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26(작성자; 손진길)
1942년은 봉천 할매 정애라에게 있어서 참으로 다사다난하면서 잊을 수가 없는 한해이다. 4월 20일에 맏며느리 김옥순이 해산을 했다. 딸아이를 순산한 것이다. 3년 전에는 맏손자 ‘손진화’를 낳더니 이번에는 맏손녀를 생산한 것이다. 집안에 경사가 났기에 모두들 기뻐한다;
조부모인 손영주와 정애라는 손녀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상의를 한다. 봉천 할매 정애라가 먼저 말한다; “집안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 최고이지요”. 그러자 손영주가 말한다; “우리 손녀가 순조로운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 이름을 ‘손화순’으로 짓는다. 아기의 부모인 손수정과 김옥순도 그 이름자가 좋다고 한다.
봉천 할매 정애라는 1942년 가을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아들 손수석이 벌어서 고향에 보내어준 돈으로 기어코 천석을 생산할 수 있는 경작지를 모두 장만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아들 손수석은 남는 돈으로 고향 주변의 산을 모두 사라고 말했다. 아들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봉천 할매는 돈이 남았기에 그렇게 했다;
그렇게 고향의 전답을 천 마지기나 사 모으고 또한 주변의 산을 모조리 사두고 있는 손수석의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북해도에서 탄광에 쌀과 목재를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가 않다.
훗날 조선반도에서 일본제국이 물러가게 되면 조선사람들이 직접 탄광을 운영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때에는 자신이 모친 봉천 할매를 통하여 미리 사둔 전답과 산지가 제 구실을 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남다른 인생을 살아오면서 얻고 있는 젊은 손수석의 사업적인 안목인 것이다.
그러한 원대한 뜻이 아들에게 있는지는 봉천 할매 정애라가 미처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시부모님이 생전에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1,000마지기의 땅을 다시 사 모을 수가 있게 된 것이 참으로 감격스럽다. 그 마음은 그녀의 남편인 손영주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1942년도에 조선의 시골에서 천석꾼이 되었다고 하여 사실은 기쁠 일이 별로 없다. 비싼 수리조합비와 농자재 값을 부담하고 쌀농사를 지어보아야 헐값으로 조선총독부가 공출로 거두어 가버린다. 그러므로 농민들은 별로 남는 것이 없다. 그저 뼈빠지게 고된 농사일만 강요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사를 짓고 있는 농촌에서 쌀이 귀하여 농민들이 만주에서 들여오는 강냉이나 귀리 등 잡곡으로 밥을 지어 먹고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재에 밝은 조선의 큰 지주들은 벌써 전답을 팔아 치우고 경성으로 올라가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넓은 전답을 지니고 있어 보아야 생활에 크게 보탬이 되지를 않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천 할매 정애라와 그녀의 아들 손수석은 죽기 살기로 전답을 사서 모으고 있다. 손영주가 보기에 그것은 토지에 대한 일종의 집착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을 말릴 수는 없다. 자신은 애초에 부친이 물려준 400석지기의 재산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가장으로 이미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그해 10월말에는 일본 북해도에서 딸 손해선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봉천 할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왔다. 손해선이 딸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부부는 딸아이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부르기에 편리하도록 ‘이문자’라고 지었다는 내용이다. 사위가 되는 이도성이 고향 예천에서 일찍이 서당훈장을 했다고 하더니 딸아이에게 글을 잘 아는 유식한 여인이 되라고 그렇게 이름자를 지었는가 보다;
그렇게 1942년 봄에서 가을까지 봉천 할매 정애라는 집안에서 기쁘고 즐거운 일이 연이어 발생을 하고 있어 정말 행복하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기쁨과 함께 슬픔을 같이 겪도록 되어 있는가 보다. 왜냐하면, 그해 겨울에 계속 그녀의 친정에서 초상이 나기 때문이다.
11월에 들어서자 경주 성동에서 봉천 할매에게 부고가 날아든다. 홀로 남으신 외숙모 이가연 여사가 향년 87세로 별세를 했다는 것이다. 외숙부 김춘엽이 1930년에 작고를 하였으니 홀로 12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마침 농한기인지라 봉천 할매가 경주 성동으로 가서 조문을 하고 문상객들을 대접하는 부엌일을 도왔다.
외사촌 김영식이 큰 상주인데 1874년생이므로 벌써 고희가 다 되어 간다. 그 아들 김호길이 역시 상주인데 봉천 할매 정애라 자신보다 4살이 적으니 벌써 48세이다. 상주들의 나이를 생각하니 외숙모께서 참으로 장수를 하신 것이다. 그래도 함께 서있는 상주들의 모습을 보니 슬퍼 보인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의 상은 역시 슬픈 것이다;
그런데 그해 12월에는 경주 교리에서 급한 기별이 온다. 손영주의 장인인 정진평 옹이 위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영주와 정애라가 급히 병문안을 간다. 정진평은 1855년생이므로 금년에 88세이다. 당시로서는 참으로 고령이다. 따라서 면역력이 크게 떨어져서 감기 끝에 자리를 보전하다가 이제는 위독하게 된 것이다.
