마 장모님과 고향이 같고 일가가 될 거야…”. 손수석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나름대로 정리를 한다; “그러면 현장 인부의 총대장이 매형이시고 그 좌우에 고민달과 정동수가 보좌를 하고 있는 셈이군요. 그 참, 매형의 권한이 막강하십니다…”;

그 말을 듣자 이도성이 싱긋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 권한이라기 보다는 책임이 무거운 자리이지. 내가 처남 덕분에 총대장의 감투를 쓰기는 했는데 그것이 영 실속이 없어. 그러니 처남이 때마다 좀 촌지를 챙겨 주시게나…하하하”. 그러자 손수석이 명랑하게 웃으면서 대꾸를 한다; “매형,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명절이나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판공비를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열심히 조선인 인부들을 안전하게 관리하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지내는 사이에 1942년 한해가 지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년말에 하루를 잡아 조선인 인부들과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망년회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날 모인 수가 적지 않다. 근 140명에 이르는 대식구이다. 그동안 처자식의 수가 엄청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서로가 한해를 무사히 보낸 것을 축하하면서 다시 인사를 한다;

그 자리에는 손수석이 고향에서 데려온 사람들이 많다. 그 가운데 가까운 일가들이 있다. 예를 들면, 손수석보다 나이가 많지만 항렬이 낮은 족질이 있는데 그 택호가 현동이다. 그리고 택호가 삼산인 일가도 있고 구일인 일가도 있다. 또 형님 뻘이 되는 손수옥도 있다. 그들 대다수가 일본으로 신부감을 데리고 와서 가정을 이루고 이제는 함께 잘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