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27(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1. 11:29

봉천 할매27(작성자; 손진길)

 

1943년 가을이 되자 쯔끼모도는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미쯔비시 비바이 석탄회사’에서 이상한 현상이 은근히 발생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자신이 조선에서 데리고 온 인부들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광부의 급료를 지급하고 있는데 다른 인력회사에서 데리고 온 조선인 일꾼들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임금지불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탄광촌인 ‘비바이’의 위치는 삿포로의 북동쪽 60km지점이다;

쯔끼모도가 회사에서 경리일을 보고 있으므로 그 사실을 일찍 눈치채고 있다. 그것은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쯔끼모도는 은밀하게 다른 인력회사를 통하여 일본 북해도에 광부로 들어온 조선인에게 물어본다; “조선 어디서 이 먼 곳 일본 북해도까지 와서 험한 광부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의 말은 사실이다. 탄광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다. 쯔끼모도가 근무하고 있는 미쯔비시 탄광만 하더라도 1941년 3월에 큰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그 조선인 광부가 깜짝 놀란다. 석탄회사의 정식 사무직원인 것 같은데 조선말을 워낙 유창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는다; “혹시 조선사람입니까?”. 쯔끼모도가 웃으면서 답한다; “네, 저는 조선 경주 출신 손수석이라고 합니다. 이곳 일본에서 고학을 하고 이 회사에 경리로 들어와서 4년 가까이 근무하고 있지요”.

그 조선인 광부는 자신의 정체를 정직하게 밝히고 있는 쯔끼모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 놓는다; “저는 지난달에 조선 충청도 제천에서 이곳으로 왔지요. 일본인 인력회사 직원이 저희 고향을 방문하여 일본 북해도에 광부로 가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여 왔는데 생각보다 급료가 상당히 적습니다. 채탄작업이 엄청 힘이 드는 중노동인데 비하여 저희들은 참으로 적은 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 저희들이 신참이라서 그런 모양이지요…”;

그 광부가 말끝을 흐리고 있는 것을 보니 앞으로도 급료가 오를 전망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쯔끼모도가 관심을 가지고 두 달을 더 지켜보았다.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다. 그들은 겉으로는 광부모집에 응하여 채용이 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징용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데 불과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쯔끼모도가 위기를 느낀다.

그래서 쯔끼모도가 시간이 나는 대로 조선인 징용자들이 일본의 어느 곳으로 보내어지고 있는지를 알아본다. 그 결과 일본 열도의 남쪽에 있는 탄광에서부터 멀리 북쪽 사할린에 있는 탄광에까지 여러 곳에서 채탄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는 삼판 현장과 조선소에서도 강제노역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43년말에 회사에서는 쯔끼모도 자신에게 조선으로 들어가서 광부를 더 모집하여 오라고 지시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자신이 모집하여 오는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 십중팔구 석탄회사에서는 정식 광부가 아니라 징용에 해당하는 자로 처우하고 말 것이다. 그 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쯔끼모도는 한달쯤 출장일정을 신청하여 노동자를 구하러 가는 명분으로 일본 동경과 오사카 그리고 조선의 부산과 고향지역을 두루 돌아보고자 한다.

먼저 동경으로 가서 안춘근 형을 찾았다. ‘쌀 상회’에서 일을 하고 있던 안춘근이 손수석에게 급히 자신의 집으로 가서 부친 안용운을 좀 만나 달라고 부탁한다. 어쩐 일일까?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안용운 내외가 손수석을 맞는다. 마치 친조카를 맞이하듯이 각별하다. 그러면서 한가지 부탁을 한다; “수석이 자네 나하고 부산으로 함께 가지 않겠는가? 내 부친 안성기 교장이 많이 위독하다고 하여 내가 직접 오래간만에 부산을 방문해야 하네”.

손수석이 지체하지 아니하고 대답한다; “물론입니다. 제가 숙부님을 모시고 부산으로 가겠습니다. 저는 마침 조선에 출장을 가는 길에 이곳에 잠시 들린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안용운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부인 박미자에게 여행가방을 챙겨 달라고 부탁한다. 박미자는 자신보다 한살이 적은 남편 안용운이 부산의 부모님을 방문하고 잘 돌아올 수 있도록 손수석에게 세심하게 돌보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부부사이의 금슬이 좋은 것이다.

