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24(작성자; 손진길)
4. 태평양전쟁과 너븐들 사람들
손수석은 1937년 12월 26일에 단신으로 15세의 어린 나이에 고향 너븐들 부모님의 집을 떠나 부산역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 그는 일본으로 들어가는 ‘관부연락선’을 타게 되는데 그때 고 장인식 교장의 집에서 일박을 했다. 그곳에서 그를 가장 반갑게 맞아 준 노인이 안성기 교장 부부이다;
안성기 교장은 서배 할배의 친손자인 손수석이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1856년생인 그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1865년에 조선나이로 10세때에 일본으로 들어갔다. 안성기는 일본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1876년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이 되어 조선이 나라의 문을 열자 비로소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동래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 다음해부터 서배 할배 손상훈과 김춘엽 선비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경주 외동에서 오래 생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결혼도 지주 김춘엽의 처제인 이다연과 했다. 지금은 외동소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 부산역 근처에 살면서 일본어 통역일을 하고 있지만 그의 젊은 시절의 추억은 온통 덕천 사랑방모임의 여러 선비들과의 교제에 관한 것들이다.
안성기 교장의 단짝이었던 오경덕 선생은 아들을 따라 북간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의 동지였던 장인식 선생이 별세를 하고 발인을 하고 나자 기이하게도 그 다음날 서배 할배 손상훈의 손자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것도 큰 인연이겠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손수석이 그 어린 나이에 홀로 일본 동경으로 들어가서 고학을 하고 취직을 하여 돈을 벌 것이라고 말한다;
경주 월성 내남 너븐들 그 시골에서 자란 소년이 어째서 그런 당찬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더니 그 대답이 그를 놀라게 한다; “이채령 할머니가 저를 업어 키우시면서 항상 저보고 말씀하셨어요. 너는 커서 돈을 많이 벌어 서배 할배의 천석지기 살림을 꼭 되찾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거예요. 돌아가시기 전에도 저에게 조용히 그렇게 유언을 하셨어요. 저는 할머니께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러니 저는 일본 동경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더하고 돈을 벌어야만 해요”.
그 말을 듣고서 안성기 교장은 기가 막혔다.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그것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천석지기 살림이 내려 앉기 시작한 서배 할배 집안의 비원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천석꾼이 입에 풀칠을 겨우 하게 되는 집안의 모습을 보고서 서배 할매 이채령이 손주 손수석에게 그러한 유언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평소 서배 할배 손상훈을 형님으로 생각하고 있던 안성기 교장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어린 손수석의 성장을 도와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러한 생각으로 그는 마침 동경에서 부산에 와 자신을 방문하고 있던 손자 안춘근에게 손수석을 데리고 다음날 일본으로 들어가서 그를 끝까지 잘 돌보아 주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리고 비슷한 당부를 장인식 교장의 외손자인 배인근에게도 한 것이다.
손수석은 그런 줄도 모르고 배인근을 큰 형님으로, 그리고 안춘근을 둘째 형님으로 모시고 일본에서 2년간 야간 직업학교를 다녔다. 생활비는 동경에 있는 안춘근의 ‘쯔끼모도 쌀 상회’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벌어서 썼다. 그리고 2년이 지나자 1939년말에 운이 좋게도 북해도에 있는 미쯔비시 석탄회사에 경리로 취직이 된 것이다.
1940년 2월부터 신입사원 손수석 곧 일본식 성을 사용하고 있는 ‘쯔끼모도’에게 큰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과의 전쟁으로 일본의 군량미 수요가 커지자 석탄회사에 공급하는 쌀이 부족했다. 따라서 동경의 ‘쌀 상회’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신입사원 ‘쯔끼모도’에게 엄청난 쌀을 구입하라는 상관의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그때 손수석은 동경으로 가서 안춘근을 만나고 부산으로 들어가서 조선총독부의 현지직원을 만나 설득을 했다. 북해도의 탄광이 일본군에게 석탄을 공급하고 있는데 방위산업체인 그곳에 쌀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쌀을 공급해 달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쌀을 동경에 있는 안춘근의 ‘쯔끼모도 쌀 상회’로 보내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 쌀장사가 안춘근과 손수석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1940년 5월에는 조선인 벌목공을 모집하기 위하여 출장을 가게 된다. 미쯔비시 탄광에 목재를 공급하고 있는 삼판회사에서 벌목공의 부족으로 물량공급에 차질을 빗고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석탄회사에서는 조선인 직원인 ‘쯔끼모도’에게 조선인 인부를 구해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 문제는 다행스럽게도 오사카 배인근의 큰 저택에 묵고 있는 조선인 체류자들을 만나서 해결했다. 인부를 인계하는 과정에서 삼판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가토 사장과 좋은 관계가 형성이 되어 그때부터 삼판회사의 이익을 나눌 수 있게 된다;
1940년 한해는 손수석에게 굉장히 바쁜 해이다. 왜냐하면, 그해 가을에 탄광에서 일할 인부가 부족하여 석탄회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이 무리하게 중국대륙에서 전쟁을 수행하면서 일본인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징집하게 되자 일본 열도에서는 젊은 노동력의 부족이 심각해진 것이다.