힘이 없어 축 늘어져 있다가 정진평이 잠시 눈을 뜬다. 주위에 사랑하는 아내 김경화와 아들 정한욱 그리고 딸 정애라가 있는 것을 식별한다. 부인 김경화가 남편 정진평의 노쇠한 손을 잡아 준다;
그러자 정진평이 병석에서 모두에게 몇 마디 가느다란 소리로 유언을 한다; “나는 동래 봉천마을에서 이곳 경주에 장가와서 한평생 당신과 함께 참 잘 살았다오... 이제는 당신의 친정이 있는 마을 서배로 먼저 가서 그 뒷산에서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게요. 천천히 오세요… 그리고 너희들은 홀로 남게 되는 너희 어머니를 잘 모셔다오. 잘들 있기를…”.
정진평이 그렇게 유언을 마치고 눈을 감자 가장 슬퍼한 사람은 역시 그의 사랑하는 아내 김경화이다. 그녀도 86세의 고령이다. 노부부가 지금까지 서로를 의지하여 물과 공기가 좋은 경주 교리에서 함께 살아 왔는데 이제는 이 세상에 김경화가 외로이 홀로 남게 되었다;
주위에 아들과 며느리가 있고 내남에는 딸과 사위가 있다고 하지만 그들이 남편을 대신할 수는 결코 없다. 그래서 그런지 김경화는 그 노구를 이끌고 남편 정진평의 장례를 치르면서 자신도 빨리 서배 마을 뒷산으로 가서 묻히고자 한다. 그녀는 남편의 산소 가에 피는 할미꽃이 되고 싶다고 자주 말한다;
미망인 김경화가 그렇게 자꾸만 생각을 하고 발심을 해서 그런지 그만 다음해 정월에 아무런 미련이 없이 잠을 자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천천히 오라고 남편 정진평이 말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봉천 할매 정애라와 그 남동생 정한욱은 두 달 사이에 부모님의 초상을 모두 치르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렇게 1943년 정월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봉천 할매 정애라가 경주 교리에 들릴 일이 별로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친동생이 그곳에 살고 있어도 마치 자신의 친정이 아닌 것만 같다.
정애라는 갑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고아가 되고 만 느낌이다. 그래서 53세의 봉천 할매는 1943년 봄부터는 교리에 들리지 아니하고 그냥 경주 오일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혹시 시간이 나면 회생의원에 들러 절친 오예은만 만나는 것이다.
1943년 3월에 손영한의 아내인 이신자가 동서인 봉천 할매를 찾아온다. 그리고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해준다. 그녀의 셋째 딸 손영옥의 혼처가 결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서 봉천 할매 정애라가 말한다; “형님, 신랑감이 어디 사는 누구이지요? 영옥이가 수석이와 동갑이니 벌써 21살이네요. 금년 안에 시집을 보내면 딱 좋겠네요…”.
그 말을 듣자 이신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 동서 말이 맞아. 처녀 늙혀서 좋은 일이 없다고… 그래서 우리는 금년 가을걷이가 끝나면 혼례식을 올리고자 하네. 신랑감은 경주 서악에 살고 있는 월성 최씨인데 이름이 최해준이야. 사람이 아주 성실하고 순하며 집안살림도 먹고 살만 하다더군”.
혼사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더니 그해 10월말에 손영옥이 결혼을 한다. 그리고 12월에는 일찍 신행을 하여 시집으로 들어간다;
옛날에는 친정에서 일년이나 있다가 시집으로 들여보내기도 했지만 요즈음은 그것이 아니다. 보통 6개월 이내에 신행을 겸하여 시집으로 들여보내고 있다;
그런데 신부의 나이가 20세가 넘었으면 더 일찍 시집으로 보내준다. 자식을 일찍 낳아서 기르라고 하는 의미이다.
이제 손영주의 친형인 손영한 부부는 막내 딸 손자옥만을 데리고 너븐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된다. 그들 부부는 양아들인 손수상이 일본 북해도에서 삼판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고향집으로 송금을 해주고 있어 나름대로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돈보다 더 바라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손수상 부부가 빨리 아들을 낳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종내 무소식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창 젊은 부부이니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서 한번 기다려 보기로 한다. 그렇게 내남 너븐들 사람들은 평상시처럼 농사를 지으며 일본 북해도에 가 있는 자녀들 생각을 하면서 1943년 한해를 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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