손수석은 안용운과 함께 ‘쌀가게’에 들러 안춘근에게 부친을 모시고 조선 부산에 좀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안춘근은 자신이 부친을 모시고 가야 하는데 가게일 때문에 그러하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여러 번 말한다. 손수석이 씨익 웃으면서 답한다; “형님 일이 제 일이고 제 일이 형님 일이 아닙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숙부님을 잘 모시고 무사히 조선을 다녀오겠습니다”.

동경에서 시모노세끼까지 열차편으로 가서 ‘관부연락선’을 갈아타고 부산으로 들어간다. 상당히 길이 멀다. 그 여행을 위하여 손수석은 비싸지만 좋은 좌석표를 산다. 그 이유는 안용운이 1884년생으로서 자신의 부친인 손영주와 동갑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나이로 벌써 환갑이다. 한겨울 12월말에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두사람이 완전히 독립된 칸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열차표 값이 상당히 비싸지만 난방시설이 좋아서 따뜻하다. 손수석은 그렇게 좋은 특실에 안용운 숙부를 한번 태워주고 싶어한다. 그들 부자에게 손수석이 진 사랑의 빚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도중에 안용운이 손수석에게 참으로 좋은 정보를 알려준다. 그 내용이 두가지인데 하나는 일본의 전쟁소식과 또 하나는 조선인들의 징용과 징집에 관한 이야기이다.

안용운은 부산에 살고 있는 안성기 교장의 차남이다. 부친 안교장을 닮아서 그런지 머리가 명석하다. 따라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관하여 그 원인과 결과 그리고 전개과정을 꿰뚫어보는 눈이 굉장히 예리하다. 그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명치원로들이 일본사람들을 근대화하고 일본 열도를 산업화하기 위하여 내건 구호는 동양의 끝에 있는 일본이 이제는 서양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여서  서양의 선진국처럼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름하여 ‘탈아입구’ 정책이다. 참고로 그 최초의 주창자가 ‘후쿠자와 유키치’인데 그의 초상이 일본화폐에 인쇄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제국이 중국대륙을 침략하면서 서양의 열강들과 다투게 된다. 1930년대에 일본의 군대가 만주를 완전히 점령하고 이제는 중국 대륙까지 집어 삼키겠다고 나서고 있으므로 1900년대부터 오래 일본을 지지하고 있던 영국과 미국이 태도를 달리하고 있다. 한동안 사이 좋게 아시아의 식민지를 합리적으로 나누어서 잘 지내온 그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약속을 깨고 일본이 더 많은 식민지를 가지겠다고 중국에서 침략전쟁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은 일본제국에 대하여 중국에서 철수를 하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제재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포가 아니다. 실제로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통보이므로 일본제국이 고심을 한다.

둘째로, 그러나 일본제국으로서는 중국대륙까지 식민지로 삼아야 자신들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야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진정한 강대국이 될 수가 있다. 그리고 산업근대화에 든 비용과 식민지를 개척하는데 든 비용을 전부 회수하면서 이익을 창출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미국과 영국의 요구를 묵살하면서 중국대륙에서 전투를 계속한다.

그런데 천우신조로 1939년 유럽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발생한다. 그동안 일본을 견제하던 영국이 히틀러의 나치에 의하여 코너에 몰리고 있다. 이때가 좋은 기회이다. 일본은 더 많은 군대를 중국으로 보내어 완전히 중국을 집어 삼키고자 한다. 그러자 미국이 가만있지를 않는다. 중국 장개석의 군대를 지원하는 한편 미국의 우세한 해군력으로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하여 일본이 수입하고 있는 지하자원과 석유의 보급을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셋째로, 일본제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의 선택은 영국과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아니하는 것인데 그 방법이 두가지이다; 하나는 유럽의 이른바 ‘주축국’인 독일 및 이태리와 동맹을 맺어 영국을 견제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쫓아내기 위하여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1940년 7월에 ‘대동아 신 질서 건설”을 위하여 일본이 앞장설 것이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8월에는 일본외상이 처음으로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구상을 발표한다. 그 요지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약소국들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여 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서양세력을 몰아내고 산업근대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 선진화 모델이 바로 일본제국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일본제국이 더 이상 ‘탈아입구’ 정책을 추진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그 반대로 ‘탈구입아’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동아의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데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를 아니하고 있다. 식민지의 백성들에게 일본이 지원을 할 터이니 함께 민족해방전쟁에 박차를 가하여 제국주의 서양세력을 단숨에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쫓아내자는 것이다.