그 틈새를 석탄회사에서는 ‘쯔끼모도’를 조선으로 보내어 조선인 광부를 데려와서 메꾸고자 한다. 그때의 약속은 조선인 인부에게도 일본인 광부와 동일한 급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 약속을 믿고 손수석은 고향에 가서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온다. 그들은 1940년 11월부터 북해도 광산 또는 삼판에서 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그때부터 1942년 말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모두들 가정을 꾸리고 고향에 송금도 하면서 잘 지내게 된다;
그러나 손수석은 개인적으로 들은 정보에 따라 1943년과 1944년의 일을 미리 걱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제국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태평양사령부를 기습하여 박살을 내었지만 그 효과가 일년 남짓에 불과할 것이라는 비밀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손수석은 고향을 방문했을 때 오예은 간호사와 친한 모친 봉천 할매 정애라에게서 그러한 고급정보를 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가 1942년 가을에 부산에 가서 안성기 교장에게 문안인사를 했을 때에 비슷한 내용을 언뜻 듣게 된 것이다. 1942년이면 1856년생인 안성기 교장이 87세의 고령이다;
그러한 상노인이 어떻게 그런 고급정보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손수석은 그 점이 궁금하여 그 집에 이틀을 머물면서 안춘근 형님 대신에 안춘근의 조부인 안성기 교장의 말동무가 되어 드리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안성기 교장은 장인식 교장과 함께 부산에서 일본인 통역일을 하면서 그동안 국제정세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궁금한 것은 일본 동경에 있는 아들 안용운을 통하여 자료를 얻었다고 한다. 장인식 교장은 오사카에 있는 외손자 배인근을 통하여 역시 정보를 획득했다.
그리고 의문스러운 것은 그동안 2-3년에 한번씩 자신들을 방문하는 오경덕 선생을 통하여 거듭 확인했다. 오선생은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들과 임시정부의 사정에 상당히 정통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오선생은 경성에서 권동진 선생을 만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으므로 국제정세의 이해에 있어서 안성기 교장과 장인식 교장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둘째로, 오경덕 선생은 1935년경 부산을 방문한 이후 종적이 묘연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안교장의 추측으로는 1937년에 일본제국의 군대가 만주를 점령하고 이듬해 만주국을 세우면서 조선인 독립군을 대규모로 토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인 마을들이 불타고 독립운동단체들이 피신을 하면서 오경덕 선생 집안도 더 먼 곳으로 피난을 간 것으로 보고 있다;
셋째로, 홀로 남아 있는 안성기 교장은 그 동안의 이야기를 간추려서 밤새 손수석에게 말한다. 그 내용의 핵심이 과거 ‘신민회’에 관한 것이다. 1907년초에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 선생이 대한매일신보의 실질적인 발간인 양기탁과 함께 만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는 다른 독립단체들과는 굉장히 다른 세가지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1) 첫째가 독립된 조선을 영국식 입헌군주국이 아니라 미국식 민주공화국으로 만든다는 합의이다.
(2) 둘째가 일본제국이 중국대륙에서 유럽열강 및 중국의 군대와 전쟁을 하고 바다에서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하게 되는 시대가 온다고 전망한 것이다. 그때에는 조선인 독립군을 양성하여 구미의 열강과 함께 일본제국의 군대와 전쟁을 쳐야만 한다. 그래야 승전국이 되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수가 있다.
(3) 셋째가 조선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이 아니라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워야만 한다. 그들 졸업생들이 독립군부대를 지휘하는 중심세력이 될 때에 비로소 서로 연합이 되고 함께 효율적으로 일제의 군대와 전투를 할 수가 있다고 본 것이다.
넷째로, 비록 일제에 의하여 신민회가 해산되었지만 다음과 같이 여전히 그 세가지 노선은 다른 독립운동 단체에 의하여 승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일본제국이 만주를 합병하고 성공적으로 일본의 관동군이 중국 동해안으로 계속 남하함으로써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계승한 신민회의 애초 계획은 좌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마지막 기회는 남아 있다는 것이다.
멀리 중국의 내륙도시 중경으로 피신을 가 있는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 신민회가 계획했던 그 독립군이나 광복군을 다시 재건하고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과 합세할 수만 있다면 그 공로로 해방도 얻고 민주공화정의 수립도 가능하다고 안성기 교장이 말한다. 그러므로 1942년 지금부터 앞으로 몇 년간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안성기 교장의 결론이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손수석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허송세월만 보낸 것은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이 일본제국의 막강한 군대의 힘에 눌려서 중국 내륙이나 러시아로 피신을 하고 또한 멀리 미국으로 떠나가 있지만 그들은 분명 일제가 패망하는 그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수석 자신은 어떻게 처신을 해야만 하는가? 부산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그 일을 곰곰 생각하고 있는 ‘쯔끼모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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