나아가서 일본제국은 1941년 12월 7일에 기습적으로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고 그 다음날 8일에는 필리핀에 있는 미군기지를 공격하면서 그것을 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의 개시라고 말한다. 그렇게 ‘대동아 신 질서 건설’의 기치를 내세우고 있다.

또한 일본의 군대가 앞장을 섰으니 이제는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나라와 민족들이 일본의 군대와 연합하여 서양세력을 함께 내어쫓자고 말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의 형성’이라는 슬로건을 소리높이 외치고 있다. 참고로 그러한 취지를 일본제국은 그들의 우표에까지 담고 있다;

넷째로, 그에 따라 몽고와 중국의 일부 군벌들 그리고 동남아의 다양한 민족해방전선의 군대들이 일본제국의 편을 들어서 함께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이 미화시키고 있는 슬로건에 속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치자고 하면서 일본제국은 스스로 동양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일제야 말로 조선을 집어삼키고 만주와 동부 몽고에 괴뢰정권을 수립하였으며 중국의 상당부분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이 진정으로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고 ‘대동아 신 질서’를 건설하고 싶다면 조선과 만주 그리고 중국에서 우선적으로 군대를 철수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러한 조치가 전혀 없이 무조건 서양세력이 침략자들이고 자신은 해방자라고 공언하고 있으니 그것이 자가당착이다.

안용운은 그같은 사실을 손수석에게 말하면서 일본제국이야 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가증한 위정자들의 나라라고 결론삼아 말한다.

다음으로 안용운은 일본의 조선인 징집과 징용 정책에 대하여 손수석에게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일본의 군부가 계획한대로 전쟁이 수행이 되지를 아니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대륙을 완전히 점령하는데 1937년부터 1939년까지 2년간의 전쟁기간을 설정하였다. 그런데 1943년말이 되어도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모든 역량을 중국 완전정복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본제국의 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일본군대에 편입하는 한편 조선의 장정들을 징용하여 후방의 방위산업체는 물론 전투지역에 인접한 건설현장에서 인부로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일본의 군부는 아시아 태평양에서 미국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기습공격을 하는 경우 1년 안에 승리를 하고 우세하게 타협을 하는 소위 ‘쇼부’를 볼 수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그 계획이 기습적인 공습을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나자 그만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942년 6월 하와이 북서쪽에 있는 미드웨이 미군기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1943년말인 지금까지 태평양과 그 연안지역에서 일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일본의 군부는 심각한 연료난과 원자재난을 겪고 있다. 동남아시아를 거의 차지하고 자원을 획득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민생산업이 도탄에 빠지고 군수물자까지 제대로 공급이 안된다. 민간에 있는 그릇까지 전부 끌어 모아도 무기생산이 부족하다. 이제는 전쟁비용도 거덜이 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인 징용자에 대한 급료지급은 전부 외상이 되고 만다.

안용운은 손수석에게 단언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군부가 용하게도 버티고 있지만 내년부터는 일본정부가 재정파탄이 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1944년에는 노골적으로 강제징용이 시작이 될 것이니 수석이 너는 그동안 일본으로 데리고 온 조선인 근로자들을 후방으로 물리는 것이 좋겠다”.

손수석이 그동안 그 문제 때문에 혼자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안용운이 어떻게 알았는지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실천에 나서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손수석은 안용운과 동경에서 시모노세끼까지 함께 기차여행을 하면서 그의 고견을 참으로 겸허하게 경청하고 있다.

그만한 탁견을 가진 선생을 만나기가 쉽지 아니한 세상이다. 손수석이 안성기 교장과 그의 아들인 안용운으로부터 내밀하게 큰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인연이 조부인 서배 할배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생각하고서 손수석은 마음속으로 조상의 음덕에 새삼 감사하고 있다.